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이곳에 정의가 도래했네!"


보라색 칼날이 살덩어리를 베어낸다. 살덩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비틀며 잘리지 저항하지만 이내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었다.

뺨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물줄기를 닦아내며 W사의 정리 요원은 다음 살덩이를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푸른 제복을 붉게 물들일 셈인 양 요원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투입된 열차칸이 다른 칸에 비해 유난히 혈흔이 낭자한 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은발 머리의 정리요원이 진압봉에 묻은 핏덩이를 떼어내며 홀린 듯 허공을 베고 있는 정리요원의 팔을 붙잡았다.


"후배님. 그 자는 이미 죽었어요. 쓸데없이 힘 빼지 않으셔도 되요."

"선배의 눈에는 저 괴수가 무고한 승객들을 향해 팔을 휘두르는 게 보이지 않소?"

"돈키호테."


무거운 저음의 주인공이 손에 부들거리는 핏덩이를 든 채로 다가왔다. 그러자 깨지 않고 싶던 현실에서 깨어나듯 돈키호테는 "아, 알겠소."라고 말하며 붉게 점철된 열차의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W사의 매뉴얼에 '과잉진압'이라는 항목은 없지만, 만약 간부가 이 상황을 목도했다면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우려하여 새로운 항목의 신설을 고려해보았을 정도로 참혹한 현장이었던 만큼 동료의 개입은 적절한 판단이었으리라.

한 마디로 광기를 제압한 장신의 정리요원은 손에 든 핏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숨결을 끌어모으듯 몸을 뒤튼다. 고통스러운 기침을 통해 목에 고여가는 핏물을 몇 차례 빼낸 후에야 그는 힘겹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미, 미안해.....잘못했어. W사에 소송 같은 건 안 할 거....윽!"

"죄송합니다. 규정을 따라야 하기에." 

"걱정마세요. 일어났을 때는 몸도 정신도 한결 개운하실 거예요."

"이, 이 열차는.....미쳤어......이 역은 더 미쳤고......"


장신의 정리요원의 손에 잠시 떨림이 있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핏덩이는 매가리 없이 떨어진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열차 안이 고요해지자, 두 요원(금발의 요원은 초점 없는 눈으로 옆좌석에 있는 살점을 쿡쿡 찌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차 상에 예고되어 있던 저항과, 번거로운 식별 작업을 마친 지금, 아무래도 이 열차는 W사의 규정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옆칸 문을 열고 마찬가지로 붉은 얼룩이 진 사원복을 입은 동료가 들어왔다.


"오케이. 2번 칸, 승객 30명. 전원 신원 확인 완료. 이쪽은? 조금 시끄럽던데?"

"방금 승객 30명을 확인했어요. 조금의 '저항'이 있었어서."

"그럴 수 있지. 이제 '수습'해서 돌아가자고."


 요원들은 바닥에 뒹구는 고깃덩어리에 시체 조각을 갖다댄다. 비교적 저항이 없었거나, 온화했던 승객들은 상당히 온전한 상태로 있었던 덕분에 의자에 앉혀지며 불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은발의 요원은 고기조각들을 의자에 얹히며 생각했다. 이 열차에서 가장 정신이 나간 존재는 누구일까?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며 고통을 즐기는 기행을 일삼거나, 누군가가 무참하게 난도질 당하는 걸 똑똑히 보면서도 "W사를 고소하겠다!" 같은 소리나 내뱉는 승객들일까? 아니면 그 수많은 승객들 속에서 단련돼어 서로에게는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며 "예, 예. 죄송합니다."라는 식으로 그들의 헛소리에 대답해주는 직원들일까? 가히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인지, 혹은 광기를 맨정신으로 직면해야 한다는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열차에 투입된 3명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녀와 장신의 남성은 미치지 않은 쪽으로 정신상태를 다잡는데 성공한 것 같았고, 열차에 투입된지 한 달 정도가 지난 신입은 광인조차 두려워할 광기를 획득했으니 말이다.

그때 금발의 정리요원이 피묻은 창가에 얼굴을 갖다댄다. 뺨에 혈흔이 묻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신나게 외쳤다.


"오, 오!! 바깥에 움직임이 있었소!"

"그게 무슨 소리야? 워프열차 특성상 안에서 문을 열 수 있는 건 직원밖에 없다고."

"이 두 눈에 사람의 형상이 똑똑하게 보였소! 내가 보고 오지!"


금발의 정리요원의 눈에 신입시절 볼 수 있었던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찬 생기가 돌아왔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사원증으로 피딱지가 가득 엉겨붙은 문을 열고 역 바깥으로 나간 사원은 어디론가 달려나가 "이보게! 정체를 드러내게!"라고 소리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동료들은 차례로 한숨을 내쉬었고, 은발의 정리요원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벽과 의자의 틈마다 먼지가 가득하고, 오랜시간 관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전구들은 나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공간에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세계에 갇힌 W사의 승강장을 보는 기분이다.


"파우스트 사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분명 이곳은 몰락한 날개의 기술로 현실과 이어진 다른 차원의 공간이겠지요?"

"그렇다고 알고 있다."


은발의 정리요원은 자신의 메아리와 대화하듯 소리치고 있는 후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이 공간에 낙오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기분일지. 그리고 그런 사례가 있을지. 실제로 W사에서는 요원들을 교육할 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안내한다. 

그중에 몇 개는 현실로 돌아오기 전까지 가급적 열차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나오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열차 안으로 되돌아올 것. 바깥의 자극에 가능한 반응하지 말 것. 열차의 바깥과 관련된 규정들은 하나같이 '외부 세계'와 '열차'를 단절하기를 권장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장신의 정리요원은 '과장'이라는 글자가 박힌 사원증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이성적인 대답을 했다. 정리요원들은 T사의 기술로 되살아나지 않는다. 아마 이 공간을 둘러다니다가 굶어죽거나, 미쳐버리거나, 늙어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군. 규정 외의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기에."

"파우스트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에요."

"그녀의 행동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자네는 너무 유도리가 없다니까 뫼르소. 나도 일반사원 시절에는 저런 데서 소리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어."


동료 정리요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차 밖으로 나간다.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물이 바닥에 고여있던 탓일까? 찰박! 소리가 승강장 전체에 울린다. "돈키! 빨리 와!"라고 외친 요원은 열차에 기대고 연초에 불을 붙인다. W사의 입사기념품 지포라이터가 특수 금속을 촉매로 하는 푸른 불꽃을 어두운 승강장에 뿌린다. 

은발의 정리요원은 연초를 씁 빨아들이는 동료를 바라봤다. 이곳이 너무나 적막해서였을까? 후아아아 하고 연기를 내뱉는 그 소리가 왜인지 불안하다. 아니, 애초에 이질적인 푸른 불꽃이 이 공간을 비췄던 시점부터 그녀의 불안감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무언가가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갑작스러운 자극에 화답하듯....

그러고보니 연기전쟁의 격언 중에 어두운 곳에서 불을 붙이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한 번의 깜빡임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두 번의 깜빡임에 상대는 당신의 머리에 무기를 겨누고 있을 거라고.


"여? 담뱃불 빌려줄까?"


그리고 두 번째 푸른 불꽃이 승강장의 벽면을 따라 퍼진다. 그리고 그 순간, 물방울이 더 가파르게 떨어진다. 아니, 이제는 발걸음 소리가 아니다. 빗길을 달리듯 찰박이는 소리에 승강장이 울린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연초를 입에 가져가던 동료가 '뭐야?'라고 말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보라색 무기가 동료의 머리를 꿰뚫는다. 그리고 바람 가르는 소리. 동료에게서 무언가가 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반격은 커녕 비명도 내지르기 전에 동료를 썰어버린,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은 약 2m의 어두운 형체였다. 동료의 지포라이터마저 물에 잠겨 꺼진 지금, 주변이 너무 어두웠던 탓일까? 마치 가시처럼 돋은 어깨장식과 네 개의 팔 끝에서 빗나는 보라색 칼날만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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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하게 재업하는 대회 문학입니다.

반응 좋으면 문학탭에 2화 올려볼게요. (원래 한 번에 쓰려 했는데 분량이 좀 많다)


생각해보니 괜히 연작으로 개추 유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서

마지막화만 대회탭에 올려 심사받고 나머지는 창작탭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