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lovelove/36515410

*오타지적 및 기타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그렇게 작업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한다. 나는 만나는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도 반갑게 응답해준다.  여기 도서관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나와 사이가 꽤 괜찮은 편이다. 이따금 먼저 '오늘 아침은 뭐 드셨어요' 같은 일상적인 질문도 하니 말이다.


"와.. 벌써 이렇게 작업하셨어요?"


4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벌써 네 권의 책을 새것처럼 수리 해 놓았다. 매일 보는 광경인데도 다른 이들은 여전히 그런 모습이 놀라운 것 같다.


"안 힘드세요?"


우연히 작업실에 들른 젊은 여자 사서가 내게 묻는다. 정말 지겹도록 들은 질문이라 이제는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당장은 없어요. 좀 쉬엄쉬엄 하셔도 되는데.."


아무래도 사서라는 직업 특성상 여자가 많을 수밖에 없고, 나는 종종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책장을 읆기는 등의 일을 도와주곤 했다. 확실히 날개가 달려 있다 보니 이런 면에서도 편리했다.


아, 물론 내가 인간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나도 다른 악마들보다 전투 같은 분야의 마법은 잘 다루지 못하는 것처럼, 단점이 있으면 그만큼 장점도 있는 법이다. 어찌 보면 마법도 없이 저 수많은 건물들을 짓고 책을 퍼낸 인간들의 기술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맞다. 어젯밤에 옆 도시에 있는 도서관이 다 불타버렸대요. 애 하나가 라이터를 가지고 놀다 그랬다나 뭐라나.."


지금은 날도 춥고 공기가 많이 건조한 늦가을이라 화재 사고가 나기 쉽고, 바람도 제법 불어서 진화하기도 힘들다. 특히 사방이 책과 나무인 도서관에 불이 붙는다면 사람은 둘째치고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 도서관 역시 곳곳에 소화기를 배치해 놓고, 모든 화기는 반입 금지로 지정해 두었다. 내가 책을 말릴 때 쓰는 마법은 온도를 올리지 않고 수분만 뺏는 것이기 때문에 불이 날 일은 없다.


나는 어제처럼 밤 11시가 되도록 일을 한다. 책 수리는 한참 전에 끝났지만, 늦게까지 일하는 사서들을 돕기 위해서다. 

마지막까지 남아 문 단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서 온통 매캐한 냄새가 난다. 내 코가 예민한 것도 있지만, 이 정도 냄새라면 혹시.. 불이 난 건가?


다음 순간 낯익은 사람, 아니 천사가 멀리서 달려오다가 나를 보고 멈춘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지?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하다. 이 추운 날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한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있고, 신발도 한 짝밖에 없다. 잠깐, 설마..


"너.. 왜 그래? 설마 집에 불 났어?"


그러고 보니 매캐한 냄새는 그녀가 사는 3층짜리 아파트 쪽에서 나고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도, 도서관.. 무, 문 닫았어?"


아무래도 갈 곳이 없으니 도서관에서라도 잠시 머무르려 한 모양이다. 그녀의 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이대로 놔두면 진짜 큰일날 거라고 생각한 내가 어려운 결심을 한다.


"갈 데 없으면 우리 집에 가자. 너 그러다 진짜 죽겠다."


그 말을 들은 에일린의 눈이 커진다. 추위로 덜덜 떠는 와중에도 그녀가 내게 소리친다.


"미, 미, 미쳤어?!"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이것만은 하기 싫었는데..


"말 좀 들어! 네가 애냐? 얼어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처음으로 강하게 호통을 치자 놀란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지체하지 않고 그녀에게 외투를 입혀준 채 품에 안고 커다란 날개를 편다. 마치 박쥐의 것처럼 피막이 덮인 날개는 짙은 검은색을 띠고, 붉은 발톱 한 쌍이 윗부분에 나 있다. 


1분도 안 돼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기 직전인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마법으로 내 손에 적당한 열이 나게 한 뒤 하나는 에일린의 머리에, 하나는 배 쪽에 올린다. 손이 그대로 통과되는,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 위의 고리가 인상적이다. 아까 소리칠 때는 언제고 그녀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쳐다본다. 다행히 머지않아 그녀의 체온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집에 불 난 거 맞지? 어쩌다 그런 거야?"


"....몰라... 왜... 구해줬어?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자기도 여태껏 내 신경을 많이 긁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암만 그래도 눈앞에서 죽게 놔두겠어?"


"..........."


"목욕 좀 할래?. 물은 내가 데워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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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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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다. 저 악마는 내가 싫지 않은 걸까?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그를 이 도시에서 쫓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 꺼지라며 화를 내기도 하고, 발을 걸거나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일하는 도서관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나도 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지금 내 행동이 별 효과도 없을 뿐더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유치하고 추하다는 걸. 하지만 그를 괴롭힐 때마다 부모님의 복수를 하는 듯한, 뭔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다.  


황당하게도 막상 그가 나를 해치는 건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덕분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작이 정색하고 화를 내기 전까지만 괴롭히는 게 일상적인 행동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화만 내고 끝난 것도 신기하다.


오늘 저녁, 자고 있던 나는 매캐한 냄새와 사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집 밖으로 뛰쳐나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살던 아파트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잠옷만 입고 나온 탓에 살을 애는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장은 불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불이 꺼진 후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다른 주민들은 어찌어찌 머무를 곳을 찾았지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아니, 염치없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할 용기도 없었다. 문득 도서관에 이 시간까지도 직원이 근무할 때가 있다는 게 떠오른 나는 별 생각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발이 어느 틈에 벗겨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서관 입구에서 만난 아이작은 얼어죽기 직전인 나를 구해주었고,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아까 정색하고 화를 내던 모습이 떠오른 나는 두려운 탓에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목욕할지 물어보던 그가 대뜸 내 왼발을 보자고 한다. 신발도 없이 한참을 뛰어다닌 탓에 왼발은 곳곳이 멍들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동상에 걸린 듯 저릿저릿하기까지 하다.


"잠깐만 참아. 오래 안 걸릴 거야."


양손으로 내 발을 감싸쥔 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자잘한 생채기들이 조금씩 낫기 시작한다. 그가 손을 떼자 멍은 그대로였지만 피가 흐르던 상처들은 모두 나아 있었다.


"어때? 이제 좀 덜 아프지?"


참 이상하다. 왜 나처럼 마법도 못 쓰고, 날지도 못하고, 성격도 더러운 쓰레기를 돌봐주는 걸까? 방금 전까지도 미쳤냐며 화를 내던 내가 원망스럽지 않은 걸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악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