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사줄게-

 

"클럽은 어떠셨나요?"

 

멀리서 온 셋은 클럽에서 자고 가기로, 가까이 사는 로리미엘은 밤이 늦기 전에 자리를 떴다. 간소한 저녁을 미리 만들어두었던 멜레피슈가 외투와 모자를 받아준다.

 

"그...사과할 일이 있는데"

"네?"

"얘기하다보니까 너무 흥분해서, 너랑...좀 쓸데없는 얘기까지 해버린 것 같아서"

 

류디트가 얘기했던 대로 클럽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재능을 갖고있는 듯 했다.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로리미엘은 행여나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알려지는것이 그녀를 곤란하게 할까 걱정하는 눈치다. 멜레피슈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류디트가 그렇게까지 보증을 해주는데 로리미엘을 다그칠 수는 없었다.

 

"괜찮을거에요. 다들 귀한 몸인데 입 간수는 하겠죠"

"그렇겠지?"

"그리고..."

 

류디트가 말했던 대로 완전한 비밀은 없었다. 숨기려면 류디트에게도 숨기고 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맞았다. 세상에 서로 말고 아무것도 속박할 수 없는 그들이 이 곳에 남아있다는 건, 마음속 어딘가에 자신들의 관계를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각오는 해야만했다.

 

"누가 알아도 주인님이 잘못한 건 없으니까요"

 

12살이나 어린 남자와 몸을 섞었으니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로리미엘에겐 죄가 없었다. 죄책감을 나누자면 자신쪽이 9할을 지고싶어했던 멜레피슈는 그렇게 로리미엘을 안심시킨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디키너도 디올리제도 퀴스띠브도 보잘것 없는 자신을 폄하하기 위해 자신과 멜레피슈의 이야기를 떠벌릴 사람들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과거와 멜레피슈의 관계 그리고 현재까지의 모든 일을 들으며 눈을 밝혔다. 디키너는 마지막엔 아가씨임에도 자신의 손을 감싸쥐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서로를 사랑하라고, 그리고 그 결실을 자신들에게 보여달라고 말했다. 자신들도 그런 인연과 사랑을 맛보고 싶다며 위로해주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과 멜레피슈를 힘들게할까 걱정하고 고민하던건 자신이었다. 한꺼풀씩 보이는 자신과 멜레피슈처럼 서로 사랑했던 뤼비올라와 세리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말을 들으며 느낀 공포심에 먹힌 건 자신이었다. 설령 그 이야기가 거짓이어도, 그럴싸한 반응과 내용들이었다. 사회의 시선은 거짓과는 상관 없었으니까.

디키너와 디올리제의 표정은 사회의 시선과는 조금 달랐다. 넓은 장소가 아니어서? 그녀가 감성이 풋풋한 아가씨들이어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고있을 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산 속 깊은 집에 숨어있던 자신들의 모습을 조금이지만 드러내어도 냉소를 보내지 않았으니까.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봐놓고도 집에 돌아오곤 그녀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쩐지 멜레피슈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조금 부끄러워진다.

 

"다른 사람을 믿는 것도 공부가 필요한건가"

 

침대에 누운 로리미엘은 오늘 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으면서도 왜 그들을 의심하게 되는 걸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투른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줬던 그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은 자신의 마음이 좁게만 느껴진다.

나쁜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회가 마냥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겐 죄가 없다. 멜레피슈에겐 죄가 없다. 그렇지만 사회의 규범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당당해지고 사랑에 떳떳하자는 당연한 말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해가 늦게 뜨는 계절, 주인이 일어날까 초와 램프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볼 정도의 밝기만 만든 멜레피슈가 아침 청소를 시작한다. 창 밖은 아직 어둡기만하다.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2층 복도를 닦던 와중 침실의 인기척을 느낀다.

 

"조금 더 주무세요"

"잘 잤어?"

 

양 눈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방문을 연 로리미엘이 멜레피슈에게 안긴다. 평소의 에이프런과는 다른 뻣뻣하고 질긴 촉감에도 얼굴을 부벼댄다. 볼이 조금 얼얼해진다.

 

"이 옷은 지저분해요"

"그럼 새로 사자"

 

답지않게 단순한 사고 방식, 평소라면 좀 지저분해도 상관없다거나 볼이라도 씻겨달라며 애교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을텐데, 귀족들이랑 어울린 탓일까 대뜸 새로 사준다는 이야기부터 해버린다.

 

"작업복인데요 뭘, 다시 사주셔도 금방 더러워져요"

"아니, 꼭 작업복이 아니어도...뭐라해야하나..."

 

멜레피슈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한참 부비던 로리미엘이 얼굴을 올려다본다. 이미 잠은 다 깬 듯, 램프의 불빛 너머로 평소의 올리브색 눈이 생기를 가져간다.

 

"뭐라도 사주고싶어"

 

로리미엘은 멜레피슈가 필요한 것이라면 대부분 구해주었다. 멜레피슈가 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청소도구나 가사도구, 가끔 책이나 잡지 같은 소일거리 물품 밖에는 없었으니 사주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멜레피슈는 로리미엘의 호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와 다르게 호의를 표시하는 그의 속마음을 듣고싶었을 뿐이었다.

 

"뭐라해야하나...널 기쁘게 해주고싶어"

"전 지금도 충분히 기뻐요"

"그건 고맙지만...뭐라해야하나, 뭘 사줘야 더 기뻐하고, 뭘 해야 더 좋아할지 알고싶어"

 

자신마저 공부하려하는 로리미엘의 모습에 멜레피슈는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주인의 명령인데 거절할 수도 없었으니만큼,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면, 저 사고싶은 게 있습니다"

"사고싶은게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거야?"

"주인님이 선물해줄 때 까지 기다린거라면요?"

 

멜레피슈는 자신을 놀리려는 주인을 도리어 놀려먹는다. 로리미엘은 가끔씩 멜레피슈에게 선물을 사주곤 했었다. 아직 선반에 병째로 남아있는 바다소금도 그가 자신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한 물건이지않았는가.

 

"역시 내 기분대로 선물하는 건 그 사람을 만족 못시키는걸까?"

"기다린거란 말, 농담인 거 아시죠?"

"그렇지만, 너한테 뭘 사줄 때...뭐라해야하나, 그냥 내 기분대로만 산 것 같단 말이지. 네가 얼마나 좋아할지는 생각 안하고 이런거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밤 사이에 무슨 고민이라도 한 걸까. 로리미엘은 고민과 생각이 얼굴과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멜레피슈는 고민까진 캐묻지 않는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고민의 내용까지 파고드는 건 어른에게 어울리는 대응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선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응?"

"사랑하는 사람이 전해주는 물건이잖아요? 물론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물건을 전해주는 게 좋겠지만..."

 

밖보다 촛불이 밝은 로맨틱한 상황에도 올려둔 램프의 열 때문일까, 볼이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스스로도 쑥스러운지 손톱으로 눈썹을 긁으며 괜한 사족을 덧붙인다.

 

"그래서? 갖고싶은 건 뭐야?"

 

멜레피슈의 말에 표정이 밝아진 로리미엘이 그의 품에서 떨어지며 청소도구들을 쥐어본다.

 

"이런 걸 선물로 사는 건 좀 그렇지?"

"비슷한 거에요"

"뭔데? 솔직히 좀 궁금하거든"

 

멜레피슈가 갖고 싶은 것, 사랑이라는 감정과 호기심이라는 감정 모두가 그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보석류? 아니면 해외의 물건? 유명한 디저트? 아가씨들이라면 좋아할 것 같은 물건들을 머릿속에서 나열해본다. 피아넬라가 보낸 카탈로그 속 화려한 이국의 복식과 장신구, 품에 넣을 수 있는 시계와 시계줄 등 여러 물건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혹시 내꺼 살 생각은 하지마"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그러면...옷 같은 거 갖고 싶은데요?"

"외출복?"

"아뇨, 메이드복이요. 제일 오래 입고다니는 옷이니까요"

 

마음같아선 외출복을 맞춰주고싶은데 저렇게 말하니 외출복을 권유하기도 영 껄끄러워진다. 지금 안사더라도 언젠가 살 기회가 있겠거니 하며 넘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뭔데?"

 

망설이는 듯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멜레피슈는 두 가지 상황을 추측해본다. 자신에게도 부탁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운 것, 혹은 부탁하고싶지 않은데 부탁해야하만 하는 껄그러운 것. 둘 모두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으니만큼 도울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었다.

 

"편지를 한 통 써주실 수 있으신가요?"

"편지? 누구한테? 상관은 없지만 멜리도 편지정도는 쓸 수 있잖아"

"주인님이 아니면 아마 통하지 않을 이야기라 그래요"

"누군데? 궁금하네"

 

로리미엘 자신도 귀족의 신분이니 뭐니 거의 없는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편지를 쓴다 해도 상대가 될 고위층은 아마 장난으로 쓴 편지인 줄 알 것이 분명했다. 꼭 달성해야 할 목표라면 자신보단 류디트에게 부탁하는 것이 나았다. 물론 류디트에게 부탁하려면 자신을 거쳐야겠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이 글을 직접 쓰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양복을 맞추려고 치수를 재러 간 날에, 주인님이 시착하러 들어갔잖아요? 그때 어떤 신사 한 분이랑 이야기를 나눴어요. 베시올 역 남부의 케니시메이어 호텔에 거주한다고 하시는데...신분도 높고 격식도 꽤 있는 분 같아서 제가 편지를 써봐야..."

"내가 써도 무시하지 않을까? 난 말만 귀족이지 나 같은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잖아"

"그 분이 주인님을 한 번 뵙고싶다고 했어요. 나이도 어린데 에파블레에서 맞춤복을 입는 다는 게 마음에 드셨나봐요. 그 분도 에파블레 맞춤복이 정말 좋다고 하기도 했고..."

"뭐야 나한테도 알려주지"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데? 설마 나 말고 딴 남자 만나려는거야?"

 

이제는 저런 농담을 던지면서도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없다. 당당하면서도 능글맞은 웃음, 멜레피슈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걸 알고있기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멜레피슈도 그 남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연분홍으로 물들일 남자는 딱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드탱 뤼비올라라고 하시더라구요"

"드탱? 아"

 

머릿속을 한참 뒤지던 로리미엘은 짧은 단말마와 함께 그 이름을 들었던 날을 떠올린다. 멜레피슈가 사라지기 전, 계단에 걸터앉아 듣게 되었던 세리와 멜레피슈의 대화 속 남자. 세리가 사랑했다고 말한 남자. 멜레피슈와 자신의 관계가 노출되는 걸 꺼리게 만든 인물의 이름이었다.

 

"뵈러 갈 수 밖에 없겠네"

 

세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과 멜레피슈의 관계에도 무언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친구가 될지도 몰랐고, 짧은 인연이었던 세리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그리고 그 세리와 그를 다시 이어주게 될 지도 몰랐다. 꼭 긍정적으로 흘러가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최소한 부딪혀 볼 가치는 있었다.

 

"세리 보고싶다"

"저두요"

 

세리, 스치듯 찾아오곤 자신의 마음에 가시를 하나 심어놓고 떠난 여자. 그 여자애가 행복해진다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메이드복은 수수해야 맛이지. 특히 빅토리안 정통 메이드라면

팔러메이드는 옷에 프릴도 넣고 캡도 이쁜거 위주로 고르고 했다곤 하더라. 하우스메이드야 이뻐봐야 쓸데없었으니


댓글은 섹스


그러고보니 여기 GL물도 받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