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인간의 그물에 걸렸을 때? 무서운 남자들에게 붙잡혀 어느 건물로 끌려갔을 때? 머리를 뽑힐 때까지 잡아당기고, 비늘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예민한 지느러미를 찢어내며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까지 고문당했을 때?


사실 어찌 됐든 이제는 별 상관 없다. 이용할 가치가 없어져 새로운 인간에게 팔려진 내 목숨은 꺼져가는 촛불이나 다름없으니까. 다친 온몸이 너무 아파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다.


작은 수조가 어디선가 멈추고 검은 천이 걷히자, 내 눈 앞에는 넓은 방과 함꼐 아까 어렴풋이 봤던 젊은 인간 남자가 서 있었다. 인간 기준으로도 꽤 큰 키와 섬뜩하리만치 냉혹하고 잔인해 보이는 인상이다.

특히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괜찮아?"


차갑고 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었다. 상처투성이인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남자의 손에는 하얀색 상자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인어한테도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는데.. 조금만 참아."


그는 어디선가 물에 적신 천을 들고 와 아직도 피가 흐르는 꼬리를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천이 상처를 훑고 지나가는 통증으로 수조 벽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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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를 사들인 젊은 부자는 어렸을 때부터 인상이 험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아무리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을 바꿔도,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봐도, 잘생겼지만 무뚝뚝하고 냉혹하게까지 보이는 이목구비 때문에 친절한 성격에도 은근히 따돌림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남자는 나이가 들며 점점 차갑고 조용하게 변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표정에 변화라곤 없고, 대화하는 데는 지장 없지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얼떨결에 참여한 경매장에서 사온 이 인어는 가여우면서 낯선 존재였다. 인간 여자와 말을 섞어본 지도 제법 됐는데, 하물며 상처투성이에 잔뜩 위축되어 있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남자는 몰랐다.


당장 집에 인어를 위한 약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기에, 남자는 급한 대로 상처를 닦아내고 인간을 위한 약이라도 발라주기로 마음먹었다. 약이 없어도 이대로 가만히 놔두는 건 더욱 내키지 않았다.


상처를 만질 때마다 움찔거리면서도 더 이상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인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왔다. 수건을 빨아가며 상반신에 난 상처까지 모두 닦고, 약을 하나하나 발라주는 도중 인어가 먼저 말했다.


"왜 이러시는 거에요?"


다시 눈물을 흘려 제대로 된 진주를 만들 정도로 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고기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헛된 속설로 잡아먹히는 인어도 없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싼값에 팔린 자신이 식재료가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


건강해지면 바다로 돌려보낼 거라고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것 같았지만, 대답하지 않기도 뭣했던 남자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빠, 빨리 나아야 눈물을 흘리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표정한 얼굴, 제법 차가운 목소리와 나쁜 쪽으로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남자의 말은 인어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그녀는 고통도 잊어버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응급 처치를 마친 남자는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따뜻한 방에 든 수조를 떠났다. 당장 죽는 건 면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인어도 뒤늦게 쏟아지는 밀린 잠에 꾸벅꾸벅 졸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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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 마세요. 괜찮아요."

"너도 빨리 나아야지. 부탁이니까 먹어 줘."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남자가 구해 온 약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된 나는 복숭아 한 조각을 받아먹었다. 말캉한 조각을 목으로 넘긴 후에도 달달한 잔향이 오래도록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갇혀 있었을 때 제공된 것은 딱딱한 싸구려 빵과 내장 같은 생선 찌꺼기가 전부였다. 당연히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지만,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끔찍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남자가 차려 준 식단은 진수성찬에 가까웠다. 온갖 해산물과 더불어 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야채와 과일까지. 맛이야 참 좋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진주를 얻기 위해 빨리 나아야 한다고 쳐도 이렇게까지 잘 대해줄 필요가 있나? 필요없는 지출이 나갈수록 본인도 손해를 볼 텐데 말이다. 이따금 수조를 끌고 넓은 창가로 데려가 신선한 바깥 공기도 쐬어 주던 그였다.


"어제는 잘 먹더니. 혹시 맛없어?"

"그럴 리가요. 엄청 맛있어요."


'미안해서 그래요. 이렇게 돌봐주시면 진주만으론 갚을 수 없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꼬리 좀 보여줄래?"


맨 처음 왔을 때는 주방에서 손질되는 게 생의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정성어린 보살핌 덕에 심하게 다쳤던 꼬리는 벌써 본래의 모습을 절반 가량이나 되찾았다.


"참 예쁘다."

"네?"

"참 예쁘다고. 꼬리도, 눈도.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야."


언제 봐도 외모와는 영 딴판으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그날 밤, 여느 때처럼 홀로 남겨져 잠에 든 나는 꿈 속에서 낯이 익은 풍경을 마주했다. 양팔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스스로를 인지하자마자 두 번 다시는 잊지 못할 얼굴들이 나타났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에 시달려 왔지만, 오늘은 유독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얘리한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등에서 느껴졌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버티고 있을 즈음, 장갑 낀 손으로 미끄러운 꼬리를 억지로 붙잡은 사내가 길고 하늘하늘한 지느러미를 있는 힘껏 찢어버렸다. 


"싫어!!"


생살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아래쪽을 쳐다봤지만,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한 꼬리는 당연하게도 멀쩡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약한 조명이 켜지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악몽을 좀 꿔서."

"악몽?"


어느새 수조 옆에 앉아서 몸 상태를 확인하던 남자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듣던 그가 물갈퀴 달린 내 손을 꼭 잡았다.


"다시 파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안심해도 돼."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깨어나서 짜증날 법도 한데, 왜 일말의 화난 기색조차 없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거에요.."


이제는 충분히 나아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분명 빨리 나아야 진주를 얻을 수 있다고 했으면서, 왜 다른 이들처럼 몸을 걷어차고 비늘을 뽑고 머리를 잡아당기지 않나요. 

남자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바로 그때.


"아..."


남자의 양 팔이 내 몸에 둘러져 왔다. 인어와 비슷하게 따뜻한 체온과 낯선 옷의 감촉이 동시에 느껴졌다.


"미안해. 그때 괜한 말을 해서.."


아직도 나를 품에 살짝 안은 상태에서 남자가 말을 이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얼떨결에 한 번 내뱉은 뒤 다시는 진주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 몰랐다고.


"진주는 필요없으니까 괜한 생각 갖지 마. 억지로 안 울어도 돼.. 울 필요 없어."


울지 않아도 된다. 울지 않아도 된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자의든 타의든 울고 또 울어야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소용돌아치던 감정은 이내 한데 뒤섞여 눈가에서 떨어지는 상앗빛 구슬로 변했다.

남자의 따뜻한 품에 꼭 안긴 채, 나는 그렇게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슬픔이 아닌 무언가로 이루어진 진주알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하던 방 안을 채워나갔다.


한때 꺼져가던 생명의 촛불은 애정어린 보살핌이라는 장작더미 위에서 어느 때보다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응? 울지 마."


한 손으로 완전히 다 나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안겨 있던 나를 달래주었다.

울지 말라는 한 마디에 눈물은 되려 그칠 줄 모르고 나왔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주세요..."


품에 안겨 반짝이는 진주가 바닥에 가득 쌓일 때까지 울다 지쳐버리자, 나는 아직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깨어 있던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잠들었다. 


그날 후로 우리들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남자는 지루해할까 봐 옆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인간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몸이 거의 다 낫자 직접 안아올려 이전보다 훨씬 넓은 수조로 옮겨주기도 했다.


마침내 비늘도 지느러미도 말끔하게 나아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바다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휘황찬란한 보름달이 창가에 드리운 어느 밤, 나는 수조 위에 앉아 있던 인간, 생명의 은인이자 첫사랑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 부풀어 오른 배 안에는 사랑의 결실이 자라나는 중이었다.

 

"내게 새 삶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나도.. 무서워하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워."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아 얽히며 초콜릿 같은 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에 올린 글 수정해서 써도 된다길레 추하게 재업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