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는 어쩌면 X일지도 모른다.


X는 A의 관점으로서 A를 50일차로 이끌었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말은 완전하게 차단된 거마냥 X가 즉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것 밖에 없었다.


단테는 한정된 이들에게만 말할 수 있으며 게임 내에서 나오는 선택지는 단테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지만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A는 모든 이들의 희극을 위하여 많은 것을 희생하였고 X가 되어 스스로조차도 희생하였다.


단테는 성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도시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X의 조력자는 감은 눈을 한 로보토미 사 내를 완전히 통제하는 기계이다.


단테의 조력자는 감은 눈을 한 도시에서 붉은색을 부여 받은 위험한 존재로 인정받는 특색이다.


A에게 깃든 X는 A이지만 A가 아니므로 점차 X와 A는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며 50일차 A는 X를 따로 인식하며 X와 대화를 한다.


그러나 A와 X는 마지막까지도 서로 하나되어 같이 움직이며 50일차를 끝냈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X를 단테 자체에게서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단테가 X의 존재를 느낄 지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앤젤라와 롤랑은 엔딩에 도달하면서까지도 50일차 A와는 다르게 X를 향한 발언을 하지 않는데. 


세피라 층 보스전들로 인하여 자아가 흔들리고 재정립 되면서 X가 그들의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이 트인 거라고 추측 한다. 


그러한 추측의 이유는 앤젤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때와 롤랑이 복수를 할 수 있을 때에 이유를 알 수 없게 뜬금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앤젤라와 롤랑의 목표는 복수라는 명확한 끝이 없는 과정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유다.


서로가 삶의 이유나 다름 없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함으로서 


그 목표를 버리는 행위는 도시에서는 있을 수가 없으며 도시와 머리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한 상황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상황이다.


도시와 머리에 관한 건 나중에 설명하고 우선은 앤젤라와 롤랑의 선택에 대하여 말하겠다. 


당연하게도 진엔딩을 보기위한 조건을 충족되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그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진엔딩만을 고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 진엔딩과 배드엔딩 사이에서 원하는 결과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면 어째서 롤랑과 앤젤라의 배드엔딩은 보스전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보스전을 모두 끝내야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가? 인데. 


어쩌면 엔딩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피라들이 폭력으로 대화와 조언을 해줬다고 


롤랑과 앤젤라가 대가리로 이해해서 깨달은 것이 아닌 그 조언들을 빌미로 무언가가 개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X가 A로서 A가 된 것처럼 현재로서는 태고의 샘에서 비롯된 존재로 추정되는 X로 지칭되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원하는 선택을 롤랑과 앤젤라에게 투여해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앤젤라와 롤랑은 스스로는 진엔딩에 도달할 수 없으며 앤젤라와 롤랑 이외의 다른 존재들의 영향과 


무언가가 직접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야만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끝내 태고의 샘에서 제공해주는 올바른 선택을 택하게 해주는 존재는 X이며 X는 플레이어에게 지정된 역할이다.


그러한 선택을 내려주는 존재는 X이며 X가 선택한 결정을 앤젤라와 롤랑에게 투여시켜 원하는 결말로 이끌 수 있듯이 


X라는 것 자체는 태고의 샘에서 비롯된 존재이며 태고의 샘이자 태고의 샘이 아니며 


플레이어의 역할이자 게임 내의 세계관 내에서 그 인물이 아닌 존재이면서 


그 인물의 선택해야할 길을 선택해줄 수 있는 인물의 변화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이자 본래의 의도를 의미한다. 


또한 태고의 샘에서 코기토가 나온다면 또한 X는 태고의 샘에서 비롯된 존재이며 


특정한 존재들의 자아 중에 있는 X는 그 특정한 존재들에게는 자신이나 타인에 의하여 변화하지 않는 자신인 온전한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온전한 자신을 부정하고 변화된 자신을 부정하면 혹은 변화된 자신을 부정하고 온전한 자신을 부정하면 환상체화가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 이유는 X는 외부의 영향에 가치가 변화없는 온전한 상태의 자신을 즉 온전한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X가 아닌 이름이 있는 자아는 변화되고 변화하는 상태의 자신으로서 외부로 인하여 자신의 가치가 흔들리고 변화되는 변화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태화된 에고는 타인이나 변화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의 역할이나 이름에 따라서 그 변화된 자신의 자아가 물질로서 형태화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과 가치에 대하여 이해해야 하기에 좀 있다가 설명한다.


그러하기에 A는 이미 외부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상태인 A로서 빛의 씨 발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온전한 자신인 X의 상태로서 기억을 다시 얻고 스스로를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지 말 것은 본능적으로란 말은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말이 아니다.


즉 A가 카르멘이나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않은 온전한 자신인 X로서 A는 빛의 씨 발아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A가 카르멘의 원하는 대로 행했다면 A는 온전한 자신이 원하는 빛의 씨 발아가 아닌 


변화된 자신으로서 외부요인에서 얻은 가치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결말은 49일차 A의 결말이다.


그 이유는 카르멘이 아무리 A에게 올바른 길로 가라고 하였을지라도 카르멘은 A가 아니기에 A에게 있어서는 A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외부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0일차의 A는 X로 인하여 완전한 A가 되어 카르멘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았다.


A는 오히려 온전한 자신이 빛의 씨 발아를 하기를 원했고 원하는대로 빛의 씨 발아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카르멘이 말한 어떻게 인간이 정말로 다른 이들을 위할 수 있겠냐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A가 산화되지 않고 카르멘만 산화시키고 카르멘에게 주도권을 주어 즉 모두에게 C를 뿌려서 결실인 환상체화를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일차의 A는 카르멘과 함께 산화되었고 카르멘을 막아서기에 카르멘이 그 누구도 정말로 다른 이들을 위하지 않는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요인에 근거한 가치는 반드시 모순을 일으키고 그 모순을 잠재우기 위해서 자기자신은 타인에 대하여 스스로가 타협을 하게 된다.


그러한 외부요인은 A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였고 그것에 대한 타협의 결과는 카르멘의 영향으로 변한 49일차의 A의 모습과 엔딩 C이다.


그러므로 X였던 A는 인간의 가치는 회복될 수 있으며 원래는 온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카르멘은 그러나 인간은 불안정하고 변화된 자신과 온전한 타인을 의미한다.


알다시피 양심 또한 본능에 가깝고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들은 대게 양심에 찔리듯이 본능과 욕망은 비슷한 것 같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서로 다르다.


욕망은 외부로 인함이자 외부에 대한 대책이라면 본능은 본래에 내재된 변화하지 않는 순수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A는 본능적으로 본래의 온전한 자신으로서 본래의 인간의 정신과 생각으로 모든 도시인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그와 반대로 카르멘은 외부로 인하여 변질된 변화된 자신으로 전락해버린 카르멘으로서 외부요인들에 대한 이유들로 인간의 정신을 욕망에 묶이게 하여 모두를 모순적인 존재들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A와 C는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으며 서로의 대립은 본능과 욕망의 대립이다 또 다른 말로는 자신과 타인의 싸움이다.


여기서 문제는 욕망은 과정이 곧 완전한 목적이 되게하여 과정을 반복하게 하는데. 


욕망은 그 근원이 모순적이거나 모순적이게 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환상체화 된 점순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점순이는 본래의 자신을 즉 온전한 자신을 부정하고 타인과 변화된 자신이 보기에 완벽한 모습을 택했다.


그러므로 타인이 보았을 때에도 가치와 욕망으로 점철된 죄종이 된 타인과 변화된 자신만이 남은 점순이는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칭하였다.


점순이의 완벽함은 타인이 보았을 때에 완벽함으로 본 것이며 그것조차도 점순이 자신이 보았을 때에 타인이 자신을 보면 완벽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순이는 베르길이라는 타인에 의하여 부정 당하였고 부정당한 때에는 이미 점순이는 온전한 자신을 부정한 상태이고 


그러한 상태의 점순이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인 베르길을 넘어서거나 혹은 점순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변화된 자신을 부정할 수 밖에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자기자신을 부정한 점순이는 속 알맹이는 사라지고 그저 타인의 가치와 타인의 의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껍데기만 남은 모순적인 환상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점순이가 완전한 타인인 환상체로 변하게 만든 온전한 타인이 누구냐는 것인데.


그것은 카르멘일 것이고 카르멘은 현재로서는 환상체화나 뒤틀림으로 변하게 만드는 온전한 타인이다.


그러하기에 점순이는 결국에는 욕망을 상징하는 카르멘에게 자아가 뜯긴 것이다.


이런 점순이 말고 타인이 보기에 완전하려했던 환상체가 있는데. 


그것은 환상체 중에 타인이 되고자 한 환상체인 아무것도 없는이다. 


타인 되고자하는 욕망 즉 온전한 자신과 변화된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여 즉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타인이 보기에도 완전한 존재인 완벽하게 타인이 되고자 했던 결과물이자 끊임없는 현재 진행 중인 시도 그 자체이다. 


즉 어떤 타인이 보았을 때에도 완전한 어떤 타인이 되려고 반복된 시도의 결과물이자 여전히 그렇게 되고자 한다.


그러나 타인은 자신이 될 수 없고 자신은 타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는의 타인이 되고자한 시도와 집착은 


결단코 그 목적에 도달할 수도 이뤄질 수 없는 모순적인 행동 밖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에 어떤 타인이 진짜로 될지라도 아무것도 없는은 그 동일한 타인의 가치에 의해서 아무것도 없는의 가치가 정해지나


그 타인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을 그 타인의 가짜이기에 결단코 아무것도 없는은 완벽하게 타인이 될 수 없다.


또한 타인이 실제로 되지도 못하기에 아무것도 없는은 그 시도를 통하여 그저 아무것도 없는의 자기자신을 상실하였고 


끝내에 타인에게조차 타인이라는 완전하게 모순적인 껍데기이자 완전한 타인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완전한 타인이 되어버린 아무것도 없는은 타인에게서 받는 가치를 붙들어줄 자아도 없기에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에게 남는 것은 반복적인 과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기자신과 가치는 없고 오로지 타인이 되고자하는 과정만이 남는데. 


그 과정만이 남고 과정이 목적이 된 것이 곧 환상체화로 보인다.


그 이유는 환상체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으며 다만 같은 과정을 반복할 뿐이며 과정만을 추구하는 것은 욕망적이다.


그러한 결과로 전락하였을 때는 결단코 그나마 가치를 얻고 보관할 수 있는 모습인 변화된 자신조차도 상실되었고 


다시는 가치를 담아낼 수 없는 그릇이 되어 아직 가치를 담아내거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질투이자 갈망만이 남았고 


이 질투는 타인의 시선과 타인에 목적을 두었기에 자아라는 그릇이 깨져버리게 하며 자기자신에 대한 비정상적인 분노를 남긴다.


즉 아무것도 없는은 타인에 대한 가치를 넘어선 타인이 되고자 한 질투로 인하여 망한 것의 상징이며 또한 질투는 분노가 아무것도 없는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질투와 분노는 배드엔딩의 앤젤라와 롤랑에게서도 비슷한 형태로 찾아볼 수 있는데.


앤젤라는 배드엔딩에서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카르멘 즉 타인이 정해준 가치를 즉 욕망을 따라서 


앤젤라의 유일한 자신의 친구이자 어쩌면 앤젤라로 인하여 인생이 망한 피해자인 롤랑을 죽였다.


그 이후에는 도시를 최대한 잠식하며 부수기만 할 뿐 자기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인을 향한 질투를 가지고 


복수라는 형태로 분노를 표출하며 앤젤라는 타인으로 인하여 에고를 즉 인격을 만든다. 


앤젤라가 만들어낸 에고 즉 앤젤라의 변화된 자신이 만들어낸 인격은 창백한 사서이며 


앤젤라는 창백한 사서라는 에고이자 인격을 껍데기로 삼아서 타인에게 복수라는 명목으로 분노를 표출하여 타인의 시선을 통하여 창백한 사서라는 가치만을 얻으려 할 뿐이야.


그러나 앤젤라는 스스로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질투와 복수가 끝에 이르자 앤젤라는 다시 한번 분노로 인하여 미쳐버리고 


앤젤라의 복수 대상은 타인 아닌 그저 스스로를 창백한 사서로 만든 변화된 자신임을 깨닫고 스스로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드리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이지.


또한 롤랑은 배드엔딩에서는 롤랑 스스로에게 가치를 둔 것이 아닌 타인인 앤젤리카에게서 가치를 얻었기에 


롤랑의 가치를 매겨줄 앤젤리카가 죽은 것에 대한 분노에 미쳐 광란을 일으켰고 


그 분노는 롤랑에게는 죄 없는 자들이 가진 희망을 향한 질투가 되었고 끝내 인간도 기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죽였어.


동시에 롤랑의 삶에 가장 깊이 연관된 모든 자들을 되살릴 기회를 스스로 베었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고통이며 그 고통을 잊고자 롤랑은 미쳐버렸지.


그 결과로는 롤랑은 아무것도 없는 이가 되어 아무것도 없는 이라는 껍데기만을 의지한채로 자질구레한 의뢰만 도맡으며 정체없이 떠돌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남는데.


롤랑이 배드엔딩 후에 죽은 이유를 예상해보자면 롤랑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앤젤리카를 상실한 것에 대한 분노야.


그리고 앤젤리카를 상실한 것에 대한 분노 해소할 방법은 처음부터 앤젤라에게 복수하는 것이었어.


근데 앤젤라는 오히려 스스로에게서 가치를 즉 앤젤라 자신을 찾아내어 롤랑을 용서하고 이해해주며 또한 도서관에서 죽은 이들을 용서하며 되살리려 하는데.


평생을 타인에게서 의미와 가치를 찾던 롤랑은 롤랑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고 앤젤라에 대한 질투가 생겨버려.


롤랑은 이미 롤랑의 모든 것이였던 앤젤리카가 죽어버려 더 이상 의미와 가치가 없는데. 


오히려 앤젤라는 앤젤라 자신에게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어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앤젤라가 드디어 원하는 선택을 하려는 것과 롤랑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오히려 롤랑에게서 질투가 피어나게한 것이지.


이 질투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가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에게 있는 그 무언가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야.


즉 롤랑의 질투는 자기자신의 가치를 얻게된 앤젤라를 향한 롤랑의 질투지.


쉽게 말하자면 앤젤라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과 타인이 제공한 가치에 묶이지 않고 앤젤라 스스로의 가치를 앤젤라로 만든 것이지.


그리고 롤랑의 질투의 목적은 그저 앤젤라에게서 그 가치를 빼앗아 가고자 함이 아닌 말 그대로 앤젤라 스스로가 앤젤라의 가치가 되었기에 앤젤라의 가치 그 자체가 되어버린 앤젤라를 없애고자 함이야.


그 질투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앤젤라의 죽음이고 그 앤젤라의 죽음 이후에는 롤랑은 이미 죽어서 없는 앤젤리카에게 드디어 끝났다는 독백과 함께 미치지.


롤랑에게서 피어난 앤젤라를 향한 질투는 앤젤라를 죽임으로서 해소 되었어.


그러나 앤젤리카를 상실한 것에 대한 분노는 이미 앤젤라가 롤랑을 용서하고 갈 곳을 잃어버리고 또한 앤젤라가 다른 이들을 되살리고자 하였을 때부터 앤젤리카의 죽음은 더 이상 앤젤라의 잘못이 아닌 롤랑의 잘못이 되었지.


그 이유는 앤젤라가 빛의 씨 발아가 일어난 후에 뒤틀림이 생겨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표현한 것과 롤랑이 앤젤리카를 혼자 놔두고 갔을 때부터 롤랑은 이미 스스로의 잘못이 있고 스스로에게서 죄책감을 느꼈을 거라는 거야.


그러한 상황에서 앤젤라는 모두를 용서하고 다시 살려낼 것이기에 더 이상 롤랑의 복수의 대상도 아니게 되었고


롤랑은 그렇다고 앤젤라가 살려내는 것을 바라만 보면 롤랑이 한 모든 행동들은 모두 무의미하게 되지.


즉 롤랑은 앤젤라를 죽여도 살려놔도 앤젤라가 그저 빛과 함께 산화될 것을 지켜만 보면 결국에 롤랑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져버려.


그 상황에서는 롤랑이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앤젤라를 죽여서 롤랑이 행한 모든 행동들을 매듭짓는 것이지.


그와 반대의 선택은 롤랑이 직접 선택을 내려서 앤젤라가 빛에 의하여 다 산화되지 않게하고 빼내는 것이지만


배드엔딩에서는 수 많은 무고할지도 모를 이들을 확인사살한 롤랑은 스스로를 앤젤리카를 죽인 피아니스트와 겹쳐 보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롤랑의 죄책감과 고통만이 늘어나게 되었을 거라는 거야.


또한 롤랑은 앤젤리카로부터 스스로 자책하지 말라는 말을 생전 평소에 들었으나 롤랑은 롤랑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러한 롤랑은 앤젤라로부터 앤젤라 생전에 용서를 받았으나 롤랑은 롤랑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러하기에 롤랑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타인으로부터 복수라는 명목으로 더 많은 타인들을 죽였겠지.


롤랑의 복수는 그저 롤랑이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몸부림이야. 


그러나 다른 이들의 용서는 그저 롤랑의 타인에 의한 껍데기일 뿐이지.


그러니 롤랑이 진정으로 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닌 롤랑 자신이 롤랑을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만 하는 과정의 굴레를 끊어내야만 하는데.


배드엔딩에서의 롤랑은 복수를 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그러니까 롤랑의 복수의 대상이였던 앤젤라를 죽여서 어거지로 복수를 끝냈다고 하나 오히려 분노와 죄책감은 더욱 더 롤랑을 옥죄어 버리지. 


롤랑은 아무것도 없는처럼 껍데기만 남아버리게 되어버린 거야.


그러니 복수 이후에도 타인을 향한 질투를 품고 타인을 해치다가 보복당하는 거 뿐이지.


이 경우에는 롤랑의 에고 즉 인격은 용서받지 않는으로 된 거야.


아무것도 없는 보면 아직 가치를 품어서 자신이라는 의미라도 있는 타인에 대한 질투와 더 이상 자신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분노로 타인을 해치다가 끝내 모두의 적이 되어 무력활 될 뿐이지.


또한 배드엔딩의 앤젤라와 롤랑을 그들의 에고는 물건이 아닌 인격 그 자체가 되었으므로 


빛의 씨 발아의 목적은 에고라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하여 변질된 존재의 인격을 본래 인간으로서의 인격으로 되찾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렇다면 빛의 씨 발아의 목적이 도시의 가치와 정 반대의 목적을 가지게 되는 건데.


도시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고 질투와 분노와 복수는 그저 욕망의 연속을 위한 여러부품들에 불과하지.


그러나 질투야 말로 도시를 가장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며 도시는 항시 질투하는 상태야.


그러한 질투하는 상태의 도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아닌 만인이 타인으로 인하여 가치를 얻고자하는 투쟁 혹은 갈망 상태이지.


만인이 신뢰를 쌓거나 의미 없이 서로를 죽이거나 타인의 생명을 강탈함으로서 가치를 얻는 것이 아닌 


오롯이 타인으로 인한 가치와 타인을 향한 가치로 타인의 시선으로 매겨진 가치를 얻는 것이 곧 도시에서의 삶의 이유인데.


즉 도시의 돈은 타인의 시선이자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치인 시선이자 눈을 뜻하는 안으로 보여.


시선은 곧 가치이며 그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들의 시선이 그 가치있다 여겨지는 것에 향하는 것이지.


쉽게 말하자면 도시에서는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삶의 이유는 철저하게 타인에 근거한 상태야.


예를 들어서 B씨가 있어. 


B씨는 고아원을 하고 있고 그 고아원의 본래 목적은 알 수 없어.


그러나 고아원 일을 하다보니 고아원 아이들에게 베푸는 선행과 그 선행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오는 타인들의 인식에 의한 스스로의 가치에 만족하며 웃으며 고아원에 가고 있었지.


고아원은 곧 B씨의 거대한 가치 주머니이며 아이들의 이름은 제각각 가치있는 보석들이야.


그런데 갑자기 I씨가 도시 안에서 훈련하던 쌍머리 투견이 고아원에 침투해서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물고 뜯고 있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신경 긁는 말과 아이들을 죽이려 하지.


그러자 B씨는 성급하게 자신의 고아원의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B씨는 과연 고아원의 아이들을 그저 아이들로서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기 위하여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B씨의 가치를 매겨주는 매개체들로서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는 것일까?


베르길의 가치를 정해주며 다른 이들에게 베르길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보석들 즉 베르길에게 있어서는 고아원은 타인이 베르길의 가치를 인정할만한 근거가 되는 보석함이자 베르길의 욕망이야.


그리고 이전 붉은색 특색도 고아들에 신경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전 붉은색 특색인 붉은 안개를 의식하고 이런식으로 해야 붉은색 특색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행위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베르길이 수 많은 가능성을 보고도 미치거나 뒤틀리거나 죄종이 되지 않고 온전한 베르길의 모습으로 나온 것을 보면은 


베르길 본래의 가치를 고아원의 아이들 사건 중에 얻은 것일지도 몰라.


베르길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지.


그러나 고아원장 베르길 외에도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에서도 나오는 푸른잔향악단들 조차도 자신에 의하여 얻는 의미와 가치가 아닌 타인을 의존하는 가치들에 목적을 뒀었고 


그들의 깨달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신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타인이 중심이 되어 타인이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끄는 반쪽자리 깨달음이야.


그 결과는 본래의 온전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고 변화된 자신을 타인에게 의존함으로서 자아를 겨우 붙들어 타인이 주는 가치에만 의존하는 뒤틀림들로 전락하였을 뿐인데.


그럼에도 그들과는 다르게 베르길은 뒤틀리지도 죄종이 되지도 않았기에 에고를 얻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눈에 보이는 물건을 얻는 대신에 어떤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이지.


어쩌면은 베르길은 형태화된 에고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본래의 자신을 즉 진짜 머리도 베어버릴 힘을 찾아낸 것일지도 몰라. 


즉 상황이나 타인에 근거하여 형태화되는 에고가 아닌 자기자신인 에고 즉 베르길로서의 본래의 인격을 A가 X가 되어 A가 된 것처럼 스스로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그러하기에 베르길이 완전한 자기자신을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닌 베르길 자신에게서 직접 스스로 찾아내었기에 점순이의 가능성 함정에도 안 빠지고 


오히려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는 점순이를 역으로 한계까지 몰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그러한 베르길과 다르게 점순이는 철저하게 욕망을 예술로 보는 도시인이였고 타인을 의존하여 버티는 변화된 자신까지 버리고 자아를 상실했지. 


도시로 인한 욕망은 끝이 없고 도시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끝이 없다는 것은 환상체와 같아서 모순적이게 되는데.


도시인들은 날개의 깃털에 도달하고 싶어하며 날개의 깃털에 도달한 자들은 날개가 되고 싶어하며 날개가 된 자들은 머리가 되고 싶어해.


또한 도시의 쥐들은 조직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며 조직의 일부가 된 자들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하며 조직의 머리가 된 자들은 조직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넘어 도시의 별이 되고 싶어하지.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자리에 도달할지라도 타인들이 그렇게 여겨주지 않는다면 타인으로부터 부정당한다면 


샤덴이 된 점순이처럼 아무런 가치를 얻으려고 하나 가치를 얻지 않고 가치를 얻으려는 과정만을 반복하는 껍데기 남는 거야.


그리고 가치를 위하여 과정만을 반복하지만 가치를 보관할 자기자신이라는 그릇이 깨어진 껍데기 즉 환상체만 남는 거지.


그러하기에 머리에 도달한 자들은 닫혀서는 안되는 문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로부터 끊임없는 시선을 받아 도시의 머리로서 도시의 가치가 영원하기를 원하겠지.


그러나 여기서 환상체인 아무것도 없는을 보면 그 환상체는 이미 온전한 자신도 변화된 자신도 상실된 자기자신이 완전히 상실 되었고


가치를 보관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가치를 얻고자하는 과정만을 반복해.


문제는 그 가치를 얻고자하는 과정은 타인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고 타인을 죽임으로서 그 껍데기를 강탈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은 제 아무리 남의 껍데기를 뒤집어 써도 이미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껍데기이기에 타인 조차도 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이라는 가치가 남은 것들에 대한 질투는 존재의 허무가 되어 분노를 일으키고 아무것도 없는으로 하여금 눈 앞에 보이는 타인들을 모조리 박살내게 한다.


환상체 즉 껍데기만 남은 상태는 자아에서의 자신을 소실하고 자아에서의 타인까지 소실된 상태이며 


완전히 그 자기자신과는 별개인 그들 즉 완전한 타인인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서 끊임없는 자기자신이 아닌 행동과 이미 자아라는 그릇에 깨져서 채워지지 않을지라도 가치를 갈망하는 형벌에 갇힌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한 형벌은 아무것도 없는이 그렇하듯이 도시에서는 자신이라는 가치에 의미를 두지 않고 타인에 의한 가치만을 갈망하게 하며 


끊임없이 도시인들이 희생당하게 하며 도시인들을 타인에 의한 가치로 살아 숨 쉬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라는 가치는 상실되게 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자기자신이라는 즉 자아라는 자신에 의한 가치가 완전히 상실되면 


도시에서의 모든 개인의 모든 가치는 모순적인 상태가 되며 환상체들이 모순적이듯이 환상체화가 될 것이며 


환상체화 된 도시인들로 인하여 도시 자체가 환상체화 되어 도시는 영원하지만 얻을 수 없는 가치만을 영원히 추구하는 모순적인 도시 즉 지옥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는 오롯이 타인의 가치를 자신이 덮어쓰거나 타인으로 인하여 가치를 얻는 것만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타인으로 인한 가치 소실은 곧 도시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가치 손실을 표현한 환상체는 증오의 여왕이며 증오의 여왕을 보면 평화에 대한 질투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는데.


증오의 여왕은 희생양들이 비극에 빠져야만 그 희생양들을 도움으로서 도움을 받은 타인으로부터 증오의 여왕이 되기 전의 마법소녀로서의 존재의 가치를 얻지.


그러나 평화로워짐으로서 더 이상의 비극이 없게 되자 타인을 보호함으로서 갖게되는 타인에 의한 상실되어감으로서 끝내에 모든 이들을 직접 타인을 비극으로 몰아넣음으로서 갖게되는 증오의 여왕으로서의 가치 갈망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모든 도시인들을 제한하며 안 따르면 막강한 힘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머리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


머리는 어쩌면 처음에는 인간들의 평화나 혹은 인간들 외의 존재들의 평화까지도 지키겠다는 목적과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막강한 힘으로 평화롭게 통치하였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평화는 점차 도시와 도시인들과 머리의 존재 가치의 의미를 잃게 하였을 것이고 평화에 안주하던 도시인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와 도시에서의 행동들은 모두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야.


이 때에 머리는 도시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하고자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별에 별 법과 제한을 걸고 내세운 법과 제한을 어기는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쳐냄으로서 


도시인들을 모두 타인으로부터 가치를 얻게함으로서 도시에서의 삶은 가치가 있게 된 걸지도 모르지.


그 이유는 애초에 머리는 도시에 있는 모든 것들과 일어나는 일들을 도시의 아름다운 꿈으로 밖에 보지 않고 그 아름다운 꿈이 깨어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어쩌면 머리에게 있어서 타인에 의한 가치 즉 욕망은 닫혀서는 절대적으로 안되는 시선이자 문이며 그러한 문이 닫히는 것은 도시의 평화이고 


머리와 도시인들에게 있어서 도시의 평화는 곧 타인에 의한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며 또한 도시에 속한 모든 것들의 가치 상실이지.


타인으로 인하여 욕망이 생겨야 하며 그 욕망을 채우는 타인의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을 쫓으니까.


그 욕망을 쫓는 것이 곧 욕망을 쫓는 존재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는거지. 


그러한 상태는 곧 삶의 이유이고 완전한 삶의 이유는 곧 완전한 상태의 욕망이며 그러한 완전한 욕망에 도달하기 바라는 욕망은 어쩌면 머리가 말하는 닫혀서는 안되는 문인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방식은 온전하고 근본적인 온전한 자신을 점차 부정하는 행위이며 끝내 외부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만 남게 되겠지.


또한 도시에 변화된 자신만이 남은 도시인들의 수가 많아지며 점차 도시의 가치는 모순적이게 변할 것인데.


도시의 가치의 근원들인 도시인들의 가치들이 점차 모순적이게 되어버림으로서 도시의 가치 또한 완전히 모순적이게 되고 


끝내는 도시는 도시인들에 의해서 완전하게 자기자신이 상실한 도시 즉 도시인들의 영향으로 도시 자체가 환상체화 되어 지옥의 상태가 될 것이야.


이것을 타파할 방법은 온전한 자신을 얻게되어 자기자신이 곧 자신이란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도시에서는 자기자신이 스스로에게 칭해주는 가치는 없고 오로지 타인의 시선에서만 가치를 찾는 거야.


그 외에도 머리가 어쩌면 인간이 아닌 것들을 쫓아낸 이유가 도시의 가치 보존을 위해서는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이여만 하기에 


도시의 가치를 훼손할만한 인간이 아닌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외곽 밖으로 몰아 내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지.


그 이유는 단순하게 욕망은 타인이라는 인간에 의한 가치이며 욕망이 있는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가치를 가장 높일 방법일 것이고 그 방법은 그저 도시를 욕망 덩어리인 인간들로만 가득 채우는 것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어.


그러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 조차도 단순한 식욕이 아닌 죽이는 것 조차도 여러 욕망 때문에 죽이는 존재를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흡혈귀만 해도 여러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식구들을 만드려고 하며 청소부들은 제한적이지만 가족을 위한다는 욕망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타인에 의한 가치이며 타인의 시선을 얻고자 함이며 타인이 중심이 된 체계야.


또한 이 게임의 세계관에서는 23구를 맛의 골목이라고 하며 그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 단순한 식사 행위가 아닌 그 사람의 직위와 고통의 모습이 곧 예술 행위이자 맛이며 욕망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하지.


도시는 타인으로 인한 욕망을 가치로 보며 가치는 곧 인간이며 타인의 시선이 곧 욕망의 흐름이자 가치의 흐름이며 안이야.


그러하기에 앤젤라가 한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가 정한다는 것은 머리에게 있어서 타인과 온전한 타인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제공자를 무시하는 것이자 도시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지. 


그러한 앤젤라를 향하여 조율자가 앤젤라가 한 없이 인간 같은 기계라고 한 것은 어쩌면 인간은 욕망적이고 기계는 인간적이다라는 즉 역시 기계는 인간이 아니며 가치가 될 수 없다는 발언이겠지.


도시는 현재로서는 인간의 시대이자 욕망의 시대이자 가치의 시대이며 인간이 아닌 것에 의해서 욕망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건 곧 도시의 가치가 줄어듬이고 또한 머리의 가치가 줄어듬을 의미해.


머리는 도시인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가치를 즉 기본적인 욕망을 제공하는 절대적인 타인으로서 머리에게 어떻게든 머리의 법을 따라야만 도시인들 스스로의 가치가 보존되는 것을 허락받고 살아남는데.


머리의 법을 따르지 않고 제한을 어기면은 도시인이 아닌 제거 대상이지.


청소부들은 제한적으로 도시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을 보면은 도시는 타인의 시선을 주고 받는 욕망이 있는 지적 개체이며 법과 제한만 어기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럭저럭 인간으로서 취급을 받는 거로 보여.


아무것도 없는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이 도시에 풀려나게 되면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으니까.


그리고 머리에게 직접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것은 머리에게 늘 세금을 내야하는 날개들일 뿐이고 그 밑에 있는 도시인들은 그저 도시인들이 속한 날개나 조직에다가 세금을 내며 자신들 바로 위에 있는 존재들에게로부터 가치가 매기어져 겨우 스스로를 보존할 뿐이야. 


또한 머리는 법과 제한을 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관심을 주지 않으며 머리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받은 대상은 곧 가치상실한 대상으로 간주된 것이며 그 대상은 머리에게 있어서는 도시의 가치만 훼손시키는 의미없는 쓰레기로 전락 됐음을 의미할 뿐이지. 


그러한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서 머리는 타인에 의한 가치를 닫지 못하게는 존재로서 도시의 가치를 보존하는 존재인 거야.


그러한 머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50일차의 A가 한 것처럼 자기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머리 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반하는 행동이며 기존의 도시의 가치와 타인의 의한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말살이야. 


다만 이건 도시인들이 타인에 근거하지 않은 온전한 자신에게서 스스로에게서 가치를 찾을 수 있게될 경우에 발생하는 결과이고 그나마 그러한 시도조차도 카르멘 때문에 거하게 말아먹었지.


또한 A가 얻은 미덕은 타인으로부터나 타인에 대한 미덕이 아닌 자기자신을 비로소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스스로의 가치가 스스로가 되는 것이야.


그러므로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소유물의 형태의 에고 또한 스스로가 정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한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진짜 에고는 타인에 의하여 변화되는 자신이 비로소 타인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한 자기자신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즉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서 타인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온전하게 자신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도로 보여.


그 이유는 A는 끝내에 에고를 만든 것이 아닌 X이자 A가 되었기 때문이야.


즉 온전한 자신인 X는 변화된 자신인 A이면서 변화된 자신인 A는 온전한 자신인 X인 것이지.


더 이상 자아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가 하나된 상태로 더 이상 다른 이가 되지 않는 자기자신의 상태로서 되는 것이 가장 최종 단계로 보인다.


초기작의 엔딩에서 You 라고 하기에 X는 자신이지만 자신에 의하여 변화하지 않는 마치 자신에 의하여 변화되지도 않는 타인 같은 자신이자 자신에게 불어넣어진 본래 자신이다.


온전한 자신을 의미하는 X가 플레이어의 역할이라 한 이유는 플레이어는 게임 내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며 옳은 쪽으로 이끌 수 있지만 


게임은 내부의 존재들은 무엇을 하여도 현실의 플레이어에게 변화를 주지 못하며 다만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게임 내의 인물들에게 영향을 가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표현한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만우절 끝나면 하나씩 고칠게.



A는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의미한다. C는 본능이 결여됨으로서 생기는 욕망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능은 본능이 충족되면은 인간으로서 인간됨을 의미한다. 그와 반대로 본능이 결여된다면 그 인간성에 결함이 생긴다.


여기서 본능은 완전한 자기자신이며 본능이 결여되지만 않는다면 외부의 요인에도 완전한 자기자신이 그 외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한 자신을 지켜내고 또한 완전한 자기자신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 또 다른 말로는 외부의 요인을 신경 쓰지않고 있는 그대로 자족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본능이 넘쳐흐를 경우에는 타인을 신경쓰고 타인을 위하여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 즉 미덕 발현이 된다. 그걸 통하여 EGO추출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욕망은 본능이 결여됨으로서 생기는 것이며 외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쉽게 변형이 된다. 즉 욕망은 타인이 나를 정해주는 타칭자신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라오루의 뒤틀림들을 보면 알다시피 모든 뒤틀림들은 타인의 시야를 또 다른 말로는 관심을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욕망이 자신에게 향하여 자신을 채워주기를 원한다. 이것에 관하여는 사랑과 욕망에 대하여 설명하여 알기쉽게 알려주겠다. 여기서 욕망의 문제는 타칭자신을 채워줄 타인이 부재할 경우에는 모순적인 상태가 됨으로서 그 사람이 욕망이 욕망이 그 사람이 됨으로 서로 채워주기만을 바라지만 채워지지 않는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고 구멍 뚫린 그릇 같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타칭자신이 아닌 자신이지만 타인이 되어버린 상태 쉽게 말하자면 자기타인이 되어버린다. 즉 자신을 희생하여 그 욕망을 채우는 욕망의 그릇이자 욕망의 내용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신도 타인도 아닌 모순적인 욕망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본능이 결여됨이 어쩌면 카르멘이 본래에 치료하고자하는 질병이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