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순 대회 글 쓰다 터져서 써놨던 거 올림


캐릭터는 라스트오리진 히루메(무녀, 여우)

달달하진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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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사에도 가을이 왔다.

그간 지나온 해를 세어보니,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싶구나.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 속

그대가 없는 수십 째의 가을이구나.

   

이곳은 오래 전부터 단풍이 예쁘기로 유명한 곳이다.

신사를 찾는 이들에게 험한 산세와 가파른 길은 친절하진 않다만,

이윽고 길의 끝에 도달해 기쁨이 짙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첩은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

   

빨강과 노랑, 주황빛 섞인 낙엽을 밟으며 신사를 도는 이들에게 물을 내어주고,

허기진 이들에게 요깃거리를 나누며 값으로 신사 밖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과 더 가까워지면 가슴 속 응어리 진 것들을 첩과 함께 풀어 헤치기도 하며,

웃고 울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가도 어른의 모습에 걸맞게 무거운 생의 걱정을 함께 짊어지기도 한다.

   

신은 모든 생명의 평안을 바라시니, 첩은 무녀로서 그 뜻을 충실히 따라야겠지.

이전처럼 떠들썩하진 않지만 이런 삶의 모양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걸 보니,

운이 좋게도 첩의 이 모습도 적성에 꽤 맞는 것 같다.

   

그러니 혹시 걱정하고 있다면 넣어 두거라.

세상과 떨어지기로 결정했음에도, 첩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인간들과 연결되어 살고 있다.

   

그대는 자유롭게 살고 있느냐.

세상의 한 가운데서 온 계절의 다른 해를 맞으며,

세상의 모든 것에게 사랑받으며 살고 있느냐.

   

신사를 찾은 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새삼스레 그대의 존재가 커다랗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곳에 오는 바이오로이드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세상의 주인’이라며 경외한다.

당신을 부르는 그 호칭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꽤 애를 먹는다.

처음 보는 객들 앞에서 경박스럽게 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다면 마치 첩이 그들을 비웃는 꼴이지 않느냐.

   

첩이 아는 그대는 객들이 상상하는 그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말이지.

   

그대는 첩의 꼬리나 귀 따위를 쓰다듬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파렴치한이고,

첩으로도 모자라 다른 이들에게 마수를 뻗었던 욕망의 화신이었지.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진지하게, 신께 이 불경한 자의 처분을 빌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여간 그대는 지금도 첩을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이 세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으로서 바꿔놓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사랑받는 단 한 명의 인간.

그야말로 세상을 다시 창조한 인간이니까.

   

구 문명의 잔재인 애치슨 법.

바이오로이드의 뇌리에 각인된 기반의식을 없앤 이후부터,

우리 바이오로이드에게 그대는 그야말로 우리의 주인이자 신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대는 그 말을 한사코 거부했지만 말이지.

   

그러나 그대는 우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생명만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기억할 수 있는 삶을 주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또 그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그대도 잘 알지 않느냐.

   

그리 대단한 일을 해냈다면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대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있느니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우리들을 진정으로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당신이 바꾼 세상을 사는 인간. 첩과 같은 몸을 한, 바이오로이드와 함께.

첩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머릿속에 펼쳐놓고서.

   

그래. 말도 안 되는.

   

신사에 닿는 객들의 무리 중에 그대의 모습이 보이길 바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 말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에 대한 마음도, 그리움도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첩은 시간의 바깥에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대. 그날을 기억하느냐.

   

아, 그날은 언제 떠올려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대는 얄미울 정도로 눈치가 좋으니까.

말을 돌려 해도 척 하고 잘 알아들었으면 한다. 

   

흠흠. 무어라 하면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구나.

   

제멋대로 정한 몇 생을 거듭한 약속의 날.

서늘한 공중정원 위에서 초조하던 그 기다림과

그대가 보였을 때 다시 터질 듯 뛰던 마음.

하늘을 걷는 듯 황홀했던 짧은 산책.

극락을 그대로 옮겨온 듯 아름답던 풍경과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

나의 마음. 나의 사랑.

우주의 무한한 빛들을 다 셀 때까지 머금고 싶었던 당신의 온기와

그대에게 곱게 보이고 싶어 마련한 예복의 비단처럼

덧없이 지나는 유한한 시간을 엮어

무한히 곁에 두고싶던 밤.

   

밤이 되면 첩은 늘 그날이 떠오른다.

   

처음 자각한 연모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그대는 모르겠지.

오르카 호에 돌아올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구름 위를 허우적거리며, 어디 둬야할지 모르는 시선은 오로지 그대에게 둔 채.

분홍 파랑 노랑 자줏빛 풍경을 그대의 손에 의지해 날던 기억뿐이다.

   

첩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의미를 알 수 없구나.

그래도 첩은 그 기억으로 살고 있다.

알 수 없어도 괜찮다. 그 안에 그대의 얼굴이 있고, 그대의 마음이 있다.

잠시 이어졌던 그대의 따뜻함이 있다.

잠시나마 첩을 사랑이라 말했던…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그대의 웃음이 있다.

   

살살 바닥을 훑는 바람에도 낙엽은 바스라지는구나.

약하기도 하지. 공들여 피어난 푸르름일 텐데.

부질없이 금세 색이 바라고 형체를 잃는구나.

   

이럴 때면 뻗어갈 곳 개의치 않고 커지는 내 망상이 마냥 야속하기만 하다.

그날의 찬 공기와 당신의 온기도,

지금에는 기다란 생의 짧았을 뿐인 그 행복도 부질없다 싶어서.

아직 바람은 시릴 정도로 차지도 않은데.

찾는 이 아무도 없는 새벽에도 종종 잠자리의 방문을 모두 닫고 눈물을 흘린다.

   

그날로 머지않은 날, 신의 목소리가 다시 내려왔고

나는 간절한 소원 하나를 빌었다.

   

어느 날 당신이 주었고 당신을 위해 살았던 삶.

언제든 다시 앗아가도 좋으니 단 한 명.

첩이 사랑하는 이, 그대가 당신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게 해달라고.

첩이 두 번 다시 연인의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좋으니.

첩의 보잘것없는 이번 생, 오롯이 바칠 터이니 그대의 삶을 지켜봐 달라고.

   

첩의 목소리에 바람 한 점 없을 침실 속 방울이 소리를 내었을 때,

첩은 울고 싶었다.


감격이 낳은 벅참은 아니었다.

늙어 스러질 수도 없는 몸. 영겁의 시간을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버텨야 할 걱정으로.

그대 없이 살 수 없는 몸. 이윽고 들린 신의 목소리는 떠나야 한다 다그쳤으므로.


그대의 생에서 지워지는 건 내일. 그대를 약조한 날은 언젠가.

날은 정해졌고, 생을 거듭해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눈에 밟혔다.

슬퍼할 시간은 없었지. 첩은 쫓기듯 이별을 준비했다.

그 준비가 평생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빈 몸으로 온 세상이니 몸만 무거워질 뿐인 짐은 두기로 하고

심해의 두근거림만이 들리는 새벽, 첩은 오르카 호 곳곳을 돌아다녔다.

다신 꺼내지 않을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두고 떠올리고 싶었다.

듣기에 뻔뻔한 수식이지만, 그래.

첩은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곳이 그대와 첩의 세계였으니.

   

첩의 부재는 그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침 해를 받으며 깬 그대가 처음 연 입은 첩의 이름을 소리 냈을까.

처음 그대가 발길을 옮겨 닿은 곳이 첩의 공간일까.

그리고 그대가 처음으로 느낀 이별은…. 그대를 어떻게 살게 했을까.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듯, 첩이 떠난 가을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그대는 다시, 다른 사랑을 하고 있을까.

   

이럴 때면 신을 섬기는 무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느낀다.

복잡하지. 번민이기도 하고.

그대의 사랑을 받을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하고,

못나고 속 좁은 첩의 심술이기도 하다.

   

부정은 않으마.

첩에게 그대는 바꿀 수 없는 처음이고, 바뀌지 않을 마지막이니까.

거친 손길로 바꾸고 정리하고, 옮기고 지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대에 대한 인간의 연심이니까.

심술궂게 보여도 부디 용서해주길 바라마.

   

그대 생각을 하다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밤이 깊었다.

보름에서 조금 모자란 달이 창문으로 잦아든다.

온기가 고픈 나무들이 여위어가는 게, 이제 가을도 이별할 준비를 하는가.

그럴 수 없는데

가슴 한가운데에 피가 모이고 퍼질 때마다 온몸이 아리다.

   

괜스레 또 그대가 생각나 장을 열어 그날의 옷을 다시 본다.

좋은 비단으로 엮었어도 세월은 어쩔 수 없는지

색도 이음새도 삭고 바래 보기에 영 볼품이 없어도 웃음이 나온다.

첩에게 남은 건 이 옷과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대가 있는 기억 뿐.

   

수도 없이 뜯어 헐거워진 마룻바닥을 다시 들췄다.

그 아래는 그대와 계절을 엮은 기록들이 있다.

그대를 옮겨 적으려 마련한 오래 전 쓰인 종잇더미와 옷더미를 숨긴다.

첩 나름대로의 맹세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르디 무른 첩은,

언제까지고 하릴없이 망상으로 밤을 낭비할 것 같아.

   

그래, 이제 그대를 떠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한참 눈물을 쏟는 것이.

가을풀 바스라지는 소리에 나의 한탄이 섞이는 게.

건조한 바람 드나드는 나의 방에 물내음이 베이는 것을, 이제는 견딜 수 없다.

낙엽더미에 아무리 비를 쏟아도 초록빛으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대의 삶에 양분이라도 되어 그대의 새 인연을 응원하는 역할이라면 그것도 좋겠다.

   

이 그리움처럼, 망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릴 수 있다면.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면.

첩의 망상이 이뤄질 수 있다면.

   

첩의 사랑은 그것이면 된다.

그 정도면 그리움에 평생을 허우적대도

첩은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