사람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많은 사람들은 선택을 포기하고 다른 이가 정해준 길을 따라가길 원한다.
책임을 진다는것은 많은것을 짊어져야 한다는것을 알기에.
삶이 힘들기에 책임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였고 사람들은 선택을 포기하였다.
선택에 따른 결과와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선택을 포기하였다.

그렇기에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은 제 앞길을 열어 줄 무언가를 갈구하고 갈망한다.
그렇기에 삶의 선택이 힘든 사람들은 제 선택을 대신 할 무언가를 갈구하고 갈망한다.

목적 없는 삶에 목적을 부여받고 싶은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들었다.
선택 없는 삶에 선택을 대신하고 싶은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들었다.

그렇기에 사람은 만들었다
그렇기에 도시는 만들었다

무언가가 가르키는 방향을
무언가가 정해 버린 목적을
무언가가 만들어 낸 선택을

지령을








검은 골목 사이로 하얀 전령이 지령을 손에 든 채로 길을 찾아 해메인다. 어딘가 불안해보이고, 나약해 보이고, 유약해 보이며, 안타까워 보이는 작은 전령은 덩치에 맞지 않는 거대한 대검을 등에 진 채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무언가를 찾는다.

그 거대한 검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 필연적으로 시비가 걸려올 법도 한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한사코 전령에 대해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작은 전령의 복장은 한 가지를 말하며 그것과 연관되면 매우 성가시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그 복장을, 검지를 기피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얀 전령은 지령을 들고 어딘가를 찾아 해매며 길을 나아간다.




이윽고 전령은 어느 골목의 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E2718의 2번째 문."
수많은 문들 중 하나를 전령은 조심스레 열어본다.
문을 연곳에는 수많은 갈림길과 복도가 늘어서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길을 잃을 것 같은 미궁의 모습에 전령은 잠시 망설이다 미궁 속으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8걸음"
수많은 갈림길이
"왼쪽으로 18걸음"
수많은 복도가 방문자의 정신을 갉아 먹는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토록 정신사나운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지령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수많은 의문을 속으로 삼키고 전령은 어둠 속을 나아간다.


"... 계단이 있네. 지하로 내려가는 건가."
수없이 많은 갈림길과 복도의 끝, 한없이 내려가는 듯한 계단이 전령을 맞이한다.
돌아가고 싶어도 수많은 갈림길을 거쳐 온이상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다. 여기까지 온이상 끝을 보아야 한다.
지령 때문이 아니라 전령 자신이 이 지령의 끝을 보고 싶어 하였다.


"이 계단은... 어디까지 이어진 거지?"
한참을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계단은 여전히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뒤를 돌아보아도 이미 자신이 내려온 복도의 불빛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령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미세했던 소리는 어느새 가슴을 울리는 진동이 되고 희미했던 불빛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계단의 끝. 희미한 문 너머로 빛과 소리가 세어들어오고 있다.
지령이자 전령의 여정의 끝을 고하는 듯한 문. 하지만 전령은 망설였다.
"... 정말 들어가도 괜찮은걸까."
이제 와서 거짓 지령에 대한 벌을 내리진 않을까.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던 자기 선택 때문에 이렇게 직접 불러서 처형하려는 게 아닐까?

그동안 지령이 안내한 수많은 파멸들, 그 파멸의 전령이였던 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끔찍한결말을 상상하다 고개를 내젓는다.
자기 선택으로 행한 일들이다. 후회는 없으며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치를 것이다.
죄책감으로 점철된 전령의 삶,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였지만 그 짧은 시각은 전령에게 충분한 지옥을 선사하였다.
그 지옥 속에서 전령은 자기 의지로 자그마한 반항을 일으켜 보았다.
자기 선택으로 거짓 지령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을 고통받지 않게 하고 싶었다.
분명 그의 선택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을 비웃듯 지령은 사람들에게 파멸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지령은 그 파멸을 전령에게 오롯이 보여 주었다.
사람들의 원망은 전령을 향하였고.
마음 약한 전령은 상처받았다.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 끝이 왔음을 전령은 알 수 있었다.
미래를 읽을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자신은 끝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연 전령은 선택의 결과와 마주하였다.


"...뭐지? 이 거대한 기계 장치들은..."
사방에서 울리는 낮은 진동음. 사람의 맥박처럼 느껴지는 소음과 진동들 사이로 분주히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움직이고 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분주히 움직이던 기계들은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뜻밖의 불청객의 방분에 당황한 탓일까, 아니면 고대하던 손님의 방문에 기뻐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서 오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징적인 하얀 망토에 황금 인장. 검지의 상징. 검지로 보이는 여인이 전령을 맞이한다.




삭막한 공간에 알 수 없는 기계들. 그 사이에서 나타난 검지로 보이는 알 수 없는 여인.
얀은 알 수 없는 시선을 느끼며 여인에게 말을 물었다.
"당신은?"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전 이곳의 방직자예요."
자신을 방직자라 소개한 여인은, 방직자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서글퍼 보이면서도 기뻐보이는 듯한 미소.
얀은 그녀의 미소가 기이한 공간과 잘 어울리는 미소라 생각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이곳에 손님이 도달하니 무척 반갑네요? 절 따라오세요!"
방직자는 발걸음을 옮겨 알 수 없는 기계들 사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얀은 당황해하며 방직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정적에 휩싸인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얀은 방직자에게 물었다.
"...방직자? 당신도 검지인가요?"


방직자는 걸음을 멈추고 얀을 돌아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예. 그렇답니다."
방직자는 고요히 멈춘 기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지령을 받고 이곳에 찾아오는 것을 기다렸어요."
"그걸... 어떻게...?"
얀은 이윽고 적의에 물든 얼굴로 방직자에게 물었다.
"지령이 제가 오는 것까지 알려주었나요?"
"아뇨. 하지만 당신이 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얀은 당황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방직자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일단 앉으세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어느새 얀과 방직자는 거대한 기계의 앞, 이 알 수 없는 공간의 중심부에 도착하였다.
거대한 기계는 이따금 알 수 없는 거대한 진동을 내뱉으며 그 거대한 몸을 떨었다.
방직자는 그 기계의 받침대, 지지대로 보이는 턱에 다소곳하게 앉아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미안해요. 이곳에는 마땅한 의자나 테이블이 없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방직자는 얀의 당혹스러운 표정, 죄책감에 물든 표정, 긴장 어린 표정을 즐기는 듯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말없는 주시를 견디지 못한 얀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이 장소가 지령과 관련이 있나요?"


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지는 원초적인 의문.
얀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지령의 근원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확인하고자 하였다.


방직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얀을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네. 이곳은 지령이 탄생하는 곳이에요."
"지령이 탄생한다고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네요."
방직자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다시 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의 이름을 들어도 될까요?"
"저는... 얀... 얀 비스모크라고 합니다. 전령이예요. 아직 한 달도 안 되었고요..."
"네. 반가워요 얀. 제 이름은 노른이라고 해요."

이름을 들은 노른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처음 받아보는 감정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얀은 다시금 물었다.
"이곳에서 지령이 탄생한다는 게 무슨 말이죠?"
얀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질문을 던졌다.


"그 말도 안 되는 잔혹한 명령으로 가득한 지령이 이곳에서 탄생했나요?"
어느새 얀은 분노가 차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불합리, 몰이해, 불가역한 지령이 이런 곳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보내는 이 여인이야말로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참상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이해합니다. 지령은 잔인하고 그 뜻을 헤아리기어려운 난해함에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죠."
노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지령의 보호를 받아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령을 원망하나요?"


지령을 원망하냐고? 당연하다. 지령을 수행한다는 이유 하나로 가족들을 잃고 친구들을 죽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외면하고...
죄악감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수행했다. 지령은 수행되어야 하니까.
지령은 우리를 올바른길로 인도해준다고 하니까.


하지만 지령을 원망하고, 무서워하고, 끔찍해서 보고 싶지도 않은 얀에게
지령이 전령이라는 죄책감을, 책임을, 고통을 선사하였을 때.
얀은 비로소 지령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지령은 우리를 올바른길로 인도해주는 걸까?


수없이 많은 죽음과 비극과 절망을 얀은 보아야 했다.
수없이 많은 죽음과 비극과 절망은 얀을 원망하였다.
수없이 많은 죽음과 비극과 절망을 얀은 목도한끝에.
얀은 자기 의지로, 선택으로
거짓된 지령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령은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얀의 거짓된 지령조차도 지령으로써 수행하라 대행자들에게 전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얀은 지령에 놀아났다.

"지령을 원망하냐고요? 원망하다 마다요! 그 개 같은 지령을 받은 사람들의 원망과 절규를 들어 본 적있나요? 자기 자식의 심장을 뽑아 구워 먹으라는 지령을 받은 어미의 절망을 들어 본 적있나요? 차마 제 자식을 죽이지못해 자근자근 천천히 사지를 찢는 대행자의 집행을 받으면서도 자식을 걱정하던 어미에게 자식에게 도달한 지령이 자기 심장을 뽑아 구워 먹으라는 지령이 도달했다는 걸 안 어미의 증오를 받아본적있나요?"


노른은 말없이 얀의 절규를 듣고 있었다.
세상을 저주하고, 지령을 저주하고, 도시를 저주하고, 마침나 자신을 저주하던 얀은 고요히 물었다.
"당신이... 그 말도 안 되는지령을 만든 건가요?"
살기 어린 눈. 모든 것을 증오하고 저주하던이의 눈빛을 받았지만 노른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 대답하였다.
"어쩌면 그럴지도요."
얀은 대검을 휘둘러 노른을 베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제가 망설였기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죠"
노른의 눈에 지독한 슬픔과 죄책감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과 같은 눈을 하고 있기에 얀은 검을 거두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얀은 검을 거두며 설명을 요구하였다. 대답에 따라 언제든지 벨수 있도록 검의 손잡이를 꼭 움켜쥔 체.


노른은 그러거나 말거나 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전 지령의 내용을 만들지 않아요. 제게 내려진 지령은 오직 물레와 베틀을 지키는 것이죠."


얀은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노른은 왜 그런 대답을 하였는가.
"네? 그럼 지령이 탄생한다는 건..."


노른은 거대한 진동을 토해내는 기계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진동이 느껴지시나요?"
"이 거대한 기계가 이따금 흔들리는 건 느껴져요. 하지만 이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그저 진동일 뿐인데요."
"그렇죠. 그저 진동일 뿐이죠."


노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기계 옆에 있는 물레중 하나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에게는 아닌가 봐요"
어느새 노른의 말은 부드러워졌다.
노른이 물레중 하나에 다가서자 고요하게 멈추어 있던 기계들이 다시금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레는 실을 자아내고 베틀은 천을 뽑아낸다.


"이곳의 기계들은 도시의 박동을 이곳에 모은답니다. 도시 사람들의 발걸음, 고함 소리, 누군가의 멎어가는 심음, 슬퍼하는 사람의 비통 그 모든 진동들"
물레들은 어느새 실을 자아내고 그곳에 거대한 기계는 그 거대한 추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얀은 말없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노른은 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지령이 탄생하는 모습입니다."
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이게... 지령인가요? 이 알 수 없는 난잡한 무늬가 그려진 실들이?"
"본질적으로 보면 예. 이게 지령입니다. 다만 도시의 언어로 쓰여져 있어 저희는 알아볼 수 없기에 한차례 정제 과정을 거쳐야하나 봐요."


노른은 솜씨좋게 실들을 거두어 베틀에 넣고 천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일련의 과정들. 얀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자아낸 실은 베틀을 거치며 익숙한 색, 익숙한 모습, 익숙한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얀은 절망하며 다가섰다.
"그럴 리가..."


노른은 말없이 자아넨 '지령'중 하나를 얀에게 건네주었다.
얀은 그 지령을 받고 내용을 확인하였다.
아직 인장은 찍히지 않았지만 곧, 인장이 찍혀 검지에게 전달될지령임을 얀은 알 수가 있었다.
"...채헌에게. 삼거리에서 손을 7번 흔드는 사람을 만나면, 그자의 집까지 따라가라."


노른은 얀에게서 지령을 돌려받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도장을 찍고 익숙한 듯 거대한 기계에 연결된 수없이 많은 파이프들 중 하나에 지령을 넣고 닫았다.
"적어도 채헌씨는 오늘 지령에 의해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겠군요."


하지만 지령은 예상할 수 없기에 지령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더라도 채헌 본인이 지령에 의해 죽을 수도있다. 다른 이의 지령에 의하든, 지령을 수행하지 못해서든.






그 모든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한 얀은 자기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쓸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절망에, 지옥에, 비극에 빠트린 지령
"정말... 지령이야."



노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얀을 바로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얀은 그러거나 말거나 몰아치는 감정에 몸을 떨며 말했다.
"이 물레, 베틀, 파이프까지... 대체 누가 만든 거지? 무엇을 바라고...?"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저도 지령으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


"지령..지령.지령.지령!"
얀은 고통스러운 듯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울부짖었다.
"대체 누가 이걸 만든 거야? 뭘 바라고? 난 누구때문에 그토록 고통받은 거야? 그 사람들은 대체 뭣 때문에 그토록 잔인하게 죽은 거야?"


절규하던 얀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노른에게 물었다.


"...지령에 의문을 품은 적은 없어...?"
"..."
"그냥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글따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줄 알아?"
노른은 아직 배송되지 않은 지령을 만지작거리며 얀을 바라보았다.
연민, 동정, 죄책감, 슬픔, 아픔, 애정, 절망 수많은 감정들이 몰아치는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얀은 더더욱 슬퍼졌다.
"여기서 지령이 만들어졌다면... 적어도 잔인하지 않게 바꿔줄 수도 있었잖아."
얀은 애절하게 물었다.


노른은 얀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이곳에서 지령을 만들고 보내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얀도 이해하였다. 그녀 또한 선택의 자유가 없었음을.
지령을 어기면 어디선가 만들어진 다른 지령에 의해 죽을 것이다.
도시는 넓고, 지령을 받는 이들은 많기에. 이 거대한 공간은 도시곳곳에 있을 것이다.


"저는... 망설였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시하는지령을 볼 때마다 매번 망설였습니다. 이 지령을 바꾸면 누군가는 적어도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알기에 망설였습니다."
노른은 자기 죄를 고해하듯 슬픈 얼굴을 하며 얀에게 고백하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얀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하였다. 자신 또한 처음 거짓 지령을 만들었을 때는 불안감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수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는 게 두려워서? 나만 살면 그만이니까? 타인의 고통따위 알 필요 없으니까?"
얀은 노른을 비난하듯, 원망하듯 물었다.
그러나


"아뇨."

노른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저는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될까 봐, 구하지 못하게 될까 봐 망설였습니다."

얀은 이해할 수 없어 노른을 바라보았다.


"얀, 단도 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노른은 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전 단편적인 당신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얀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미래를 봤다고? 지령을 통해서?"
지령은 전능했다. 거짓으로 자신이쓴 지령조차 예지하고 그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다.
미래를 보는 것쯤은...


노른은 부정하였다.
"아뇨. 이것은 지령과 상관없이 오롯이 저의 선택으로 얻은 예지입니다.
저는 단편적인 가능성의 미래들을 보았고 수없이 많은 당신들을 보았어요.
그중에는 진실을 접하고 절망하며 망가지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죠."


노른은 작디작은 얀을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모든 진실을 듣고 선택해야 해요."



당혹스러워하며 얀은 노른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실...? 이것 말고도 다른 진실이 있는 거야?"


노른은 당혹스러워하는 얀을 보며 말했다.
"지령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으셨죠? 지령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령은 도시의 사람, 도시의 의지 그 자체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입니다."


"..."
"선택의 끝은 항상 좋은 결과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선택에 따른 결과와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하기에. 슬프게도 선택의 기회조차 포기하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막상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을 포기하는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노른은 말을 쏟아 냈다.
"그 결과 지령은 탄생했습니다. 선택을 포기한 사람들의 선택과 목적을 대신 수행해주는 신으로써"
노른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지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시의 사람의 소리, 도시 사람의 의지가 모여 지령을 만들고 선택을 거부하고 정해준 목적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지령은 찾아가요.
도시 사람이 하는 일은 도시의 일. 도시의 의지를 도시 사람이 대변하는 것입니다."

얀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한 모든 잔인한 일이 도시의 의지였다고?
도시는... 왜 그렇게 잔인해야만 했는데."


노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도시의 사람들이 잔인하기에, 도시의 의지가 잔인해졌기에 지령 또한 잔인해졌습니다."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진실.
어쩌면 회피하고 있었을 진실.
마주한 진실은 실로 가혹하였다.



얀은 눈을 감았다.
















허무하다.
지령을 전달하며 수많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지령을 전달하므로 사람들이 잔인한 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사람들이 잔인하기에 잔인한 일하는 것뿐이었다.
끔찍한 일들은 결국 벌어질 일들이었다.
지령이 아니어도 도시 곳곳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름다운 목소리.
이제 알 거 같아.
도시가... 모든 사람이... 원래부터 잔인하므로. 사람은 그런 존재기 때문에...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소망이든, 욕망에서 우러나온 야망이든 간에 모두가 바란 것에 대한 결과인 거지.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 것도, 누군가의 소중한 걸 빼앗은 것도...
그 끔찍한 비명을 들으며 태연한 척 죄악감에 몸을 떨었던 것도.
다.
날 좀 먹는 쓸데없는 감정이었어.
작디작은 내 작은 몸부림조차도 도시의 의지라니.
내가 한일은 도시의 일부... 도시의 의지...
그러므로 멋대로 지어낸 거짓 지령을 전달하는 것도 결국, 내 자유의지가 아닌 도시의 의지가 아닌 도시의 의지였던 거야.
하지만... 그건 곧.. 나의...








딱콩!

둔중한 통증이 얀의 이마를 가로지른다.
얀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노른은 무표정하게 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 뭔 놈의 머리가 그렇게 단단해요? 때린 손이 더 아프네요."
"대체... 무슨...?"
알 수 없는 상황에 얀은 당황했다.
지금 나를 때린 것인가? 아프진 않지만 당혹스러웠다.

노른은 웃으며 말했다.
"크게 착각하고 절망하는꼴이 우습네요. 내가 이런사람 꼴 보겠다고 그토록 기다려 왔다니."

얀은 크게 분노하였다.
"당신이 대체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다고!"

노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된 지령을 쓴건 오로지 당신의 선택이었잖아요?"

얀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뭐?"

노른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당신은 도시의 의지가 아닌 자기 의지로 다른 이들을 도우려 하였습니다. 당신은 도시의 선택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다른 이들을 도우려 하였습니다."


노른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의지로 선택하였습니다."


"당신은 지령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면서도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냐... 내 발버둥은... 이 작디작은 몸부림은..."


노른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작디작은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그 작은 몸부림은 분명히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었어요."


거대한 기계를 올려다보던 노른은 이따금씩 작은 진동을 토해내는 거대한 기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보잘것없고 작디작은 진동이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그 작디작은 몸부림이 누군가의 운명을 구하는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노른은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 무릎을 구부리고 얀의 눈높이에서 얀의 눈을 응시하였다.
"지령이 당신의 의견을 듣는 게 그렇게 소름 끼치나요? 이것조차도 지령의 손바닥 안이였다고? 아니에요. 지령은 당신의 행동을 예상하고 지령을 보낸게 아니에요. 당신의 선택을 따라간 것이지."


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노른은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기억해요? 도시의 사람들이 잔인하기에, 도시의 지령이 잔인해졌다고."


노른은 얀의 양쪽뺨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요?"

절망, 슬픔, 비통, 원망 그 모든걸 받아야했던 가엾은사람.
"난... 난...."


"어느 도시의 사람이 상냥했기에 지령이 그걸 따랐다고."


얀은 무너져 내리고 더 없이 울기 시작했다.
다만 절망은 없었다.












+어제가 얀 생일이였네?

근데 그걸 놓쳤네?

얀 애껴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