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당장 정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 말이 끝나자, 악마는 웃으며 되물었다.

 

“응?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더 파고들면 내가 피곤할 게 분명하니, 그냥 넘어가자.

 

“세부사항이라니,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악마는 갑자기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 일단 세부사항은 내일 정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자, 슬슬 피곤하네.”

 

제멋대로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악마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답도 들은 이상 쉬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자, 그러면 앞으로 네가 지낼 방을 소개해줄게.”

 

악마는 말을 마치자마자, 생각을 정리하던 나를 방문 앞으로 끌고 갔다.

 

방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책장이었다.

 

책으로 빼곡히 가득 차 있는 책장들, 하나같이 책들은 사랑과 연관이 있었다.

 

그런 책장 외에는 침대와 책상뿐, 생각보다 단출한 방이었다.

 

“이게 제가 앞으로 지낼 방인가요?”

 

악마는 웃으며 내 말을 정정했다.

 

“음, 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지낼 방이야.”

 

그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악마를 빤히 쳐다봤고, 그런 시선을 받은 악마는 오히려 더 환하게 웃었다.

 

“원래 사랑하면 같이 자고 그런 거 아니겠어?”

 

나는 간신히 제정신을 찾은 뒤 그런 악마에게 반론했다.

 

“아니, 분명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궁금할 뿐이라면서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악마는 맞장구쳤다.

 

“응, 그렇지, 나는 사랑이 궁금했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거지.”

 

나는 설득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악마를 설득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상대인데 바로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은 이르지 않나요?”

 

악마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조롱했다.

 

“그러면 계약 파기하던가?”

 

나는 한숨을 쉰 뒤, 다시 방을 둘러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하고, 악마에게 다시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같은 침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죠?”

 

악마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고서는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인간이면서도 한 번도 연애 해보지 않은 것처럼 말하네.”

 

나는 순간 발끈해서 악마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러는 당신은 나이도 많으면서, 왜 사랑이 궁금하다고 말하는 건데요, 연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듯이.”

 

그러자 악마는 제법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아니면 말싸움에서 지기 싫었던 것인지 바로 반박했다.

 

“하, 악마는 인간들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다니까, 있었으면 벌써 청혼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겠지.”

 

나는 그런 악마의 말을 비웃으며 주변의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꼭 사랑을 책으로 배운 사람이 그렇게 말하죠.”

 

내 말에 열이 끝까지 받았는지 악마는 지지 않고 말을 꺼냈다.

 

“그러는 너는 사랑받는 것조차 사치인 삶을 살았다며, 참 잘 살았네.”

 

그렇게 악마와 나는 승자 없는 말싸움을 하였고, 먼저 화가 난 악마는 방 밖으로 나갔다.

 

말다툼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검은 배경 속에서 내 과거들이 마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 삶을 다시 보여준다는 듯이 한 장면, 한 장면씩 천천히 흘러갔다.

 

하나같이 다 슬프고 좋지 않은 기억밖에 없어,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씨발.”

 

꿈에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꿈에서나마 내가 이루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고 싶었는데.

 

사실 내가 사랑받고 싶다는 소원을 빈 것은 일종의 체념이었다.

 

악마는 정확하게 봤었다, 나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나마 가능한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고,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소원은….

 

그 순간 잠에서 깬 나는 아직도 꿈인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악마는 화났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잔뜩 표정을 굳히고 차갑게 말했다.

 

“방금 전 한 말은 뭐야?”

 

나는 내가 일어나자마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봤다.


“뭐라고요?”

 

악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말해줬다.

 

“씨발이니 뭐니 했던 잠꼬대, 무슨 의미냐고.”

 

나는 이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대충 둘러댔다.

 

“감탄사 같은 거에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악마는 이윽고 종이 한 장을 내게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