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위스키를 털어넘긴 속이 연신 부대낀다.


술을 마신다고 해서 설움이 같이 넘어간다고 믿는 족속은 아니다만, 그럼에도 오늘따라 텅 비어버린 시간은 뭐라도 넘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잠시라도 이 상념을 털어넘길 무언가가 필요했다.


도망가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암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살아보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아본 적이 까마득했다.


필사적으로 굴러온 삶에 받은 것은 속이 비어버린 칭찬 두 푼어치.


청승맞게도 나는 그 칭찬마저 게워내고야 만다. 그야 칭찬을 받아본 적 없는 삶을 살았기에.


칭찬도, 결국은 익숙해진 사람들이나 삼켜낼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우울증은 자존감을 깎아먹는다고들 한다.


29년 평생을 함께해온 이 개는, 나를 어디까지 갉아먹어야 만족하는 것일까.


새삼 평생동안 이 개와 함께해온 윈스턴 처칠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밤이다.





언제나 괜찮은 척, 한 쪽 다리가 저는 인생살이를 계속한다.


이미 연속되는 실패에 밑천마저 털려버렸건만. 그럼에도 추하게 인생살이는 계속하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추하게 끌고 가는걸까.


죽어선 안된다는 원초적인 생물의 본능인가. 아니라면 죽는다면 누군가를 기억조차 할 수 없다는 망집인가.


어찌됐건, 그 무엇하나 나와는 친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그 무엇이라도, 평생동안 나랑은 친구할 수 없으리라 비참하게 다짐한다.









요즘 들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상기하게 된다.


나는 자기 객관화라 우기고 있지만, 이 평가가 우울증에 삼켜진 편협한 시각인지, 아니라면 정말로 자기 객관화가 맞는 건인진 잘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본 것 같은데, 뒤돌아서면 부족한 것 투성이다.


없는 팔자에 그래도 얻어보겠다며 아우성이었건만, 안긴 품을 살펴보면 죄다 텅 비어버린 것 뿐이다.





중 고등학교 때 어울렸던 애들을 다시 보노라면, 그래도 이정도면 잘 넘어왔노라고 여기게 된다.


돌아보면 그랬다.


죄다 좋은 곳은 커녕 취업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 투성이며, 대학 조차 귀찮다는 이유로 자퇴한 이들이 일쑤였다.


그럴싸한 비전도 보이질 않았다.


노력도 재능이라는 말은 믿질 않지만, 그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낮은 사람들을 보며 자위질하는게 좋지 않은 것을 안다. 그래서 평상시 저 사람들보단 낫지라며 속으로 깔보지도 않는다.


애초에 내가 뭐라고 저 사람들을 깔보는지. 생각해보면 난 저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살아보긴 했던가.


참으로 병신같은 생각이지.




옆을 돌아보면, 나는 참 모자란 것 투성이다.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나는 업무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모자란 병신에 불과하며, 그사람들에 비해 나은 것 하나 뭘 말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랑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옆부서 팀원은 올해 취업 2년 선물로 차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돌아다니는 얘기처럼 벤츠네 아우디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평범하게 자랑할 수는 있는 차였다.


옆부서 부장은 이번에 자식이 결혼한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가정사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자식 하나 키워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저정도면 잘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나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 나은게 뭘까.


글을 쓰는 재주라는게 반도체 장비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나. 그 사람들에게 눈여겨볼만한 재줏거리던가.


학창시절 열심히 해왔던 부산물 역시 취업을 위한 기준이었을 뿐. 이 곳에 발들인 이상 그게 유효한 무언가가 될 수 있던가.



결국은, 무엇 하나 추억 편린 하나밖에 되질 못하는 것이다. 나는 추억의 편린조차로 삼지 못하지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병신처럼 저는 생활에 욕이나 처먹기 일상이다.


담당 부장은, 프로세스가 전부인 대기업에서 프로세스 조차 정해지지 않은 신생 팀이기에, 결국은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상이라지만 ,글쎄.


떠올려본다면, 내가 짬이 더 높고 더 잘 알고 있었다면 흘려 넘길 수 있는 일들이 한트럭처럼 쌓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모자랐던 탓에, 당해야만 했던거고.


이 세상의 모든 불이익은 장본인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끄덕이지 않을 정론이겠지만, 애석하게도 내 불이익은 대부분 이 틀에 따라왔다.


회사 생활에서 처먹은 욕들이나 부조리함도 결국은 이 룰을 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좀 더 짬이 높았다면.


회사 프로세스를 잘 알고 있었다면.


영어를 잘 알았다면.


성격이 좀 더 외향적이었다면.


부모가 있었다면.


자산이 있었다면.



... 하다 못해 의지할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몇 백번째 재고하게 된다.



누군가 내게 살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살아가야할 의미를 부여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생애를 붙들고 있는 것은 나 혼자며.


모든 부조리와 망가지게 된 것 역시 결국은 나의 탓이다.


부모가 없는 삶을 살았다 한들, 세상은 그것은 그 것을 나의 잘못이라 칭했다.


초등학교때 보았던 도덕 / 슬기로운 생활 교과서에는 그런 것이 부모의 잘못이라고 했었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 나이를 먹고서는 잘안다.


도덕교과서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며.


정의라는 것은 오로지 사회가 정하는 틀에 갇혀있노라고.







떠올려본다면, 내가 가진게 있던가.


남에게 호감을 살만한 외모를 가졌나.


아니라면 키가 크던가.


머리가 좋던가, 능력과 재주가 비상하던가.


그게 다 아니라면, 그 모든걸 커버해줄 누군가가 있던가.



참으로 쓰레기같은 삶이다.



살아보겠다고 벌어봤는데 정신차려보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전세 계약을 위한 빚. 회사 출퇴근을 위한 차량 대출.


다 빚 빚 빚.



글쓰는 재주는 내 생에 가장 쓸모 없는 재주 중 하나며. 동정받기 위한 값은 너무나도 비싸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평생동안 무너진 자존감을 세울 방법을 남에게 밖에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모양 이꼬라지라서.







누군가에게는 동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받아보기도 한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어렸을 적 인터넷에서 여러번 보기도 했었는데. 왜 내게는 그런 인연이 내려앉질 않는걸까.


원망하고 탓하는 것은 아니다만. 속을 부대끼게 한 위스키 한 병은 내 진의를 흔든다.



세상이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린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내가 흔들리는 것인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


무엇 하나 조차 확신을 내릴 수가 없다.



다 내 잘못뿐인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탓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술에 취한 밤은 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가누질 못하는 내 마음을 흔든다.





동정에도 적당한 값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받아본 적이 까마득하다.


언제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서야, 자신들의 도덕성을 지켜내기 위해 게워내는 싸구려 동정 하나.


나는 그런걸 바란게 아닌데. 그딴 위로나 얻자고 이 평생을 바쳐온게 아닌데.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건 어떤걸까.



생명의 요람 속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내 평생 너를 사랑하겠노라 맹세 받는 순간은 얼마나 벅차오를까.


어릴 적 피망 당근이 들어간 볶음 밥을 먹기 싫다며 투정부리는 삶은 얼마나 사람의 냄새가 가득할까.


주말 저녁. 개그 콘서트를 보며 아버지와 함께 치킨을 먹는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


유치원 소풍을 가서 까보는 엄마의 도시락이라는 것은 어떤 맛일까.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채로 만나는 첫사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애절할까.


죽어서 헤어지지 않을, 평생동안 기억에 남을 연인이란 얼마나 슬프면서도 감동적일 만남일까.


게임을 잘해서 친구를 많이 사귀는 삶이란 어떤걸까.


노력에 보답받는 삶이란 것은 어떤걸까.


누군가에게 그정도면 잘했다며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생애란 얼마나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하나 쯤 못해도 괜찮아.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야 하며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나누는 술잔엔 얼마나 깊은 여운이 담겨있을까.



무엇하나.



그 무엇하나 바랄 수 없는 생애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울어주지 않는다.


슬퍼해주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내게 살아라 강요하지 않는다.








되돌아본다면, 굳이 살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 사실따윈 이미 12살일 적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 사랑한 적이 없는 삶.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질 않는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내가 떠나갈 순간조차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거란걸 잘 안다.


자살 생존자. 주변 인의 자살을 경험하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곤 하지만.



내 곁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그저 불쾌한 생채기 하나 파이고 끝일거란걸. 깊은 흉터가 페이지 않을거란 것 조차 잘 알고 있다.



그야. 살아가기 위해서 잘라내었잖는가.


이해하기 어렵다며.




잘라내었잖는가.

















무너진 자존감은 타인의 긍정으로 세워진다고 한다.


대개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은, 우울증과 타인에 기인한 모멸로 인해 이뤄진다고 한다.



떠올려본다면, 누군가에게 진심어리게 인정받은 적이 까마득하다.


떠올려본다면, 내 삶은 언제나 타인들의 손가락질로 가득 찼던 것만같다.




검지가 상대에게 향한다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데.



그렇다면 평생동안 내게 손가락질 했던 모두들은 나머지 네 손가락이 어디로 간 것일까.


잘라버렸나. 그 죄책감조차 담기 싫은 마음이었을테니.










누구도 내게 살아가라 말한 적 없다.


누구도 나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으며.


누구도 내 곁에 내려앉지 않을테니.






그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