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재인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 최재인. 나름 할 땐 하는 성격이라 자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매사 적당주의에 무사안일주의자. 본래부터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언젠가 어떤 사건을 겪고서 이런 모습이 돼버렸다. 본인 왈, 노력과 대가는 정비례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 투자로 최대 효율을 뽑을 정도로만 노력하면 된다나. 뭐, 그래도 그런 사상 탓인지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었고 성격도 나름 둥글둥글해 대인관계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매사 적당히 넘어가는 게 일상인 최재인에게 어느날 왠지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학원 쉬는시간이었다. 어젯밤 게임으로 지친 몸을 쪽잠으로 달래고 있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는 걸 들은 것이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있는 것은...



2. 이시은


이시은은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최재인과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중학교가 갈리면서 여간해선 얼굴 볼 일 없어지고, 고등학교는 같은 곳으로 오게 되었지만 반은 달랐다. 그러던 와중 학원에서는 같은 반이 되긴 했는데, 그런 걸로 이미 멀어진 사이가 가까워질 일은 사실상 없었다. 한 번쯤 친한 척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관뒀다. 일단 노는 그룹이 겹치지도 않았고, 어째 몇 년 사이 콧대가 높아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최재인 생각).

그래서 아주 가끔 서로 필요한 말만 나누는 것 외에 둘은 접점이 없었다. 그러니 실컷 잠자다 얼굴을 든 최재인이 바로 앞에 그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보라.


3. 소개팅


그리고 시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재인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야."

"어?"

"나 내일 남소받는다."


재인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몇 초 후에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은 이랬다.


"뭐... 어쩌라고."


재인은 그 이상 자신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왠지 시은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여 뭔가 잘못했나 싶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시은을 달래려 했다.


"어, 어어, 잘됐네. 남자 사진은 받았어? 잘생겼디? 축하한다, 야."


하지만 시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기어이 말 한 마디 없이 자기 자리로 스르륵 건너가 책상 위에 푹 엎드렸다. 재인은 처음에는 당혹, 그 뒤는 의문, 마지막으로는 분노를 느꼈다. 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자기 남자 소개받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기분이 된 재인은 짜증을 내며 자던 잠이나 마저 자려고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가온 손 하나가 재인의 뒤통수를 때렸다. 재인이 마구 짜증을 내며 일어났는데 때린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언제 또 수업시간이 됐대.



4. 드라마


재인은 삼촌과 둘이서 살았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자 삼촌은 소파에 드러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로맨스 드라마였다.


"전에 본거잖아. 또 봐?"

"이런 뭘 모르는 녀석아. 원래 이런 명작은 본방 한 번, 재방 두 번은 봐 줘야 되는 거다."

"30 훌쩍 넘은 아저씨가 이런 게 재밌어?"


왠지 기분이 언짢아 재인은 심술궂게 툭 내뱉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TV에서 어쩐지 익숙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야. 나 내일 소개팅 나가."


전 애인의 그런 말을 들은 남주인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주인공이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고 하자, 갑자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팔을 잡고, 분위기도 잔뜩 잡고 이렇게 말했다.


"가지 마."


소파에 앉은 삼촌이 "크으으으으"하는 소리와 함께 자지러졌다.


"야. 너 저거 봤냐? 요즘 난리야. 크으, 돌싱 심금을 울리네."


평소라면 왜 돌싱 심금이 그런 걸로 우는데? 라고 쏘아붙일 재인이었지만 지금은 웬일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삼촌이 돌아보니 입을 헤 벌린 채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야, 최재인. 왜 그러냐? 너도 저게 그렇게 감동적이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재인은 고개를 흔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5. 따귀


다음날 오전, 쉬는시간.


어제 일 때문에 재인은 책상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단짝인 영진이 재인을 불렀다.


"야. 최재인. 누가 너 좀 불러달래."


"어?"


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교실 문 밖으로 나갔다. 혹시 시은인가 하는 기대도 조금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니었다. 매서운 인상의 여자애가 재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시은이랑 항상 붙어 다니던 애 같긴 했다. 이름이... 서은지였던가?


"어... 네가 나 부른 거 맞아?"


그런데 갑자기, 서은지가 재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꽤나 많이 아팠다.


"......"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