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天魔가 있었다
타락한 천계의 잔재, 억겁을 떠도는 의식의 잔영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절망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존재
사랑을 증오했고, 삶을 저주했으며, 구원 따위는 허울뿐인 농담이라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천마는 이유도 없이 끌린 듯 작은 절로 흘러들어갔다
깊은 산중의 고요한 절
밤마다 그는 그곳에서 수행 중인 중들을 조롱하며, 욕망과 잡념을 속삭이고 꿈을 뒤틀었다.

“그대가 누른 욕망은 스스로의 거울이니라”
천마는 매일 밤 속삭인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고 수행에는 불안이 스며들었다
천마는 그것을 즐겼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천마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화蓮華’였다.
수행 중에서도 어린 수련승尼.
맑은 이마와 긴 머리, 가냘픈 손끝에서조차 불성이 느껴졌다.
그녀는 매일같이 마당을 쓸고,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물을 길었으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조용히 기도했다.

천마는 처음에 흥미로워 그녀를 관찰했다.
왜 이 아이는 욕망에 물들지 않는가.
왜 악몽도, 환상도 그 마음에 균열을 만들지 못하는가.

그래서 어느 날, 그녀의 꿈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연화는 꿈속에서도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길을 잃은 이가 있다면, 제 마음이 그분께 닿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천마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유도 없이
어느 틈에인가 그를 향한 기도가 된 것 같은 그 말에…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그날부터 천마는 매일 그녀를 지켜보았다.
해오름의 노래를 따라 마당을 쓰는 모습.
절의 뒷산에서 사슴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는 얼굴.
작은 새를 손에 얹고
"추우니 조심해"라며
속삭이던 목소리.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한번도 부정해본적 없는 내 인격을 치유해줄수 있는 순수하고 강한 존재로 느껴졌다

“연화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천마는 결심했다,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그날 밤, 천마는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그녀 앞에 드러냈다.

천마는 검은 옷자락에 밤하늘 같은 눈동자,
눈빛은 찬란히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바람 같았다.

연화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슬픈 분이군요.”
“내가 슬프다고?”
“네, 세상에 지쳐서 사람을 증오하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슬픔이 보여요.”

천마는 웃었다.
조롱이 아닌, 당황한 웃음이었다.

“날 보고 무섭지 않나?”
"무섭지 않아요"
“당신은 불행한 힘을 가지고 스스로를 부정 중이신 거군요.”

그녀는 살짝 웃는다, 천마는 그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연화는 천마에게 생각을 정리하라고 말하듯이 잠을 청하러 갔다

그날부터 천마는 연화 곁에 더 오래 머물렀다.
낮에는 모습을 감추고 그녀가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밤에는 조용히 그녀 곁에 다가가, 가끔 말을 건넸다
그럴 때마다 연화는 천마에게 성실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천마는 이제 중들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본성이 악을 점점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연화가 물었다.

“당신은 왜 절에 오셨어요?”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이끌리듯 온 것 같아.”
“그럼 왜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에요?”
"...처음에는 이곳의 사람들의 수행을 방해하려고 여기에 살았는데.. 지금은 너가 좋아서 있는것 같아...”

연화는 얼굴을 붉혔다.
작은 숨결이 고요한 밤에 퍼졌다.
"나한테는 너가 필요해.. 받아줘.."

연화는 속삭인다
“그럴까요?”

“……!”
“당신이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곁에 있어주고 싶어요.”

천마의 심장은 멈춘 듯 뛰었다.
그는 그 말을 여러번 되새겼다.
'그럴까요?'

"..응"

둘은 조용히 평상에 앉는다
함께 꽃을 바라보았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한다.
천마는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배워갔다.
질투, 떨림, 두근거림, 기대, 행복.

연화는 손을 뻗어 천마의 손등을 살짝 만졌다.
작은 손끝에 닿은 감각에 천마는 몸을 굳혔다.

 “제가 위로가 되었나요?"
"..응"

"넌 꿈속에서도 기도하고 있었어.. 누군지도 모르는 나에게"

천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처음이었다.
누구의 손을, 악의 없이 잡은 것은.

사랑은 그를 더 이상 예전의 천마가 아니게 만들었다.
수천 겁의 죄, 타락, 욕망, 증오.
그 모든 것들이 연화의 눈빛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렸다.
 
다음 날
그는 곰곰히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답만 나온다
이 사랑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항상 그의 모든 걱정을 덜어준다 그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녀는, 그 고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점점 확신시켜준다

어느 날, 천마는 눈물을 흘린다.
자신도 모르게.
연화가 그를 품에 안고 조용히 말한다.

“괜찮아요. 당신이 지금까지 절 사랑한 만큼.. 저도 지금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내가… 너를 더럽히진 않았을까…”
“아니요. 오히려 당신은 저보다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도 당신과 대화하며 안정돼요.”
"...."

그날 밤, 천마는 무너졌다.
정확히는 그 천마가 사라졌다.

검은 안개와 함께 이뤄졌던 천마의 형상은 사라졌고, 그 속 깊숙한 곳에서 빛이 잠깐 피어올랐다.
그는 더 이상 천마가 아니다.
그는 연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연화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순간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생각한다

'연화야. 너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용서할 수 있었어.'

"그러니… 고마워.
나를 구해줘서."

옆에 누워 있던 연화는 그를 보며 놀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화는 싱긋 웃는다
"별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