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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네"


막 깨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을 똑바로 하기 위해, 어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해보자.

같이 하교 후 놀러가서 인형을 따고, 수연이에게 선물하는 것까지 완벽..

거기까지는 정말 완벽한거 같았는데 그뒤로는... 알다시피

쓸데없는 가정사 얘기에, 거기에 북 받쳐서 애새끼마냥 질질 짜버렸다


아니, 되짚어보니 병신같네 진짜로. 갑자기 급발진해버렸는데 걔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쪽팔린데, 쪽팔리긴 하지만....그녀에게 털어놓으니 속이 한결 편해진건 부정할수 없었다


지금은 6시50분. 7시에 일어나도 되긴하지만 그녀가 마중나온다는 것에 들떠 일찍 일어나버린게 아닐까싶다

가방에 짐을 싸는동안 부모님에게는 뭐라 말씀드리고 나올지 생각했는데,

말할려고 아직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우기는 좀 그렇고, 한참 꿈나라 여행중인 동생녀석을 굳이 깨워서 부모님에게 대신

말해달라 하는것도 뭐하기에 그냥 포스트잇 하나만 남기고 나오기로 했다.


...애초에 아무 말없이 나가도 별로 신경은 안쓰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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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벽이라 그런가?

해 뜨기까지는 좀 멀었는지 하늘은 초저녁과도 같은 푸른빛을 띄고 있는 중이다.

이왕 일찍 나왔는데 멀대같이 그녀를 기다리는것보단 직접 찾아가는게 낫겠지.

집에서 나오자마자 날 마주쳐 놀랄 수연이의 얼굴을 상상하니 여러모로 즐거웠다

집이 어딘지 찾아보자...아.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존재감을 뽐내는 주택하나가 보인다.

근처 집들을 초갓집으로 보일 정도로 신축된지 얼마 안된것으로 보이는 3층 집.

심지어 마당과 주변의 작은 연못까지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은 저런 집에서 산다는건

꿈도 못 꾸겠지..


그녀가 사는 집일것이라는 증거는 하나도없다. 단지 이유없는 확신일 뿐

그녀라면 이런 주위에 누추한 집보다는 틀림없이 이런곳에서 살겠지 - 그런 느낌이다

그렇게 그 집앞에서 20분동안 멍하니 기다렸을까?  안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 - 엄마도 참, 남친같은게 아니라니까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집을 잘못찾아온거면 아닐까 싶어 쫄렸는데 다행히도 그러진않았다

그보다 쟤가 지금 뭐라한거지? 남친? 부모님이 오해라도 하신걸까. 그 남친이라는게 나였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나와 안만나는 시간동안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낼지는 아무도 모를일이다

..내멋대로 들뜨는건 좋지 않지



우울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녀에게 작은 장난을 쳐볼까 한다

마당 밖에 있는 나무옆에 숨어서 화들짝 놀래켜주자. 이렇게 -




"워!"



"히야아악!"



얼마나 놀랐길래 팔다리를 사후경직마냥 저렇게 떠냐.

..그녀의 비명소리는 그 뭐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그것과도 같았다


"왜, 왜 여,기기 계,세요..?"


아직까지 상황파악이 안된건지 전신을 떨면서 말하고 있다


"니가 마중나온다길래 설레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거든, 그래서 널 먼저 찾아가보기로 했는데, 이 집이 정답이였네"


"설렌다니 무슨...아니, 그보다 이건 아니죠..! 도시락까지 하마터먼 떨어뜨릴뻔 했다구요..??

 제가 얼마나 노력해서 만들었는지 아세요? 이렇게 가르침부터 먹을것까지 준비해주는건 살면서 당신이 처음..

아, 됐어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뭐라뭐라 말하다 이내 관둔다.

..근데 뭔가 그냥 지나칠수 없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



"..뭘 그렇게 가만히 서계세요? 자. 같이가자구요."


평소같았으면 내 발걸음소리만 들렸을텐데, 지금은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린다.

..난 살면서 스스로 외로움같은거 안탄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그 다른 발소리가 내 적막을 채워주는걸까


"..도시락, 메뉴가 뭐야?"



"헤..가르쳐드리면 흥이 식겠죠..? 왜요, 그렇게 드시고 싶어요?"



저렇게 장난기가득한 표정을 짓고있지만, 솔직한 직구 한번이면 쑥스러워 죽겠지.



"당연하지. 이쁘장한 애가 날 위해 도시락을 만들어준다는데, 신경이 안쓰이겠냐? 지금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모르겠어"



"...그쵸. 당신도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는 아시나 보네요..미소녀의 도시락. 감사하셔야죠.."



이쪽을 안보고 고개를 돌린거보니. 틀림없이 쑥스러워 하고있다

이거 은근 골려먹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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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아무말없이 걸어가고있다

이 정도면 앞으로 3분안에 학교에 도착하겠지.

나도 마땅히 재밌는 대화주제같은건 없으니까 이대로 침묵을 유지하려는 차에.



"저기요."



"..응?"



"갑작스럽지만..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얘기해주세요. 거짓말 하나없이. 솔직하게..."



상상치도 못한 질문 ㄴ ㅇ ㄱ


갑자기? 그거 지금 무슨 의도로 말하는거야?

설마, 고백같은거라도 되나?


일단 답은 해야하는데.. 뭐라 할지 참 난감하다. 부끄럼타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라는건 낯간지럽다고


"정말, 정말로 솔직하게 막 말해도 괜찮겠어?"


'..네"


"처음 볼 때는 그냥 이쁜애? 딱 그정도였어

이쁘지만 딱히 별 관심은 안가는..그런 애"


"아..그런가요."


뭔가 실망하는 기색이다

근데 아직 말 안끝났잖아


"하지만..니가 나한테 참견할때부터는. 뭔가 이상하더라 싶더라고. 보통 반에 나같은 불량아가 있으면

그냥 없는사람 취급하는게 보통이잖아? 근데 넌 그 이후로도 계속 사사건건 참견했어. 얘가 왜이러는건지 -

싶었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건지 날 도와주려 애쓰더라? 근데 이런거는 뭐...사실

약간의 위선이나 어장관리라도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었어.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


"..."


"그건 아닌거같더라? 전교회장이 고백했는데도 차버리고. 다른 애들과 대화할때는 그리 조용하면서 나하고 얘기할때만

유독 조리있게 말도 잘하고. 감정표현도 잘해. 오죽하면 애들이 그걸로 뭐라 말하지 뭐야."


사실은 날 좋아해서 그런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잘못말해서 분위기 깨지는건 싫다

병신같고 존나 답답하다 생각하겠지만  그런말했다가 자칫 저 녀석이 날 싸늘한 얼굴로 바라볼까봐 두려워서 말을 못하겠어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그저 순붕씨가 대하기 편한 사람일 뿐입니다만.."


"뭐, 니가 그렇게말하면 그런거겠지. 아무튼 지금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있어. 다른 사람도 신경안쓰는 날, 

너가 나한테만 왜 그리 잘대해주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확실한건 너때문에 요새 세상이 살맛나지 뭐야?

손수 공부도 가르쳐주겠다하고. 놀러가자는 것도 거절안하고 받아주고..  이런 사람은 너밖에 없을거야"


이미 털어놓기 싫었던 것도 다 털어놓았는데. 솔직하게 말해버려도 괜찮을것이다



"..그래요?"



"응, 부모님도 동생만 신경써주지, 나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거든. 그래서 사는것도 별 재미없었는데..

최근 들어, 뭔가 매일매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했어."


"..."


"..전부 너 덕분이야"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되지?"


이미 학교 정문앞이지만. 아직 할 얘기가 남아 들어가지않고 문앞에서 서있었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처음 봤을때는.. 망가진 사람. 인생을 낭비하는 이상한 사람. 그렇기에 도와주고 싶었어요."


"왜 그렇게까지 열렬히 도와주고 싶었어?"


"저는..그.."


"말하기 어려우면 굳이 안말해도 괜찮아"


"지금은,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근본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뭐야. 그게 끝? 뭔가 중간중간이 생략된거 같은데"


"..이런거, 얘기하려다간 부끄러워서 말못해요.."


"나는 안 부끄럽냐! 하아..그래, 그정도면 충분하지 뭐"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건..이렇게까지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저 뿐이에요.

이건 변치않는 사실. 부디 믿어주세요."


"아.알겠어 임마..."


의문점이 꽤 있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 한마디로 넘어가기로 했다

적어도 날 진심으로 신경써준다는 얘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