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쟁이 끝이 났다.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쉽게 앗아가고, 많은 것들을 잃었다.
사람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씩 바뀌어나가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지 못 한 이들에 대한 차별.
사소한 것에서부터 퍼진 싸움.

이런 것들을 자제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이 남자 덕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 리카. 기다려보라고..내가 팔이 하나 밖에 없어도 사과 깎는 법 정도야 할 줄 아ㄴ"

푸슛, 날카로운 날에 손이 베이자 당황하며 병실을 뛰어다니던 남자.

마법도 쓰지 못 하던 낙제생이자,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된 남자, 렌 아스트레우스.

"..바보. 팔도 없는게 어떻게 사과를 깎아주려고."


"자, 잠깐. 할 수 있다니까. 봐! 여기 이 정도 깎았으면 잘 한거 아냐?!"

한 손으로 사과와 칼을 들고 깎아내려 했던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고작 해봤자 아주 쪼만하게 깎인 것을 보여주었다.


"..하아. 너한테 맡긴게 잘못 된거였어. 그냥 오빠한테 맡길걸."

"뭣. 내가 그 녀석보다 못 깎는다는거야?!"

"당연하지. 너, 팔도 하나 없어졌고. 손바닥도 살을 제대로 붙이지 못 한 상태로 싸우고 다녔다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잖아."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거야?"

리카는 손가락으로 렌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완전히 벗겨져버린 손바닥의 피부를 엉성하게 꿰매서 이어붙인듯한 흔적. 닿기만 해도 속살과 피부가 맞닿아 쓰라릴 것만 같았다.

"...이익. 할 수 있다니까."

다시 하려 하지만, 잘 되지도 않는 것에 열이 오른 렌은 깎다 만 사과를 그대로 리카에게 넘겼다.

"자. 이 정도면 이 몸의 최후의 완성품이시다."

리카는 제대로 깎아내지도 못 한 주제에, 뭐가 완성품인걸까..싶었다.

"..최후? 아, 너...여행을 떠난다 그랬었지?"

리카는 받은 사과를 한입 베어물면서 답했다.

"뭐어, 그렇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차별이나 해대는 놈들이 있으니까. 한대 쥐어박으면 될거 같아서 여행 좀 다녀오려고."


".........."

평소대로의 너였다.

학원을 입학 해서 모든걸 엉망으로 만들던 사고뭉치의 얼굴이었다.

모든 사건 속에서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온 모습은 안심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다.
네가 떠난다는 건, 분명 나쁜 쪽은 아닐테지만..
이상하게 옛 일들이 떠올랐다.

언제 죽일지도 모르지만, 모두를 위해 꺾이지 않던 너가 죽을 위기를 셀 수 없이 겪고 다녔다는 것을.


"...뭐! 분명 괜찮을거야. 난 옛날처럼 무모하지도 않고, 무리 하지 않을테니까."

렌은 그런 리카의 속마음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왔었던 모든 일들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숨겨왔던 리카였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곁에서 지켜왔던 그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속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안전하게 다녀올게."


"......진짜?"

"물-론. 진짜ㅈ"


"근데 역시 너는, 믿음직스럽지 못해. 항상 그렇게 얘기 해놓고도 계속 죽을 위기에 놓였고, 항상 무리했다가 사지가 멀쩡한 날이 없기도 했고, 좋은 말만 늘어놔도 본인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죄책감은 견디지도 못 하면서 매번 그렇게 내가 안도 할 수 있는 말만 했다가 죽어버리고 날 만나러 오지도 않을거지?"

엄청난 팩트 폭격이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렌은 그 한마디 한마디에 짓눌렸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ㅇ...언젠간 만나러 갈거라니까..."


"제대로 말 해. 꼭 만나러 오겠다고."


"..너도 참.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나 이래뵈도 세상을 2번이나 구했다?!"

"잘났다. 잘났어. 그래서 죽을 뻔 했어?"

"그, 그건 장난 친거잖아. 나 죽는 척 연기 했을 때! 너 엄청 울었던거 기억 안 나?!"

".......모, 모르겠는데."


"장난하냐!!"

"..윽. 후우우...뭐, 됐다. 슬슬 가봐야지."

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쭈욱- 펴 등을 돌렸다.

"안부 메세지는 종종 보낼거니까, 너무 걱정은 마."


"...응. 알았어."

리카는 렌의 뒷모습에 어딘가 아쉬워 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 참. 잊은게 있지."

무언가 잊은건지, 렌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리카에게로 다가왔다.

"..뭐 잊은거라도 있-..."


쪽, 하는 소리가 리카와 렌 단 둘이 있는 병실에 작게 울렸다.

길게도 아니지만, 짧게 입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딱, 한번의 입맞춤이었다.

그 한번에 꽤 긴 시간의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렌이었다.

"...생일 선물. 이틀 뒤면 생일이잖아? 미리 주려고."

"ㅁ, ㅁㅁ뭐! 난 첫키스고, 너도 첫키스고. 우리 둘 다 첫키스니 이거나저거나어찌됐든뭐든좋은생일선물이니까기억에담아두지 말락고!"

스스로의 첫키스. 지금을 위해. 너를 위해 아껴온 선물을 네게 선사했단 기분에 차오르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 하고 병실 밖을 나섰다.

"ㄱ,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쿵- 하고 문이 세차게 닫혀버렸다.
그 뒤론, 급하게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첫키스였다. 널 위해. 너만을 위해, 아껴두던 것이었는데.

자신이 먼저 하고 싶었지만, 네가 먼저 해버렸다.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기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하지만...아직, 만족하지 못 했다. 더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떠난지 얼마 안 됐지만, 네 얼굴이 다시 보고싶어졌다.


리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던 순간...


"하나 더 잊었다-!!!"

그 슬픔을 깨버린 것 또한, 렌이었다.


다시 잊은 것이 있었는지, 급하게 뛰어온 듯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렌은 벽에 기대며 숨을 천천히 고르며 입을 열었다.

"나, 꼭 안전하게 다녀올테니까!"

"그러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 줘!"

너를 위한 약속.

"이번이 첫키스니까..돌아오면, 얼마든지 해줄테니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
약속은 반드시 지켜왔다.





'이번 싸움은 꼭 이겨. 너랑 약속 했으니까.'

'저 녀석이 울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약속 했으니까.

'아버지를 되돌려달라는 약속,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으니까!!!'

'쓰러질까보냐. 돌아가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안 죽어. 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가 약속 했으니까.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주겠단 약속.'

'내가 지킬거니까.'


..항상 그래왔다.

둘의 사이에서의 약속은 꼭 지켜져왔다.

그렇다면, 믿을 수 밖에 없다.



"응, 다녀와."

그 대답에, 서로가 미소 지었다.

언젠간 이룰, 둘의 약속을 지키는 날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