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갔다. 이미 간지 오래였다. 더위가 가시고 슬슬 쌀쌀해지려는 무렵이니, 올해 봄날은 모습을 감춘지 오래다.


익숙한 그 길은 구름의 틈새 사이에서 내려오는 희끗한 달빛에 잠겨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사방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을 걷다가 마침내 옛날, 우리의 아지트였던 나무로 만들어진,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오두막, '빈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구름에 숨은채로 고개만 살짝 내밀고 있던 보름달이 절묘하게도 스스로의 둥근 몸채를 온전히 드러낸 다음, 머금고 있는 빛무리를 '빈 집'에 비춘다. 고요한 밤에 오직 귀뚜라미들만이 '빈 집'의 주위에서 찌르르- 울음소리를 내면서 고요함 속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저절로 떠올려지는 것이었다. 매번 한결같아서 영원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


항상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기 전에, '빈 집'을 들렸었다. 수 없이 그곳을 들려도 설레이는 감정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 때문에 '빈 집'을 향하는 길을 천천히 산책하듯이 걸어가 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설레임을 못 이기고, 항상 최대한 빨리 '빈 집'에 도착하기 위해 힘껏 달렸으니까. 그렇게 '빈 집'에 도착하면, 들어가기 전에 달리느라 가빠진 숨을 고른다.


너에게 내가 서둘러 뛰어 왔다는 사실을 내심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에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어째서, 뭐가 그리 부끄러웠었는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웃기고 안타까워서 쓴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 때는 너도, 나도 너무 어렸으니까.


숨을 고르고 '빈 집'에 들어가면 창 밖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는 너의 뒷모습이 보인다. 하루도 빠짐없이, 항상 너는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다. 설레임에 요동치는 나의 심장 고동이 가장 극대화되는 때가. 그건 바로 내가 내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너의 모습을 볼 때이다. 그 미소는 왜 한결같이 저 달님처럼 밝고 순수한 것인지. 왜 그리도 쉽게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인지.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바로 옆에 앉아, 힐끔 밤하늘을 보고 있는 너의 옆모습을 몰래 쳐다보면, 달빛의 바닷속에서 싱글싱글 웃고있는 풋풋한 소녀의 모습이 담긴 풍경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보름달이 떴을 때 조차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보름달을 보지 않고 달빛에 비친 너의 얼굴만을 눈에 담게 된다. 그러다가 때때로 너와 시선이 마주치면, 살짝 붉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는 서로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된다.


참고로 나는 봄이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따듯하니, 허름한 '빈 집'에 너랑 오랫동안 단 둘이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저 어린 마음에 너와 나 사이에 봄날이 가득하길 바랄 뿐이었다.




*****




눈을 뜨니 봄은 아니었다.




저 멀리 새 소리가 나를 일깨워, 추억으로부터 벗어나서 눈을 뜨면, 저기 좀 떨어진 곳에 옛날 모습 그대로인, 예전, 우리의 아지트, '빈 집'이 보인다. 지방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 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친숙함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집안 사정 때문에 영영 헤어지게 된 뒤로, 너와의 연락이 끊긴 것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나는 여기서 혹시 모를 익숙한 만남을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부디 이해해줘라. 혹시나 네가 이 장소를 잊지 않고, 나를 잊지 않고 이후에도 가끔 몇 번 정도 들리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아직 널 마주할 용기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네가 달라져 있을까봐, 예전의 그 순수한 미소를 잃어버린 너를 보게 될까봐 말이다. 바보 같지 않은가. 이미 너를 잘 알기에 나는, 네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토록 믿고 있는데도, 아주 미세한 가능성인 그 '만에 하나' 라는게 두려워서 널 마주하길 겁내고 있는 것이다.



"후우..."



'빈 집'에 가까워질 수록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점 커진다. 그래서 심장을 달랠겸 한숨을 내쉰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달라진 너의 모습을 보게 될까봐 두려운게 아니다. 안에 네가 없을까봐 두려웠다. 애초에 네가 안에 있을 확률이 훨씬 낮을텐데도. 혹시나 하는 그 작은 기대가 배신당할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양심없게도 말이다.



연락이 끊긴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이놈의 심정은 양심이란게 없는 것인지, '빈 집'에 가까워 질 수록 가슴속에 설레임이 점점 커져간다. 설레인다니, 나도 10년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기는 쓸데없는 기대를 털어버리기 위해 다시 한 번 깊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들어가려고 문쪽으로 향하다가











달님쪽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을 발견해버린 것이다.  




"......."







문을 열자, 끼익- 소리와 함께 '빈 집'의 내부가 시선에 들어온다.








한결같네


라고 말해버린다.



갑자기 들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뒤를 돌아보는, 이제는 그 때보다 성숙해진 네가 보이자, 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하얀 도화지처럼 머릿속이 비워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되었는데도, 오랜만에 너의 모습을 보니 내 입이 스스럼 없이 저절로 한결같다고 중얼거린 것이다. 


아니 분명 변했는데, 어릴 때와 달리 순간 몰라볼 정도로 성숙하게 변한 너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한결같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하긴 내가 어떻게 너를 몰라보겠는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성숙하게 변했다고 해도, 10년 이상을 못봤다고 해도, 바로 알아보지.





어느새 물기가 차오르는 너의 두 눈을 보니 가슴이 사무친다. 그와 동시에 한결같은 너의 미소를 보니 순식간에 안도감이 들고 깃털처럼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도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텐데 너도 나를 바로 알아본 것일까.


너의 뒤로 보이는, 창 밖의 보름달보다도 너의 미소가 훨씬 더 밝게 빛나 보인다. 너무 밝아서인지, 아니면 가슴이 사무친 것 때문인지 나의 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기지만, 오랜만에 다시 보는 너의 미소를 1초라도 놓치기 싫어서 얼른 다시 눈을 뜬다. 그러자 한결같이 네가 웃고 있었다.



"~~~!"



너의 입이 열리고 처음 들려온 목소리에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대한 반가움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자주 들었던, 살짝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한결같은 그 목소리에는, 예전에는 그렇게나 자주 들었으면서 어렸던 나머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이 여전히 담겨있었다.


그렇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옛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결같이 나를 향한 너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이 빠짐없이 담겨져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품은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창문 앞에서 달빛을 홀로 받고 있던 네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니, 창문을 통과하는 달빛이 순식간에 많아진다.







몸에 느껴지는 따뜻함과 함께, '빈 집'에 달빛이 가득 차올랐다.






봄날이 간다고 슬퍼말아라. 봄날은 다시 돌아올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