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분들의 순애 농도 측정을 부탁드립니다.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큰 도움이 될거에요!






"방 구경 잘 했어요."



눈물을 다 닦은 하늘씨는 왠지 멋쩍은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거실의 꽃병 앞으로 가서 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아하니 다행이다. 


금으로 된 꽃을 다발로 만들어서 선물할까 했는데, 그러지 않길 잘 했네.



"집 둘러본 소감은 어때요?"



억지로 캐물어서 될 문제도 아니고, 일단 내가 기억 못하는 게 문제니 말을 좀 돌렸다. 


근데 내가 언제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놈의 자식아...



"음... 우진씨는 돈은 많은데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응? 딱히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네. 


아닌가? 돈 많다는 게 좋은 뜻인가?



"집안에 화장실을 빼면 거울이 하나도 없어요. 


장식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여기 있는 꽃병이랑 꽃이 전부고요. 


하다못해 소파에 쿠션 하나 정도는 둘 법 한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이 집을 둘러보아도 우진씨의 흔적을 찾기는 힘든 것 같아요."



꽃병도 마음에 든 건지, 하늘씨는 양 손으로 유리로 된 꽃병을 들고 말했다. 


좋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래도 깨끗하고 잘 정리되어 있기는 했어요. 


비어있는 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거나, 운동을 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거실이 있는 건 좀 놀랐지만요."



꽃을 들고 있는 하늘씨는 그 자체로도 빛나보였다. 


얼굴에 있던 멍은 거의 다 빠져서 전혀 티가 안 날 정도였고, 새하얀 피부와 울긋불긋한 꽃의 색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유리 꽃병도 한껏 밝게 보이게 해 주었고.



"음... 저녁 먹을래요? 


저기 차려져 있는데."



아까 퇴근하고 카페가기 전에 잠깐 집에 왔을 때 가정부 아주머니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저녁을 조금 늦게 하시네, 싶었지만 카페를 먼저 가고 싶어서 갔다 왔더니 저녁을 차려두고 퇴근하셨나 보다.



"우진씨 밥 뺏어먹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아니에요. 혼자 먹기도 쓸쓸하니까 같이 먹어요."



내 말에 하늘씨는 다시 꽃병을 TV 옆에 두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집에 대해서 별로 좋은 말이 안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커튼을 제외하면 정말 살풍경한 집이었으니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보면 '모델하우스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



"아, 고마워요."



하늘씨의 앞에 수저를 놓고, 밥솥에서 밥을 퍼서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몸을 숙이자 다시 하늘씨의 머리카락에서, 약한 쇠 냄새가 전해졌다.



"혹시 우진씨 화나지 않았어요?"



"응? 네? 제가 왜요?"



드물게도 하늘씨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까 전에 울던게 조금 남아 있나?



"생각해보면 큰맘 먹고 저를 집에 초대했을 텐데, 저는 투정만 하고 칭찬은 잘 없었으니까요. 


화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는다. 


내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크게 애착이 없기도 하고.



"어... 아니, 생각보다 괜찮은 분석이었어요."



그리고 분석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어. 


집에 잘 정이 안 간다 싶었는데, 장식이나 조형물이 하나도 없이 살풍경한 집이라서 그럴지도 몰라. 


기껏해야 하늘씨 주었던 꽃다발이나 책상 위에 있는 액자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내 자아나 정체성을 드러낼 만한 건 없지.



두부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순하지만 깊은 맛이 났다. 


양이 많은 건 아마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먹을 것을 알고 계셨던 걸까.



"우선 저는 이 집에 대해서 그렇게 큰 애착이 있지는 않아요. 


제 필요 공간만 생각하면 쓸데없이 큰 집인 것도 맞고요."



부동산 가치와 집의 조망, 출퇴근 거리 등을 생각해서 예산 내의 집을 구한 것 뿐이다. 


혼자 관리하라고 하면 하기 힘들 정도의 이런 커다란 집을 원한 적은 없었다. 


한국 부동산은 가치가 떨어진 역사가 없으니까.



장조림은 너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잘 삶아져 있었다. 


꽈리고추도 들어가 있는데, 이게 또 별미네.



"변명 같지만 군대에서 부터 습관이 든 것 같아요. 


파병을 다니고 기지를 옮기면서 장소에 정이 들만 하면... 


막사가 폭격으로 박살이 나거나, 테러의 목표가 되거나, 무슨 이유에서든 없어지곤 했죠. 


그래서 개인적인 것들이나 소중한 것들을 잘 두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정확히는 그냥 박스에 포장한 채로 둔 것 뿐이지만. 


그건 다용도실 창고에 잘 처박혀 있다. 


기껏해야 미국에서 썼던 가전제품이나 몇 가지 증명서가 전부일테지만.



계란말이는 전자렌지에 잠깐 돌려야겠네. 


접시째로 넣고 몇 분 돌리면 되려나?



"그리고 이 집을 구할 때 텅 빈 상태였던 건 맞아요.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것도 반 정도는 자포자기 상태였고, 


아까 카페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어디에도 정을 주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요."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름 성과를 내고 일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회장님이 나를 한국으로 호출할 때 그 과정이 너무 일사천리였다. 


'미국 지사에는 남우진 사장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형식적으로라도 좋으니 좀 잡는 척이라도 해주지. 


다 보내놓고 화환 보내고 그래봐야 의미 없는데.



미국 놈들은 정이라는 게 없어...



"음... 근데 과거형이네요."



아 뜨거. 계란말이 뜨거워! 


너무 돌렸나? 


전자렌지 안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을 때 꺼냈어야 했어!



"여기 물이요."



"고마워요."



정신없이 급하게 물을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정신이 쏙 빠지는 것 같네.



"그래서 지금은 뭐가 다른거에요?"



어우 뜨거. 


일단 적당히 대답해야지.



"아, 하늘씨가 있잖아요."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했나? 


하늘씨의 움직임이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화면 정지 한 것처럼 눈도 안 움직이고 굳어졌네. 


버그인가? 여기 서버관리 안 하네.



"괜찮아요? 체했어요? 


얼굴이 빨개지는데?"



이상한가? 내가 방금 무슨 말 했지? 


정신 없어서 너무 속 이야기를 필터링 없이 했나? 


아닌데, 제대로 말한거 맞는데.


하늘씨 덕분에 달라졌다고 말한 건데.



"어, 아뇨?! 전혀요!"



하늘씨는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더니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귀 끝까지 빨갛게 되어있었다. 


목소리도 뒤집히고.



왜 저러지? 내가 뭐 잘못했나? 


먹는 것도 그만 할 정도야? 


얼굴이 빨갛게 된 게, 화가 났나? 


내가 뭐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런 이야기를... 어떡해."



"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서 하늘씨에게 몸을 가까이 하고 물어보았다. 


아직 입천장에 열기가 있어서 물을 한 컵 더 따라 마셨다. 


진짜 뜨거운 음식은 조심해야지...



"... 우진씨는 여자 마음을 참 모르는 것 같아요."



평소랑 다르게 하늘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뭘 많이 잘못했나?



"갑자기?"



"아니에요! 이전부터 그랬으니,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있을게요!"



하늘씨는 손을 내리고 한껏 인상을 쓰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뭐가 불만스러운 건지, 나를 원망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네. 


저런 눈빛도 할 수 있구나. 


평소에는 웃는 표정에서 거의 변화가 없어서 저런 표정은 못 할 줄 알았어.



근데 그런 사람이라니. 


내가 막 이상한 사람인 것 같잖아. 


나 아직 무례한 일은 안 한 것 같은데.



"그, 근데... 제가 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하늘씨는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된 것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카페에서 하늘씨랑 만나고 하늘씨는 진지하게 글 쓰는 걸 봐줬잖아요. 


오늘도 저를 인정해 주었고. 


그러니까 저도 정 붙일 곳이 생긴 것 같아요."



군대를 갔다왔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심지어 군대를 나온 사람들도 돈 있고 힘 있으면 안 가도 되는 곳으로 알 텐데.



"하늘씨 말 대로 마음에 둔 것이 없어서, 미련없이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쳤어요. 


아버지가 싫었고, 그 때 안 좋은 일도 겹쳤거든요. 


군대도 마찬가지로, 한국 국적은 필요하고 아버지 이야기는 듣기 싫으니 반항했다고 봐도 될 거에요. 


결국 거기에 익숙해지니 직업군인도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하늘씨가 있잖아요. 


저를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이상한 말은 아니잖아. 


좀 부끄럽긴 하지만 솔직하게 내 마음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이전부터 많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 정도로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아니면 위장 연애를 전제로 한 계약을 하자는 이야기도 안 했을 거다.



"아우..."



근데 하늘씨는 다시 화가 난 건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는 귀를 넘어서 머리까지 빨갛게 된 것 같은데. 


그리고 때때로 괴성에 가까운 신음을 작게 내곤 했다. 



뭐지. 고장났나. 


수리점에 가서 뭐라고 해야하지?



"어... 어쨌든 하늘씨가 있으니까, 저도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에요. 


지금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집 리모델링을 할 일이 없어서 그냥 방치해두고 있을 뿐이죠."



내 말에 하늘씨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이쯤 되면 밥을 먹을 상태가 아닌가? 


나는 밥을 거의 다 먹어가는데. 


좀 천천히 먹어서 속도를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니면 배가 안 고픈 건가?



"하지만..."



한참 후에나 하늘씨는 뭔가에 저항 하듯이, 정말 조금 고개를 들어서 손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중얼거렸다. 


얼굴은 내가 사주었던 꽃다발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쁜 사람은 얼굴이 빨개져도 예쁘네. 



"하지만 우진씨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않나요? 


학교 교수나, 직장 상사나 부하든... 가족이라도요."



응. 그렇지. 


하지만 내가 하늘씨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긴 했다.



"전우끼리 서로를 인정하는 건 당연한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먼저 인정을 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하늘씨가 말한 사람들의 유형은 거의 비슷하죠. 


사회적인 관계로 얽힌 사람들. 


그러니까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상사나 부하나 서로를 인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법이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건 의외로 큰 동기부여가 되고, 집단의 결속력을 높이는 법이니까. 


나도 회사의 사장으로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잘 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는 좋은 교재이므로 잘 처리해서 같은 실수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일탈이나 나태로 인해 손해가 생겼다면 벌이 필요하고, 과하지 않을 정도의 합당한 처분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 각자 구성원들이 창의력과 능력을 발휘할 토대를 만들어주면 회사는 잘 굴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늘씨는 달랐어요. 


저에게 굳이 글을 보여달라고 할 이유도 없었고, 거기까지 자세하게 살펴보며 저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죠. 


그러니까... 하늘씨가 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는 건 충분히 특별했어요."



내 말이 좀 이상했던 걸까, 하늘씨는 좀 전보다 훨씬 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나? 싶어서 살펴보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장조림에 들어간 고추가 청양고추였던 것 아닐까? 매워서 저러나?



"나도... 나도 우진씨가 특별해요. 


그래서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거에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보았던 하늘씨 모습 중에서 제일 귀여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은 조심해주세요..."



얼굴이 새빨갛게 된 하늘씨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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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주소. 여기 올리는 것에는 이전편이랑 이어지는 부분이나 복선 등을 잘라내고 올리고 있습니다.

직접 보시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해요.


약간의 가정 폭력은 묘사되어 있지만 피폐, 후회가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