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쁠때나, 슬플때나, 변치않고 눈앞의 상대만을 사랑할것을 맹세합니까?"


축가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예식장 안. 어느새 내 눈앞에 면사포로 가려진 여자가 서 있었고, 주례분께서는 내 대답을 기다리듯 눈치를 주고 계셨다.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올려 면사포에 가져다 댄 나는, 그대로 면사포를 올리며-




"야!"

"컥!"


무심코 숨을 들이쉴만큼 깜짝놀란 내가 손발을 뻗뻗하게 굳히며 화들짝 놀라자, 소리치며 나를 쿡 찌른 지아가 더 놀란듯 토끼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트하, 하고 숨을 내쉬며 순간적으로 굳은 목을 삐걱이듯 움직여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걱정스런 얼굴을 내게 가까이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괜찮아?"

"어, 아마도. 아으, 깜짝이야. 왜 그렇게 사람을 깜짝 놀라게 일으켜?"

"아니 뭐,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푹 자고 있어서 괜히 심술나니까... 미안!"


고개를 까딱이며 숙이는 지아의 말에 그제야 부드럽게 풀린 팔다리를 몇번 주무르고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이정도일로 크게 마음쓰게 만들기도 싫었으니까.


"됐어. 어차피 점심시간 끝나니까 깨운거겠지. 깨운 방식때문에 고맙다곤 안하겠지만 탓할 생각도 없어. 대신 이런건 나한테만 해라? 다른사람 상대면 화낼만 한 일이니까."

"에이,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이렇게 깨우겠어? 서아나 유리, 예나나 지혜, 은서, 주희..."

"발 넓은건 잘 아니까 때려쳐. 거 친구 많아서 정말 좋겠네."

"으응~? 글쎄? 친구가 많은건 딱히 자랑거리가 아니잖아~? 아, 친구라곤 나밖에 없는 우리 시현이 상대로는 자랑거리가 되나?"


킥킥거리며 웃는 지아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다지 누군가와 친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로서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말인만큼 그대로 무시한 내가 주섬주섬 다음 수업 준비를 하고있으니, 이내 지아가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꾹꾹 찔러댔다.


"야야. 그래서 무슨꿈을 꿨길래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었어? 괜히 궁금하더라."

"결혼하는 꿈."


담담히 답하고 고개를 숙여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불의의 일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에띄게 당황한 지아가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왜그래? 새끼발가락 찧고 0.1초 지난 뒤 뭔가 일어났다고 깨달은 사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는 집어쳐! 아니, 잠깐만, 너 무슨 사람이랑, 아니, 누구랑 결혼했길래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은건데!? 너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응? 그야 있지. 나도 남잔데 좋아하는 사람 한명은 있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누군데!"


집요하게 캐묻는 지아의 말에 살짝 뺨을 긁적이고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면사포 쓰고있었거든."

"...응?"

"꿈 속에서 내 신부. 얼굴은 모른다고. 못봤으니까."

"어. 응?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물은 건, 아니 근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는데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드르륵!


앞문소리가 들리며 반 이곳저곳에서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국어 선생님이 느긋하게 얘기 마저 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업시간 5분도 남기지 않고 선생님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사람은 없었던 듯 하다. 지아 또한 불만스럽게 나를 보더니 이내 휙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향했고.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는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인가.


...손목도, 어깨선도. 하다못해 손가락 끝만 바라보더라도 누군지 아는데, 고작 얼굴 못 봤다고 누군지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그 말을 하기는 좀 그랬다.

그리고 꿈은 꿈일 뿐이니까.


해가 지상을 비추는 것처럼, 눈치채보니 내 곁에 서 있는것도 모자라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앉아있는 이 작은 태양을 나는 도저히 품지 않고 베길 수 없었다. 태양을 내가 품을 수 있을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내 품이 찣어지더라도 품고 싶었으니까. 가슴 속 이것마저 없다면 나는 말라 비틀어졌을 테니까.


나의 태양.

나의 빛.

동시에, 내 손에 잡아둘 수 없는 햇살같은 그대.


지상을 비추는 해처럼 두루두루 친한 지아니까, 나를 대하는것도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대할 뿐이란 걸 안다. 지금도 가끔 같이 가지만 그건 집이 같은방향이어서고, 다른 애들이랑 하교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오해할 것도 없지. 어디까지나 남자사람친구로 대해줄 뿐인 지아에게 이런 흑심을 품고있다는 건 들켜서도, 말해서도 안되었다.


좋아서 혼자긴 하지만 아싸 그 자체인 내게 이렇게 다가와 대화를 해주며 이 나이가 되도록 친분을 가져주는 지아에게 나 따위가 품은 마음을 고백하는건 지아에게 민폐일 뿐일 테니까. 어차피 지아라면 나보다 훨씬 더 멋있고 잘생긴 남자를 당장이라도 사귈 수 있으니까.

지아와 결혼이라니. 지나치게 꿈이다. 허황될정도로... 행복한 꿈.


언젠가, 태양이 내 주변을 떠나 저 먼곳으로 갈 때까지. 그래서 내가 그녀가 없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렇게 그녀의 곁에 서 있을 수 있기를.


애써 아쉬운 마음을 털어낸 나는 그대로 수업에 집중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아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칠판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바람둥이 둔탱이의 뒤통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누가 곰탱이 아니랄까봐 눈치도 못채고 칠판만 바라보고 있다.


이쪽은 간밤에 꾼 꿈때문에 심란한데, 누구씨는 팔자좋게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는 꿈을 꿨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기왕 꿀꺼면 내 꿈을 꾸란 말이야!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으며 나는 바보멍텅구리시현이 꿈을 생각했다. 손을 내 머리 위쪽으로 들어올린 채 턱시도를 입고, 지금의 약간 멍한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 결심이 단단히 선 듯한 듬직한 얼굴로 나를 보며 키, 키, 키스를 하려고 입가를 다가오던 시현이의 그 눈빛이... 눈빛이...


"으므므..."

"이-지. 뭐함? 왜 갑자기 정신놓음?"


옆에서 소근대며 들려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헤벌레 펴진 입가를 애써 주무르고 얼굴을 돌린 채 아무일도 없던 듯 시치미뗐다.


"...흐음? 이녀석, 정체를 드러내라. 내 시비거는 말에 반응도 않고 무시하는게 아니라 시치미를 뗐다고? 네 둔탱이 남친은 눈치 못채도 나는 알지. 너 야한생각했지?"

"뭐래! 아니거든?"

"그래. 지아야. 뭐가 아닌데?"


고개를 팩 돌리며 반응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우리 자리 앞까지 와 있던 국어 선생님이랑 눈이 마주쳤다. ...망할 유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얘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요!"

"어머, 선생님도 지아 너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집중을 못하기에 온건데... 글쎄? 무슨 소리를 했을까?"


이정도 소란이 일자 둔탱이도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 바보는 왜 맨날 이쪽을 보지 않았으면 할때만 이쪽을 보는거야!


"이-지가 글쎄 음흉한 표정으로 야- 읍읍!"

"너 이상한 말 더 지껄이면 진짜 너죽고 나죽고야!"


몸부림치는 유서아와 나를 본 국어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쉿, 하는 제스쳐를 하고 다시 교탁으로 향했다. 한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뺨을 쭉쭉 꼬집던 우리를 주변 학생들이 숨죽여 보며 웃는것도 잠시,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이 잠시 고민하며 우리를 보았다.


"소란스런 여고생 두 분 덕분에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졌으니 잠시 이야기나 해볼까. 흠, 그렇네. 해바라기에 대해서 말해볼까. 누구 해바라기에 대해 아는걸 말해볼 사람?"


잘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던 유서아의 허벅지를 꽉 꼬집는 사이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해를 따라가는 식물, 사실은 영양분을 더 받기위함. 뭐 그런 로망없는 이야기들. 나라고 해서 수많은 애들 앞에서 해를 따라 움직이는 낭만적인 식물이라는 식으로 말할 깜냥은 없었지만.

짧은 발표들이 끝나고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가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에서처럼 해를 연모해서가 아니라, 해에게서 받는 영양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어디까지나 생리적인 현상이지. 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진, 정말 감동이라곤 1도 없는 이야기야. 하지만 이 정형적인 문구도 아주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훨씬 더 낭만적인 문장이 된단다."


'해에게서 받는 영양분 때문에,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간다'라고 적힌 문장에 두 줄을 그은 선생님은 이내 그 아래에 글을 적었다.

'해를 바라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에,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뜻은 같단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훨씬 더 문장에 감정이 녹아들지. 그렇지 않니?"


확실히, 문장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감수성은 훨씬 낫긴 하네. 내심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다른 식물들도 해에게서 영양분을 공급받지. 잎을 피고 전신으로 해가 주는 사랑을 받아들인단다. 하지만 다른 식물처럼 새침하게 받기만 하는게 아니라, 죽을만큼의 간절함으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해를 마주보는 그 꿋꿋함이 이 꽃을 해를 바라보는 꽃, 해바라기라 이름붙이게 한 것이겠지.

그럼 한번 이렇게 생각해볼까? 언제나 시선을 주변에 향하지만, 언제, 어느때 바라보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런 해바라기를 보며 과연 해는 어떠한 생각이 들까? 내가 해라면, 두루두루 지상을 비추면서도 계속해서 나와 눈이 마주치며, 언제까지고 나를 바라봐주는 해바라기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을까 생각되는구나. 사랑을 한다면 이 꽃처럼 너를 바라봐주는 사람과 하도록 하렴. 그럼 적어도 후회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국어선생님의 말에는 깊은 실감이 배어있었다. 역시 여러번 연애를 경험해 본 어른은 다르구나.


...뭐, 아무튼 저 둔탱이라면 저런식으로 사랑을 하겠지. 어린 시절부터 필요할때면 진지하게 마주쳐오는 시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곱씹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있을거다. 다른 누구를 상대하든간에 저 둔탱이의- 시현이의 옆자리에는 내가 있다. 이건 어린시절 나랑 결혼약속을 한 이상 확정되었으니까. 내가 아니면 저 녀석 옆에 있을 사람도 없을거고. 딱히 누군가 대신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대인관계도 꽝이고, 공부밖에 못하는데다, 눈치도 없지만... 믿음직스럽고, 멋있고, 자상하고, 상냥하고, 그리고 또, 또... 

사실, 별다른 이유를 덧댈 필요는 없다.


어릴적부터 반했고, 지금도 반했고, 앞으로도 반할거다. 언제나 힘들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말없이 나를 지켜봐주는, 말을 걸어줬으면 할때 말을 걸어주고, 곁에 있어줬으면 할때 곁에 있어주는, 치사할정도로 언제나 때맞춰 곁에 있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안다. 시현이는 우연히 때맞춰 내 곁에 있는게 아니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필요할때 곁에 와 주는거다.


...그런 주제에 언제나 둔탱이처럼 이쪽의 시선도 모르고 새침하게 칠판만 바라보고 있지만. 대체 저런 둔탱이 주제에 언제 나를 살피는건지.




볼을 부풀리는 친구를 곁눈질하며 유서아는 피식 웃었다. 이-지, 자신의 친구 이지아는 우스울정도로 김시현을 바라본다. 어쩌다 지나칠때도 쭉 바라본다. 하지만 봐라.

칠판을 보고 마저 기록하기 위해 고개를 내린순간, 기적처럼 저 둔탱이가 뒤를 슬쩍, 애타게 바라본단 말이다.


신이 농간이라도 부린 것처럼 이-지는 김시현 외의 다른사람 모두가 알 정도로 김시현을 바라보지만 김시현만 눈치채지 못하고, 김시현이 애타는 눈길로 이-지를 바라볼때면 꼭 이-지는 다른일에 시선이 가있단 말이다. 아마 김시현이 애타는 마음을 감추고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몰래 바라보는거겠지만... 저 바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지의 시선을 뭐라고 생각하는걸까? 뭐, 그냥 어쩌다 바라보는 시선? 어느쪽도 어느쪽이라니까.


덕분에 이제는 반에서 둘만 빼고 공공연히 내기가 벌어질 정도다. 둘이 대체 언제 서로의 마음을 깨달을 것인가.

깨닫기만 하면 곧바로 결혼까지 갈 수 있을텐데 말이지. 달콤쌉싸름한 드라마를 직관하며, 유서아는 자신이 생각한 1년 뒤까지 이 드라마가 계속되기를 빌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 3 졸업할때는 대학 갈리는 것 때문이라도 고백하겠지. ...설마?'


어쩌면 이 청춘드라마는 시즌제일지도 모른다는 유서아의 꽤 정확한 걱정과 함께, 오늘도 하루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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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