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lovelove/36515410

2편 https://arca.live/b/lovelove/3659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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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친 에일린은 어느새 내가 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비해 옷이 좀 크다 보니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곧이어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내가 찻잔을 들고 침대로 향한다.


"허브티야. 한번 마셔 봐."


머뭇거리던 그녀가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다. 다행히 입에 맞았는지 그녀는 머지않아 잔을 완전히 비웠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 돼. 필요한 건 내일 나랑 같이 사러 나가자."


마침 다음날은 도서관의 정기 휴일이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연다.


"넌... 내가 밉지 않아?"


"안 미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자."


"왜 나 따위.. 신경쓰는 거야..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아침의 그 당당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에일린은 어느 때보다 심하게 위축되어 보인다. 대화를 나누며 느낀 것이지만 의외로 자기혐오가 심한 것 같다. 집에 데려오면 난리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얌전해서 놀라울 정도다.


"살고 싶어서 도서관까지 간 거 아냐?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겨. 그럼 난 먼저 잔다. 너도 잘 자."


일단은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좋겠다. 그녀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알람 같은 건 없음에도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난다. 창가에는 따스한 햇살이 드리우고, 아름답게 지저귀는 홍관조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에일린은 아직도 침대에서 한참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다. 추울까 봐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려던 그때, 잠꼬대인지 그녀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에일린은 홀로 살고 있었고, 가족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다행히 내 부모님과 동생은 마계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달려간다.


1시간 뒤, 잠에서 깨어난 에일린은 식탁에 앉아 눈앞에 놓인 스튜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나이프로 구운 식빵에 버터를 바르던 내가 말했다.


"안 먹고 뭐해?"


"아, 아니.. 그게.. 넌 이거 안 먹어?"


"식빵이 좀 남아서 상하기 전에 먹으려고. 맞다. 우체국장님께 전화해서 네 사정 말씀드렸어. 일단 오늘 하루는 쉬어."


마침내 한 숟갈을 뜬 그녀가 난데없이 눈물을 한 방울씩 떨군다.


"너 말이야.. 나 같은 새끼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내가 얼마나 괴롭혔는데.. 얼마나 널 싫어했는데.."


그녀가 전혀 싫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얼어죽기 직전인 와중에도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에일린의 모습을 본 뒤로는 자꾸만 신경쓰인다. 나라도 이 천사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지 몇 장을 뽑아 그녀에게 건내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난 괜찮으니까 여기 얼마든지 머물러도 돼."


"아이작.."


그녀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다.


"..... 고마워.."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옷과 몇 가지 물건을 사러 에일린과 함꼐 외출할 준비를 한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던 그때 익숙한 새소리가 들린다.


"로키, 너 아직도 있었어?"


소리의 주인은 55cm 정도 되는 까마귀다. 우리 집을 둘러싼 붉은 울타리에 앉은 까마귀는 나를 향해 반갑게 운다. 놀란 에일린이 까마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설마.. 네 사역마야?"


"뭐? 아니, 얘는 그냥 까마귄데."


시간은 2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길가에 웬 어린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가까이 가 보니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고, 왼쪽 날개죽지가 꽤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미숙한 치유 마법까지 써 가며 며칠 동안 정성껏 돌봐주니 까마귀는 곧 말끔히 나았으며, 어느 순간부터 나를 따르더니 이런 식으로 정원에 찾아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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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일어나 보니 낯선 침대에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뒤늦게나마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간밤에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하던 중 아이작이 나를 부른다. 


식탁에 가 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는 스튜가 놓여져 있다. 그는 나보고 식기 전에 먹으라고 하면서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다. 참 이상하다. 자기는 저렇게 보잘것없는 식사를 하면서, 왜 나한테 이런 걸 주지?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저 악마를 괴롭혀왔는데, 이런 식으로 대접받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숟가락으로 스튜를 떠 입에 가져간다. 천천히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해 본다. 정성이 가득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아아, 어째서일까.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것이 몇 년만인가.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타인에게 좀처럼 호의를 표한 적이 없어서 그럴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간신히 입을 열어 아이작에게 진심을 전한다.


그의 옷을 빌려입고 함께 외출할 준비를 한다. 대문을 열자 어제는 보지 못했던, 작고 아기자기한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아직 어리지만 싱그러운 초록빛이 감도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고, 다른 쪽에는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자홍색 잎을 가진 포인세티아 여러 개가 심어져 있다. 바로 그 순간 까악까악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놀란 마음에 대문 쪽으로 뒷걸음질친다.


아이작의 설명을 듣자 어쩐지 저 새가 부러워진다. 하다못해 까마귀조차 상처를 극복하고 드넓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데, 씁쓸하게도 내 날개는 낫기는커녕 21년이 지나도 비루한 모습 그대로다. 시선을 의식한 건지 로키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리에 얼굴을 비빈다. 광택이 감도는 검은 깃털은 마치 벨벳 같았고, 그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