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한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들 남은것만 하고 들어가세요." 


"아,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딱 사무실에서 오갈법한 딱딱한 대화. 


원래는 팀장인 만큼 가장 늦게 퇴근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이 그 날인가요•••?" 


"아 맞다. 팀장님 유난히 빨리 퇴근하시는 날이 오늘이었지. 어디 모임이라도 다니시나 보지." 


"근데 늘 다음날은 휴가 내시지 않았나요? 혹시•••" 


"쉿, 그러다가 들린다. 마무리나 해." 


이미 다 들렸지만, 주변에서 작게 수근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짐을 챙겨서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덜컹덜컹덜컹•••. 


지하철을 타고 퇴근한다. 사람이 많아 앉지는 못한다.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것 있으신가요?" 


근처 편의점에 있던 캔맥주를 산다. 미리 좀 사둘걸. 


철컥-. 


문을 열고 귀가하고,


지글지글지글•••. 


아내가 좋아하던 김치찌개를 끓인다. 양은 조금만. 


드르륵-. 차락-!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다. 


딸칵-. 


불까지 끄고 나면, 준비는 다 끝났다. 


아 맞다, 술도 좀 마시고•••••. 


째깍, 째깍•••. 


시계를 바라본다.


시침이 7시에 다다랐을 때, 


휘이잉•••. 


미약하지만 이 좁은 집에선 날 일이 없는 바람소리와, 어김없이 늘 듣던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누구도 없던 집에서, 선명하게 울려퍼지는 소리. 


"오늘도, 오는 길에•••" 


"이미 다 샀어. 지금 살짝 취한거, 보이지?" 


"어라? 그러면 저번에 말한•••." 


"김치찌개도 다 끓였고, 커튼도 다 쳤어.. 빨리 와." 


"•••후후. 그렇게 급하게 보고싶었어? 이번엔 다 준비해왔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볼수 있잖아." 


그러자,


휘이이잉•••. 


바람 소리와 함께, 점점 환상은 뚜렷해진다. 


약간 더, 조금만 더, 점점 더 선명히•••.


본디 병실에 있어야 할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소용돌이치듯이 내 눈 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

*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술로 빚은 환상. 


이 현상은 9달 전쯤에 시작되었다. 


평범하게 일을 하던 도중


"자기야."


느닷없이 저녁 쯔음부터 환청이 들리며, 이 목소리는 나에게 몇 가지 요구를 시켰었다. 이미 1년도 더 전에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목소리로. 


당시 아내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겨우겨우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환청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음에도, 나는 왠지 모를 기대에 차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생각보다 요구는 별로 복잡할 것 없었다. 


1. 술을 마신다. 적당히 취할 정도로. 


2. 내 모습이 외부에 보이지 않게 문을 걸어잠그고, 커튼을 완전히 친다. 


3. 원하는 음식을 한다. 처음에는 아마 제육볶음. 


이 행동을 거치자, 놀랍게도 아내의 모습이 오늘처럼 두 눈 앞에 선명히 드러났었다. 


조금만 다가가도 닿을 것 같았었다. 그렇기에 나는 곧장 그녀를 만져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손길은 그대로 그녀를 투과했었다. 


"•••••." 


그 선명한 목소리와 형태는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었다. 


*

*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있어?" 


"아, 잠시•••." 


"이래뵈도 한 달 만인데, 부인에게 좀 더 신경써야지. 김치찌개는 왜이리 조금 끓였어?" 


"당신은 어차피 먹지도 못하면서." 


"자기는 많이 먹어야지. 원래 내 거도 다 먹었으면서." 


"푸흡•••." 


"됐어. 요즘은••• 뭐 재밌었던 일 없어? 그거라도 말해줘." 


"아 저번에는•••" 


딱히 재밌을 것도 없는 시시콜콜한 아저씨의 삶.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하나 반응해주며 웃음을 보였다. 대화 한 숟가락, 밥 한 숟가락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잠잘 시간이 되어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이제 슬슬•••" 


잠에 들려고 했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오늘도 안 재워줄 거야." 


"•••휴가 쓸게." 


아직은, 그녀를 두고 잠들 수 없었다. 


*

*


쏴아아아- 


나는 옷을 벗고 침대에 눕기 전 샤워를 했다. 그녀도 따라왔다. 


"어휴, 맨날 집 회사만 왔다갔다 하니까 뱃살이 늘지." 


그녀는 샤워 도중 내 배를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복수하듯이 나는 그녀의 가슴을 잡으려 했지만, 역시나 그대로 통과했다. 


"푸흡•••변태. 먼저 침대에 있을게. 빨리 와 여보." 


왠지 장난기가 점점 더 늘어나는 듯 하다. 


신혼 때 구매한 2인용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불을 덮어 주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 그냥 내가 덮었다. 


"다음 번에는 뭐 만들어 올까?" 


"음, 이번에는 마파두부? 매운거 최대한 많이 넣어서!" 


"나 매운거 못먹는거 알잖아." 


"자기 매운거 먹을때 늘 짓는 표정. 그게 보고싶어졌어."

"•••••알겠어." 


침대에 누워서도 딱히 대화는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질 수도 없지 않은가•••.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어느샌가 말이 끊겼다. 하지만 곧장 잠들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그 얘기가 나올 때 되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할때까지 가만히 누워 묵묵히 기다렸다.


"•••••아직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은 거야?" 


역시나, 오늘도 나왔다. 아마도 세 번째 만남부터였나. 그녀는 멀쩡히 대화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내게 죽음을 권유한다. 눈이 약간 붉어지며 어지러워 하는 채로. 그 이유라면•••그래야 자신과 더욱 오래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며 날 현혹한다. 


"하•••. 또 그 얘기야? 그럴거면 난 이만 잘게." 


"왜 항상 거절해? 역시 나중에•••다른 여자라도 만나려고 그러는거야? 전에는•••나밖에 없다면서." 


갑자기 돌변한 태도. 그럼에도 어색함은 조금씩, 아니 꽤 많이 묻어 나왔다. 반년 넘게 들었음에도, 이 씻을 수 없는 위화감은 대화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그저 묵묵히 버티기.


"내가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기억해주지도 않을 거잖아. 난 네게 그렇게 가벼운•••••." 


그녀는 갈수록 말이 거칠어진다. 


몇 달 전, 한 번은 크게 소리지르며 꾸짖은 적도 있었다. 물론 잘 통하여 그녀는 곧 조용해졌지만, 상처로 남았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환영은 사라졌다. 


저 말에 내가 반응하며 화내서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다. 어차피 다음 만남때는 저렇게 말한 건 기억 못하니까•••. 나는 그녀가 그저 잠시 악귀에 씌인 것이라 믿었다. 


"나를•••나를 따라와 줘. 나는 당신밖에•••" 


아무리 버텨 보려고 해도, 내 귀를 맴도는 저 말들은 가끔은 그녀를 따라 죽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원치 않을거라는 믿음으로, 버티곤 한다. 


그래도 반 년이나 이어져서 그런지 적응이 약간 되었다. 


그렇게 계속 저항하려 한 탓에, 어느덧 잠이 쏟아졌다. 몇 시간만에 드디어 잠이 찾아온 것이다. 


쿨쿨•••. 


꿈에서도 환청은 나를 지독히 괴롭혔기에, 편히 잘 수는 없었다. 


*

*


아무것도 없는 곳. 


한 여성만이 가만히 서서 어딘가를 향해 외친다. 


"•••••점점 제게 요구하는 것들이 늘어나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외침에 어디선가 나타난, 마치 천사같은 외형을 한 사람이 말했다.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세요. 어차피 그 사람이 죽어도 같이 할 수는 있는데. 뭐 둘 다 살아난다면 더 좋고요." 


그녀가 식물인간이 되고 얼마 후, 


그녀의 심상 속에선 한 천사가 나타났다. 그 겉모습과 다를 바 없이, 그가 내민 조건은 너무나 달콤했다. 


나는 그 때부터 1년동안 한달에 한 번, 그이와 만난다. 원래는 서로 하지 못할 대화를 하고, 얼마 뒤에 그 대가로 나는 그에게 나와 함께하기 위한 죽음을 권유한다. 그러나 1년 동안 버틴다면 내가 식물인간에서 깨어날 수 있다. 


둘 다 살거나, 혹은 아쉽지만 둘 다 죽거나.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나와 그이가 함께할 수 있다 생각했기에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상은 꽤나 많이 달랐다. 


나는 억지로 그이에게 죽음을 권유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그에게 주입하듯이 환청을 들려 주어야 했다.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의 욕심이 화를 불러온 것일까?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그 천사가 몸에 스며들어 더욱 심하게 말했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지만, 이 행동이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가 죽기로 결심해 그의 남은 인생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텅 빈 꿈들 사이에서 그를 떠올리며 외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빌며. 


*

*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도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환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해가 중천에 뜰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흐아아•••. 


"이래서 휴가를 안 낼 수가 없다니까•••."


점점 갈수록, 매 달 점점 심해진다. 앞으로 평생 이 환청에 시달릴 거란 걱정도 들었지만, 왠지 그는 싫지만은 않았다. 심해지는 환청에 발맞추어, 그녀 또한 점점 선명해졌으니.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언젠가는 손에 잡힐 날이, 머지않아 올 거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뜬금없이 떠오른 소재, 고작 한 시간동안 써내린거라 많이 미숙할거라 생각합니다. 열정적인 피드백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