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1011).

남아있는 초상화 같은 게 없으므로 JTBC 평화전쟁1019 장면을 사용.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이 매우 빈약한 편인데,

사망직전 3개월간의 행적이 실로 비범하다.


2차 여요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 흥화진은 


위치에서 보다시피, 고려의 최전방 요새로 공격측(거란)의 입장에선 


후방을 안정시키고 퇴로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뚫어내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안뚫림.


40만으로 3천명이 막는 이 요새를 7일간 뚫지를 못해서 요나라는 여기를 포기하고 


예비병을 남겨 경계한 뒤 남하하게 되는데, 


타임어택이 걸려있던 요나라 군대에게 이는 틀린선택은 아니었지만


양규의 으랏차차 차력쇼가 시작되면서 결과적으론 틀린 선택이 된다.




어쨋든 거란은 병력을 나눠 진격하며 통주성전투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과 대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고려주력을 완전히 갈아버린다.


하기야 당시 요나라 황제가 친히 이끈 주력군이었고


이들로 만주와 중국 북부를 갈아대던 괴물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요는 곽주, 안주, 서경을 깨뜨리고 개경까지 쳐들어가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흥화진에 있던 양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흥화진에서 700의 군사를 끌고 나와 통주성에서 다시 천명의 병사를 수습, 도합 1700의 병력으로




요나라 병사 6천이 지키는 곽주성을 공격했다.



1700으로... 6천을요?


그것도 공성전을요?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그것도 수성을 하는 적을 상대로 공성을 하는게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전쟁사적으로 볼때 요새를 떨어뜨리려면 5배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함.)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

한밤중에 곽주성으로 들어가 거란병 6천명을 공격했다.

모두 목을 베고 성 안의 포로 7천명을 구해 통주성으로 옮겼다.

                                                                          -고려사-




어쨋든 이 시점에서, 앞으로 내달려간 요나라는  흥화진 - 통주 - 곽주로 이어지는

고려군의 전선으로 인해 퇴로가 끊긴다.


그렇게되면 압록강이 녹기전에 돌아가야하는 거란입장에서는 끔찍한 타임어택이 시작된 것이고

(유목민족이고 대군의 기병이 전격적으로 쳐들어오기 위해서 강을 배타고 건넌게 아니라 얼었을때

그냥 말타고 들어온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쉬운방법은 고려왕을 잡아 항복을 받는 것.




그래서 현종은 저 밑에 나주까지 런해버렸다.


그래서 요나라는 개경을 불태우는데 만족하고


고려왕의 입조 요구, 강동6주 반환 요구를 해주겠다는 부도 수표만 받은 채로 퇴각하게 되는데

(부도수표인 이유는 해줄 리가 없다는걸 요나라도 알고 고려도 알았기 때문)



함락하지 못했던 흥화진과 통주, 수복된 곽주가 여기서 암덩어리로 작용, 


요나라군사는 약 400km에 가까운 고립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게다가 여길 뚫고 지나가기엔 시간도 모자란 상황.


비정상적인 루트로 전투를 피해서 퇴군할 수 밖에 없는 요나라군사들에게



곽주를 함락시켰던 양규와 1700군사의 게릴라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1월 17일.

거란군 1만을 죽이다.


1월 18일.

거란군 2천을 죽이고 포로 3천을 구하다.


1월 19일.

거란군 2500을 죽이고 포로 1천을 구하다.


1월 22일.

거란군 천여명을 죽이고 포로 1천을 구하다.


...이런 미친짓을 벌이다 결국

1월 28일.

거란황제(요 성종)의 친위부대에 포위당해




전사하고 만다..



3천명으로 40만을 막고

1700명으로 6천을 지키는 성을 먹고


1700명으로 20만 대군을 상대로 게릴라를 해서 15000명을 죽이고 포로 3만을 구출해요?

판타지도 작작 써야지 아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