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는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 극후반부 스토리, 로보토미의 핵심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힌 듯하다. 사방은 검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으며, 이곳이 어디인지, 벽은 있는지, 내가 발딛고 있는 것이 바닥인지 아니면 천장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기묘한 공간에 거리감마저 망가질 것 같은 어둠이 가득 차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온다.
한없이 익숙하면서도, 한없이 낯선 누군가.
분명 눈에 익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반가우면서도 가증스럽다.
대체 누구일까.


알 수없는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겠다.
너는 누구냐?
'....뭔 소리야. 넌 누구지?'


여긴 대체 어디일까?
분명 무언가 중요한 일을, 끝마쳐야할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여기서 낭비할 시간따윈 없을 텐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점차 목을타고 올라온다. 이유를 찾을 수없는 끓어오르는 분노, 눈이 멀어 버린 냉정함. 다양한 불안감과 감정들이 망각해 버린 목적을 찾아 해매인다.
나갈 출구를 찾아 해매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시 말을 건다.


틀렸다.
질문하는 것은 나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누구냐?

'... 나는 롤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사방을 둘러봐도 나갈 곳은커녕 공간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럽다.
눈을 돌려 누군가를 바라본다.



그러나 누군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다.
나는 너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 누구인진 몰라도 이딴 농담따먹기할 시간 없어.'



틀렸다.
나는 너에게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으나 이는 중요치 않다.
그러니 대답하라.
너는 누구냐?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나는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9급 해결사인 롤랑이다.'



틀렸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무어냐고 물은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재수 없게도 미친놈을 만난것 같다. 다른 대답해본다.
'불쌍하게도 재수 없게 도서관에 들어갔다가 팔다리 잘리고 노예처럼 부려 먹히는 사람?'



틀렸다.
나는 너의 상황을 물은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음... 마지막 기억이 모호하다.
네짜흐랑 술을 진창 퍼먹고 기억이 끊겨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하며 답을 해 본다.
'... 새로 사귄 사서들과 잘 지내고 너무 적응을 잘해서 술판벌이는 망나니?'



틀렸다.
나는 너의 얄팍한 연기와 가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헤실헤실 웃던 미소를 지운다.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거지?
도서관놈들이랑 한패인가?
'뭘 알고 있는 거지?'



틀렸다.
나는 이미 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요치 않다.
질문에 답하라.
너는 누구냐.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이럴시간이 없는데.
한시바삐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서..
돌아가서....
뭘... 하려고 했더라...
무언가... 끝내지못한..

흐릿한 기억 너머를 더듬으며 알 수 없는 갈망을 찾으려 하지만 누군가는 매정하게 다시 한번 대답을 요구한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누구냐?

저 빌어먹을놈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기 전까진 포기하지 않을 모양인 것 같다.
시간 낭비는 충분하다. 참을 만큼 참았다.
롤랑은 몸을 날려 답을 찾는 누군가를 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격을 받은 누군가는 허상처럼 사라지고 어느샌가 뒤에서 다시 말을 걸어온다.
'이건 대체...?'


틀렸다.
나는 너의 무력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
'...찰스 사무소 1급 해결사였던 사람이다.'



틀렸다. 나는 너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다가. 망설이다가. 묻어둔 기억을 꺼내 대답한다.
'검은 침묵. 안젤리카의 남편 롤랑이다.'



틀렸다.
나는 너의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모든 걸 잃은자다.'




틀렸다.
나는 너의 사연에 대해 물은 것이아니다.
너는 누구냐?

......
'보라눈물과 거래하고 도서관에 숨어든자다.'



틀렸다.
나는 너의 수단과 행선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복수를 위해 숨어든자다.'



틀렸다.
나는 너의 목적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
...
...
...





의미 없는 문답은 반복되고 속절없이 시각은 흘러간다.
'대체 나한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틀렸다.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미쳐 확인해지 못했을 뿐.
너는 누구냐.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을 모두다 했다.
그러나 틀렸다고한다.

'가증스러운 기계의 비위를 맞추고. 나사하나씩 빠진 거 같은 사서들이랑 잘 지내는 척 연기하고. 시체로 쌓아 올린 산에 피로 만든 바다도 모자라서 이젠 사람들을 갈아서 책으로 만들고 있는자다!
대체 무슨대답을 원하는가? 이 고통뿐인 몸뚱어리에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가?!'

 ...
누군가는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입을 연다.

틀렸다.
너의 고통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타인의 고통따위 전혀 알 바 아니라는 듯한 태도.
롤랑은 오히려 허무해졌다.
'하...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적어도 도서관놈은 아닌 거 같구만...'


틀렸다.
너는 누구냐.


롤랑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하나둘씩 떠오르는 기억들 되짚어 간다.







연기를 해가며 도서관을 살찌웠다.
기계에게 마음이 있는지 확인했다.
기계가 인간에 가까워지는가를 확인했다.
기계는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악하고, 이기적인 도시 인간을 향해 착실히 다가가고 있다
꺼림칙할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를 닮은 도시 인간과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푸른잔향 도서관에 난입했다.
놈은 웃는가면 너머에 숨어 있던 위선자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해 버렸다.
사랑하던이의 유일한 혈육을, 사랑하던 이가 아끼던자를, 사랑하던 이를 아끼던자를, 아르갈리아를 죽였다.
바야흐로 복수의 시간이 왔다.


'나는... 죽은 건가?'
이곳은 지옥인가. 지옥의 간수장은 무의미한 논답으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



틀렸다.
나는 죽은자에게 말을 걸만큼 이상하지 않다.
질문에 답하라.
너는 누구냐?

본색을 드러내고 한때 동료였던 자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보며 망설임도 들었다. 하지만 외면했다.
긴 싸움끝에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아직은 죽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아직은 복수할 기회가 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가 묻는다.
너는 누구냐?

롤랑은 누군가에게 부탁한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의 때가 겨우 찾아왔어. 제발 날 밖으로 보내줘. 해야 할 일이 있어.'






틀렸다.
너의 복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복수를 위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바다를 만든 죄 많은 자입니다.
그러니 제발 절 보내주십시오.'



틀렸다.
나는 너의 죄를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지 못해 살아가던 자입니다. 제발 보내 주십시오.'



틀렸다.
나는 너의 고통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마침내 소망을 이루려는, 신뢰해준 자를 죽이려 하는 자입니다...'



...
틀렸다.
너의 마지막 망설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무의미한 대답을 요구하던 누군가가 허리를 숙이고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누구냐?

대답한 모든 것을 부정당했다.
아니... 모든 것이라 부르기엔 너무 하잘것 없는 것 없는 나였다.
이젠 모르겠다.
무엇이 나인지.


'저는....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대답을 했으나. 돌아올 그놈의 빌어먹을'틀렸다'가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누군가는...익숙하게 생긴 사내는 어느새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너는 모른다.

롤랑은 사내를 본다.




사내는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어간다.


너는 모른다.

자신이 우연찮게 도서관에 들어간 9급해결사인지
연기전쟁에 참여했던 1급 해결사인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통에 빠진자인지
고통을 벗 삼아 가라앉고 죽지 못해 사는 자인지
너는 모르고 있다.


너는 모른다.

자신이 복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인 죄인인지
복수를 위해 기꺼이 누군가의 장기말이 된 꼭두각시인지
복수를 위해 가면을 쓴 위장자인지
복수를 위해 또다시 피를 뿌리는 학살자인지
복수를 위해 연기를 하는 배우인지
너는 모르고 있다.


너는 누구냐?
지켜야 할 지키지 못해 죽지 못해 사는 껍데기냐?
마침내 찾아온 복수의 시간을 즐기는 복수귀냐?
아니면 한낱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위선자냐?

너는 모른다.
너는 모르고 있다.
그러니 알아야한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내려다보며 묻는다.


너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나는 누구냐?

이제야 알겠다.
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당신은 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입니다.




사내의 가면이 깨진다.

한때는 능글맞아 보이던 눈
그러나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

실없이 웃으며 미소 짓던 입
그러나 한없이 무겁게 가라앚은 입

그 눈과 입이 나에게 말한다.


그래. 너는 너다.

나는 너이며 너는 나다.

너는 나이며 나는 너다.


그리고 나는

오롯이 나다.


고통에 사로잡힌 자 또한 나이며
복수를 갈망하던 자 또한 나이고
죄책감에 망설이던 자 또한 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들이 오롯이 너가 아니다.


너는 분명 사랑하는자를 잃고 똑바로 설 수 있는 의지를 잃은자다.
너는 분명 사랑하는자를 잃고 분별수 있는 이성을 잃고 날뛴자다.
너는 분명 사랑하는자를 잃고 삶을 이어갈 용기를 잃은 패배자다.
너는 분명 사랑하는자를 잃고 더 나은 존재가 될 희망을 잃고 절망한자다.
허나 그것들 또한 오롯이 너가 아니다.



너는 사랑하는자를 잃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기대를 져 버린자다.
너는 사랑하는자를 잃고 기꺼이 믿으며 맡길 수 있는 상대를 배신한자다.
너는 사랑하는자를 잃고 너는 지켜내지 못한 겁쟁이다.
허나 그것들 역시 오롯이 너가 아니다.


너는 아직 굴래를 끊어내지 못한자다.
너는 아직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자다.
허나 그것들은 오롯이 너가 아니다.




그러니 생각해라
관념에 사로잡혀 나를 잃지마라.
감정에 붙들려 나를 잊지마라.


무표정한 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그러니 나를 마주하고.

너는 웃으며 말했다.

오롯한 나를 찾아라.


































사방이 밝아진다.
눈앞의 나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꼴사납게 져 버린 듯, 주저앉은 채였다.

"...랑씨!"

"롤랑!"

하하...
조금 전까지 죽이려고 달려든 사람을 저렇게나 걱정한다.
앤젤라... 너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죄책감과 걱정 여러 감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구나.





생각이 깊어진다.
앤젤라...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마침내 미루고 미루어 왔던 진정한 나를 마주할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