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5화>>





나른한 햇빛이 배부른 학생들을 기절시키는 점심시간.



"은아야~"


"어허, 지금 저는 요구르트님을 영접 중이니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자기 책상에서 요구르트에 빨대까지 꼽고 마시고 있는 은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친구들을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자기 자리에 앉아서 요구르트를 영접하고 있는, 포텐셜 에너지 제로의 은아는 자기보다 머리 한 개 이상은 큰 친구들이 다가오는 것을 거역할 수 없었다.


물론 서있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안아줘요."


"아, 서아현, 맨날 지겹지도 않아?"


"아니, 매 순간 행복해. 안을 때 마다 새로운 기분이고.."



은아의 제지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무력화당했다. 곧장 은아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쓰담쓰담을 받고 있게 되었다. 은아는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인 채 요구르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 진짜 은아 같은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아~ 은아 우리집 올래? 매일 요구르트 3잔씩 바칠 테니까."


"...동생으론 싫어."



태클 건 부분이 상당히 엇나가있는 은아였지만, 아현은 요구르트를 한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고는 납득하기로 했다.



"은아야, 오늘도 그 남자애랑 갈 거야?"



은아의 앞자리에 앉은 혜서는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개학한 지 한달 된 시점이지만, 은아는 하교길을 대부분 현성과 함께 했다. 은아를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 입장에서는 개학하고나서 계속 은아를 빼앗기는 상황이 달갑진 않았다. 그런 감정 아래서 그녀들은 오늘도 작은 희망을 품고 은아에게 그 1학년 남자애와의 하교 동행 여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응!"


"아앙~ 우리 은아 못 잃어어~"



해맑게 대답하는 은아와 달리 혜서는 울상이 돼서 칭얼거렸다. 그녀에겐 은아와 하교하지 못하는 현실은 곱씹고 적응하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적인 고통이었다.



"근데 걔가 누군데 맨날 같이 가?"



아현은 은아의 머리에 턱을 올린 채 열심히 은아를 쓰다듬으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


신입생, 17살치고 엄청나게 큰 키를 가진 남자애가 그에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작고 소중한 은아와 함께 다니다니, 삼류 소설에나 등장할 것 같은 조합이었다. 아무튼 친구들은 은아를 잃은 상실감과 질투 비스무리한 감정과 순수한 호기심이 섞여 은아와 함께 다니는 남학생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동생이야."



은아의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아현과 혜서는 동그란 눈으로 묘한 아이컨택트를 이어갔다.


그녀들이 보아온 은아는 귀여운 병아리 한 마리 같은 존재였다. 은아는 모난 성격이라기보단 오히려 모두에게 친절하고 살가운 아이였지만, 딱히 남녀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인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서 반의 남자 아이들과도 딱히 모난 관계는 아니지만 친하지도 않은 그런 은아였다.


그런 은아가 매일매일 같이 하교하는 남자애, 그것도 오랫동안 알고지낸 사이라는 묘한 관계에 한창 남녀상열지사에 관심이 큰 여고생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뭐, 걔도 생일 한 11월 12월쯤 해?"


"아니? 1월 생일이야."


"...몇일?"


"1월 1일!"



아현과 혜서는 또 다시 눈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황당함과 어이없는 감정들이 서로의 동공에 가득 차 있었다. 대충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아현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동생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거 아냐?"


"그래도 1학년이잖아. 동생은 동생이지!"



은아는 팔짱을 끼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 고작 하루 차이로 150cm의 자그마한 은아가 180은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애를 동생 취급하는 상황이 은아의 친구들에게는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예전에 빠른 입학을 허용하던 때에는 영락없이 같은 학년이 되었을텐데, 생일 단 하루 차이가 동생 취급의 명분이 되어버린 이 재미진 현상에, 아현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은아가 보면 이 귀여운 얼굴로 진짜 나쁜년이라니까.. 하루 차이로 너무 철벽치는거 아냐?"


"아니, 누나동생 하는게 왜 철벽이야?"


"그래도 걔는.. 사실 옛날부터 우리 은아랑 스스럼없이 친구로 지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너무해 은아.. 완전 나쁜 여자.."


"너네 또 아무말 대잔치 한다?"



은아는 갑자기 근거 없이 놀려 대는 친구들에게 머리를 붕붕 흔들며 저항했다. 하지만 이정도 저항에 굴복할 그녀들이 아니었다.


은아는 끓는 점이 낮은, 재밌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 특성을 아는 그녀들은 합의를 한 적도 없었지만, 둘이 협동작전을 펼쳐 은아를 쿡쿡 찔러 속마음을 열어보고자 했다.



"그래도 딱 보면 걔가 훨씬 어른스러운거 같아 은아야."


"아니야, 걔도 맨날 장난치고, 애기라니까 애기!"


"그래도 솔직히 마냥 동생같지는 않을 거 아냐? 가끔 오빠 같고 설레고 그런 적 있어 없어?"



혜서가 결정적인 질문으로 치고 들어오자, 눈치 빠른 아현이 바로 그 의도를 캐치하고 어시스트 포문을 개방했다.



"솔직히 걔, 키도 엄청 크지? 목소리도 좋고 진중한 타입인 거 같고, 얼굴도 반반하고.. 은아는 동생으로 밖에 안 보는 거야?"


"....음.."



모든 결정적 떡밥을 던진 두 연합군은 이제 상대의 답변만을 기다리겠다는 듯 희미하게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들의 시선은 골똘히 고민을 해보고 있는 은아의 입으로 향해 있었다. 그저 귀엽고 천진난만한 친구인 은아에게도 연애세포라는 게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그들이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이제 그녀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은아에게 자그마한 연애감정이라도 있으면 친구들은 마냥 귀여운 병아리 은아도 성장하는구나, 하는 쌉싸름한 감정을 즐기게 될테며, 반대라면 아직 애 같은 은아를 또 어화둥둥 귀여워하면 될 일이다.


그런 기대를 품은 친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아는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끔은 좀 귀엽다 생각하는 정도?"


"?"


"뭐, 왜! 그래도 누나라고 잘 불러주고, 가끔 덜렁거리는게 귀엽구나 싶을 땐 있어. 뭐 만하면 우리 애기 우리 애기 하는 너희들보다는 낫다구!"



달콤쌉싸름한 주제 아래서 은아의 입에선 그저 누나 취급을 받고 싶어하는 유치한 대답들만이 나왔다. 그런 대답들에 아현과 혜서는 맥이 빠지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그 애랑 사귄다고 해도 아무런 생각 안 들어?"


"어?"



아현이 그런 소리를 하자 은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마치 무서운 맹수를 눈 앞에 둔 토끼같이 커다란 눈망울이었다.



"...그건 안돼. 현성이는 나랑 놀아야 돼."


"헐.. 은아 귀여워.."



아현과 혜서는 은아의 웅얼거리는 대답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꺄아꺄아거렸다. 은아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들은 은아가 적어도 그 1학년 남자애를 단순한 소꿉친구로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뭐가 귀여운 포인트인데? 생각 좀 거치고 말해 정말."


"은아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야!"



아현은 은아의 머리 전체를 품에 꼭 안으며 그녀를 쓰다듬었다. 상황이 읽히지도 않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은아와 달리, 은아의 친구들은 오늘 새롭게 보게 된 은아의 모습에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아의 마음 속에는 분명 그 남자아이에 대한 감정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여린 은아는 그 감정을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순수한 소녀와도 같은 은아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된 두 친구는 앞으로 이 남녀관계를 지켜보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았다.



"은아야, 우린 항상 너 응원하는 거 알지?"


"아니, 그래서 무슨 얘기냐고 아까부터어~!!"









오늘도 은아는 변함없이 현성의 옆에서 하교길을 걷게 되었다. 날씨는 벌써 추위가 사라지고 따뜻함이 피어나려고 하는 초봄 날씨가 찾아왔다. 그러나 은아의 표정에는 궁시렁궁시렁, 불만 가득한 겨울이 방문한 상태였다.



"...왜 기분이 나쁜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누님?"


"아, 그러니까 있지.."



은아는 하소연의 포문을 열려고 운을 떼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속사포처럼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내뱉게 될 뻔한 나머지, 입을 닫고는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뭐해?"


"아, 아니? 별일 아냐."



은아는 나오려던 말들을 꿀꺽 삼키고는 태연히 얼버무렸다. 현성은 잠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런가보다 하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당사자에게 하소연 할 수 없는 이야기>



은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현성은 은아의 친구들과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였다. 모르는 곳에서 자기 이야기가 오고 간 것에 불쾌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근데 은아의 뇌리에 그런 기본적인 것을 넘어선 무언가 다른 요소가 있었다.



은아와 현성은 정말 가까운 사이였다. 부모님끼리도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둘은 정말 가족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은아는 평소에 현성에게 숨기는 것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했던 주제도, 평소의 은아 자신을 생각해보면 스스럼없이 말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왜인지 숨기게 된다.



아현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이고, 거기에 더 나아가서 의미를 모르겠는 친구들의 말들이 짜증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 역시 이끌어냈다.


그냥 옛날부터 가까웠던 현성이였기에, 교실에서의 모든 이야기들이 호들갑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솔직히 마냥 동생같지는 않을 거 아냐? 가끔 오빠 같고 설레고 그런 적 있어 없어?>



"잘 모르겠는데~"


"뭘?"



은아의 혼잣말에 또 시선을 맞춰오는 현성. 은아는 그런 소꿉친구를 올려다보며 소소한 감상을 마음 속으로 읊어보았다.



'키는 엄청나게 크네...'



35cm라는 거대한 신장 차이가 있는 둘이었지만, 은아는 오늘에서야 그 신장 차이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현성이라는 오랜 소꿉친구를 사람 그 자체로 보았지, 다른 요소는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녀가 그를 바라본 눈길은 연상의 누나가 아닌, 외관에 걸맞는 순수함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간 알게 된다더라.."


"아니 저, 그.. 설명을 좀 해줘야 내가 뭘 맞장구라도 쳐줄 거 같은데요."



은아는 친구들 말마따나 현성과 남은 고교생활을 보내고,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을 이해하게 되리라 믿으며, 애써 번뇌를 치워두기로 결심했다.



이 감정을 이해하게 되는 건 조금 더 훗날, 다른 접근법으로 알게 될 은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