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지키지 못했다.
지켜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지키지 못했다.
그때처럼, 또 악몽이 찾아왔다.

발치엔 피투성이의 방독면이 나뒹굴었다.

[베어내, 그레고리.]
"..."
[저건 유리가 아니야, 그레고르.]
"...그래, 내 생각에도 그런 거 같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저건 유리의 머리를 뒤집어쓴 환상체라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없는 해충의 팔을 뻗은 채, 도망쳤으니까.

망설이는 내 등을 밀어주듯, 단테의 시계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베어내!]
"으아아!"

난, 공허하게 바라보는 유리의 눈을 피하며 달려갔다.
환상체의 공격을 피하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귓가에 유리의 환청이 들렸다.

'그럼 난 도대체 어쩌라는 거예요? 살아남은 게 죄예요?'
"아냐, 아냐. 그냥 살아가. 제발..!"
'제가 본 사람, 그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진 않았어요.'
"우린 죄가 없어! 우리가 원해서 이 비극 속에서 떨어진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방에서 날아드는 핏빛을 반사하며 갑각에 쌓인 팔은 기다랗게 뻗어 나가며 환상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불쑥 튀어나온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목 끝에서 멈췄다.

((정말로요?))

그것은 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기다란 목을 비틀며 다가와 날 내려다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수많은 기억이 범람한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여성과 바닥에 잘려 퍼덕이는 팔, 날 겨눈 수많은 총과 칼들, 그리고 둘러싼 수많은 무리.

그 무리 너머에서 그것, ...아니 유리는 입을 움직였다.

((우.린.죄.인.이.에.요.))
''아냐... 아냐.. 우린...!''

난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유리의 머리를 베었다.

-으..아...
"안돼...!"

천천히, 그녀의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료 수감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끝의 끝에서, 결실을 목전에 두고 멈추다니."
"구보... 나의 벗, 이것이 그대가 선택한 길이오?"

하지만 난 멍청하게 바닥을 뒹구는 유리의 머리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유리의 머리는 입을 벌리더니 힘겹게 무엇인가를 뱉었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황금색의 나뭇가지였다.

"유리... 유리..."
[그레고리!]
"피하시오!"

이윽고 누군가의 희미한 비명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난 생각했다.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고.

*
*
*

-쿠득, 뿌득, 콰드득.

단테의 시계가 돌아간다.
난 점차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서서히 눈을 떴다.

"이곳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유리에게 방독면을 주고, 죽고서 되살아난 곳이었다.

"도망쳐 온건가? 황금 가지는?''

난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가 다시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황금가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차라리 내가 먼저 달려갔다면, 하다못해 망설이지 않았다면, 정신을 놓지 않고 함께 싸웠다면...

''...후회하면 뭐해.''

씁쓸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다 끝났다.
버스로 돌아가면 베길수, 그 양반이 난리를 칠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단테가 다가왔다.

[일어났어?]
"그... 미안해, 관리자 양반... 내가 해결할 문제였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니? 그야, 유리..."
"저요?"

그녀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뒤에서 더 이상 못 들어야 했을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유리가 방독면을 손에 든 채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저 그레고리 씨 말처럼 살아갈 거예요. 그리고..."

유리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볼을 붉힌 채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살짝 발꿈치를 들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레고리 씨..."
"어... 그래..."

난 손을 흔들며 다른 수감자를 도와주러 떠나는 그녀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법인데, 그레고리.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그 모습에 관리자 양반은 째각거리며 날 놀렸다.
평상시라면 머쓱하게 웃으며 받아줬겠지만, 미안하게도 내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난 머리를 쥐어짜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유리가 있어? 꿈인 거야? 이게 꿈이라고?"
[유리? 그야, 유리가 너희 시체를 들고 와줬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유리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능력에 문제 생긴 건가?' 라며 날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단테, 문제가 생겼나요?"
[너희는 이상한 점 없지?]
"왜? 그레고르, 어디 아파?"

그러자 로슈가 다가와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죽.다.살.정." (죽었다 다시 살면 정상이다.)
"꺄아악! 그레고리 씨!!"
[로슈!]

단테가 로슈를 막기도 전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날 베었고,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 깨달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

이것저것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저번 삶처럼 우린 환상체를 베어가며 문제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단테는 뭔가를 느낀 듯 걸음을 멈췄다.

[파우스트. 이게...]

파우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네, 이 너머에 황금가지가 뿌리내린 환상체가 있을 거에요."
"좋았어! 후딱 해치우고 돌아가서 베길수 콧대를 콱 눌러주자고!!"
"정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시끄럽네요."
"뭐야?!"
"왜요? 또 싸우게요?"
[얘들아?! 여기서 죽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알지?!]

나는 히스클리프와 이스마엘이 싸우느라 시끌시끌한 틈을 타 유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유리."
"그레고르 씨?"
"그... 꼭 너가 찾아야 할 필요는 없어."
"네?"

나 자신도 이런 말을 하기에는 뜬금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꼭 이렇게 말하지 않고 달려가는 유리를 잡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냥 다 같이 돌아가는 거야. 누구 잘했고 못 했고 상관없이."
"그... 네..."

유리는 잠시 멍하니 날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쳤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 사이로 유리의 머리색만큼이나 빨개진 귀가 보였다.

"근데 그레고리 씨..."
"응?"
"다, 다들 보고 있어요..."

유리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히스클리프와 이스마엘의 싸움이 끝난 채,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로쟈는 입을 가리고 '어머, 어머' 소리쳤고, 파우스트는 왠지 모르지만 이상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아프오, 할 말이 있다면 하시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히스랑 이스는 언제 싸웠냐는 듯, 똑같이 똥 씹은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 뫼르소조차 흥미로운 듯해 보였으니 말을 다 한 정도였다.

"오오오오! 이게 적진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사랑이구려!!"
"푸훗!"
[그레고르...]
"...미안한데, 관리자 양반. 그냥 가주면 안 될까?"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돈키호테 특유의 호들갑은 유리를 웃게 했고 우린 다시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그럼, 가자!]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유리가 내 소매 잡아당겼다.
그녀는 잠시 숨을 깊게 들어 마시고 나를 올려다봤다.

아직까지도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동자는 확실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요, 그레고르 씨."
"그래."
"그럼... 버스로 돌아가면, 카론한테 지도 보는 법을 알려줘도 될까요?"
"그래, 이번에는 그러자."
"하핫, 네..."

유리는 바닥에 털썩 쪼그려 앉아, 무작정 달려 나가는 히스클리프와 돈키호테를 막는 단테를 보며 아련하게 웃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거네요."

*
*
*

황금 사과의 발악에도 과육은 잘려 나갔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이미 패턴을 알고 있으니 더 쉽게 느껴졌다.

"그레고르 씨!"
"알고 있어!"

몸을 살짝 비틀자, 주먹 하나 차이로 촉수가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촤아악!

베어진 촉수는 진득한 체액을 뿜으며 다시 황금 사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사과의 몸통이는 다른 수감자들의 공격에 처참히 부서져 있었다.

"끝난 건가요?
"그런 것 같은데?"

홍루의 질문에 답하듯, 날뛰던 과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잠잠해졌다.
부서진 틈 사이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저게.. 황금 가지군요?"

싱클레어의 혼잣말에 모두가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누군가 내 옆을 지나 뛰쳐나갔다.

"제가 가서 확인해볼게요!"

유리였다.
유리는 무언가 홀린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리?!"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녀는 떠난 후였다.
난 재빨리 뒤쫓아 달렸다.

''안돼!!''

급한 마음과는 반대로 바닥에 뿌려진 미끈거리는 체액에 자꾸만 균형이 흐트러졌다.

'젠장!'

차라리 잡고 있어야 했을까? 아니면 애초에 사실대로 말해야 했을까? 어쩌면 또다시 실패하는게 아닐까?

자꾸만 날 바라보던 지난 삶의 유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만 멈춰 봐!!''

-꾸드득.

하지만, 유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잠잠했던 과실의 균열은 금방이라도 덮칠 듯이 들썩였다.

"제발! 앞을 봐!"

과육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새로운 몸통을 만들어냈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환상체의 머리통이 유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환상체의 입이 벌어지고,

"ㅇ..ㅠ...ㄹ....ㅣ.....!"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구역질 나는 산성 침이 환상체의 이빨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유리는 녹아 내리겠지.'

이미 한번 겪었다.
또 한번 겪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기회가 생긴 게 이상한거지.
그래, 사실 이 모든 게 또 다른 악몽일지도 몰랐다.

근데 이 악몽을 준 신 양반이 한가지 잊은 게 있었다.

'난 벌레였다.'

-뿌드득...

등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숨겨왔던, 감추고 싶었던 다른 부위가 서서히 올라왔다.

-브스스스!

투명한 날개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난 밟히고 짓뭉개져도 발버둥 치는 게 종특인 벌레였다.'

몸이 바닥과 수평이 될 때까지 기울어졌다.

-팡!

파공성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한 걸음을 내딜 때마다 날개가 떨리며 가속을 더 해준다.

"유리이이!!"
"...그레고르 씨? 어라, 제가 왜 여기에... 어?"

-쿠득!

다시 한번, 피에 젖은 방독면이 바닥을 뒹굴었다.

*
*
*

"으으윽..."

어깨에서 끔찍한 통증이 몰려왔다.
묻어 있는 침에 살이 서서히 녹아내리는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엔, 늦지 않았다.

-키에에엑!!

품 안에 유리는 정신을 잃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

환상체는 내 살점으로는 만족을 못 했는지 발광을 해대며 날뛰었다.

[뫼르소!]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날아온 뫼르소의 사슬이 황금 사과의 팔다리를 옥죄었고, 뒤이어 수감자들은 환상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멋진 전략이야! 관리자 양반!!"

그틈에 난 뒤로 빠져 살며시 유리를 눕혔다.

"으음..."
"음, 일어났어?"

나름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부족했는지, 유리는 바닥에 닿기 무섭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어깨로 향했다.

"피, 피?!"

아직 재생이 덜 끝난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유리는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피가 솟는 부분을 압박했다.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예요?!"
"음, 유리."
"왜요!"
"난 되살아나니까 그렇게 호들갑 안 떨어도 되는데?"
"그래도 아프잖아요...!"

추가로 재생도 가능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물기에 찬 유리의 목소리에 난 얌전히 지혈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환상체와의 싸움도 크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킁...''

유리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혈하는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유리는 순간 놀란 듯 몸을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꾹 눌러요..."
"응."
"...그리고 고마워요..."
"아니야..."

그렇게 침묵 속에서 지혈한 끝에 더 이상 피가 안 흐를 때쯤, 겨우겨우 공격을 버티던 환상체도 끝을 맞이했다.

-끄으에...엑....

유리 대신 환상체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힘겹게 황금 가지를 내뱉었다.

수감자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유리는 영차하고 일어나 나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도 갈까요?''

*

우리가 다가가자, 마스코트가 꺼내야 한다는 로쟈의 알 수 없는 강력한 주장에 유리가 황금가지에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유리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황금 가지를 들어 올리자,

''와아...''
''아름답소...''

어두운 핏빛으로 가득했던 방안이 점차 환해졌다.

''그레고르 씨! 이거 봐요!''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난 하나의 악몽이 끝났음을 확신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
''헤헤...''

물론 이 악몽에서 일어나도, 난 아직도 악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서 희미하게 흔들리지만, 빛나는 붉은 빛을 보면,

''그레고르 씨.''
''응...?''

깨어나기를 포기했던 악몽들에서 일어나,

''어서 함께 돌아가요. 카론한테 지도 보는 법 알려줘야죠.''

언젠가 그녀와 함께 붉은 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