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게 펼쳐진 황폐한 적색 대지. 그 위에서 처절하게 공방을 펼치는 두 인영이 있었다.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힘뿐인 남자로구나.”


 조소를 머금은 여성의 목소리.


 “겨우 이 정도로 본녀에게 칼을 들이민 것이냐? 조금 더 본녀의 흥을 돋우어 보거라.


 “···.”


 그러나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여성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시시한 남자로구나.”


 그 순간, 여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흥미가 떨어졌다. 죽어라.”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팅.


 그러나.


 쿠과과광!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


 남자는 여전히 묵묵했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셈인가. 뭐, 좋다. 너의 생에 마지막 발악일 터이니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잠시나마 본녀의 흥미를 이끌어낸 것에 대한 보답이다.


 여자는 그리 말하며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팅.


 “영광으로 여기거라. 본녀가 이것을 꺼내든 것은 꽤나 오래간만의 일이니.”


 촤르르륵!


 술식이 전개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겉을 감싸고 있던 옷들의 모습이 바뀐다.


 푸른색과 하늘색, 흰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던 아름다운 드레스는 어느새 청백색의 갑주로 변했고, 머리에는 날개 같은 티아라가 하나 씌워져있었다.


 손에는 새파란 도신의 칼을 들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결 궁전(Frozen Palace).”


 여자가 땅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공간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결 궁전···.”


 남자와 여자가 맞붙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남자가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은···.”


 남자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의 감정이 짙게 점칠 되어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읽히는 것,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감정은 ‘기쁨’과 ‘확신’이었다.


 “···호오?”


 여자는 다시 한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디, 이것도 받아보거라.”


 그녀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릴 뿐인, 공격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행동. 애초에 남자와 여자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이 행동은 무의미했다. 절대 닿을 리가 없는 공격.


 그러나 남자는 죽을기세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콰지지직! 콰드득!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참격이 방금까지 그가 있었던 자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후우.”


 남자는 얕게 숨을 내쉬고는,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


 “설마하니, 네가 그 꼬맹이였을 줄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바닥에 누워있는 여성, 빙결 여제 아일라는 잊고 있었던 이름을 꺼냈다.


 “베르, 우리 꼬맹이.”


 여자의 손이 베르의 볼을 훑었다.


 “아일라···.”


 베르가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꼬마야. 어느새 이리 커서는 은인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는 아이가 되었는지···.”


 키득.


 아일라는 웃었다. 곧 있으면 자신의 목숨이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베르가 입을 달싹였다.


 “···어째서, 마지막의 그 순간, 힘을 빼신겁니까.”


 서로의 검격이 교차하던 마지막의 그 순간,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던 둘의 균형은 어느 순간 한 쪽으로 급격히 치우쳤다.


 그대로 힘겨루기를 계속했다면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을 터.


 “제가 그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셨기에 그러신 겁니까.”


 아일라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너도 알지 않느냐?”


 “···.”


 “또 입을 다무는구나. 내 그것이 나쁜 버릇이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거늘.”


 어찌 이리 반항적인지.


 “너만큼 말 안 듣는 꼬맹이도 더 없을 것이야.”


 베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일라'는 당신의 진명(眞名)이 아니겠지요. 마지막으로, 당신의 진명을 듣고 싶습니다.”


 “···못 알려줄 것도 없겠지. 그러나 그전에 조금, 이야기를 하여도 되겠느냐.”


 “얼마든지요.”


 아일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녀는,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