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만나 볼 생각은 있으시구요?-

"와, 방이 좋네요"

"조용해서 좋거든요"

 

호텔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은 호텔방이 아니라 대저택의 응접실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밖은 흐린데도 안은 환한데다 무채색의 하늘과는 달리 온화한 나무색감이 차분한 마음을 만들어주었다. 뤼비올라의 손짓에 따라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인다. 집 안의 딱딱한 나무의자와는 천지차이다. 식탁 앞에 이런 걸 두면 이상하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멜레피슈에게 모자를 건넨다.

 

"열 셋이라고 하셨나요?"

"네"

"어린데도 옷에 관심이 많으신가보네요"

 

뤼비올라는 레인지에 물을 끓인다.

 

"관심이 많다기보단 챙길 때 제대로 챙기자 하는 주의여서요"

"외국에서 오셨나요?"

 

로리미엘을 처음 본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였다. 우유에 초콜릿을 탄 것 같은 부드러운 갈색 피부를 보면 누구나 외국인으로 생각할 만했다.

 

"아뇨, 할아버지가 외국에서 왔고 저는 그냥 피부색만 이래요. 형이나 누나는 저 만큼 진하진 않았어요"

 

어릴적, 그의 형과 누나는 조금 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처럼 척 봐도 외국인인가 싶은 정도의 피부색은 아니었다. 그에비해 로리미엘은 누가봐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피부색을 타고났다. 로리미엘의 이야기를 듣던 뤼비올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전자에 물을 옮겨담는다.

 

"사용인이 있으시던데 끓여달라하면 되지 않나요?"

"취미삼아서 하는거라 말이죠. 커피 좋아하세요?"

 

커피, 쓴 음료는 아직 어려운 로리미엘은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허브밭에 사는 만큼 허브티엔 꽤 조예가 깊었지만 커피는 맛도 모르고 향도 모르는 초짜였다. 뤼비올라가 등을 돌린 틈을 타 멜레피슈를 슬쩍 바라본다. 손을 꼭 모으곤 자기 옆에 서있던 멜레피슈는 고개를 빠르게 젓는다.

 

"네, 주시면 감사히..."

"우유나 설탕은요?"

"어...많이 주세요"

 

뤼비올라는 속으로 커피는 못마시는 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 쪽분은..."

"멜레피슈입니다"

"멜레피슈씨도 한 잔 드시겠어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보통 사용인에게는 당연히 별 다른 대접을 하진 않지만 로리미엘보다 먼저 안면을 트기도 했고, 어차피 저택도 아니니 그냥 남녀 커플 손님 정도로 생각해버린다. 둥근 머그잔에 자기 피부보다도 연한 커피를 받은 로리미엘은 멜레피슈와 뤼비올라처럼 괜히 향을 들이마셔본다. 허브티의 새초롬한 향과는 다르지만 묵직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멜레피슈와 뤼비올라는 자기 잔의 반 만한 컵에 담긴 커피의 향을 즐긴다. 두 사람을 슬쩍 바라보다 커피를 마신다. 티를 안내려 애써도 혀 끝에 남는 아린 쓴맛에 얼굴이 찡그려진다. 멜레피슈와 뤼비올라는 아직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로리미엘을 보며 귀여운 듯 웃음짓는다.

 

"허브잎을 좀 가져올 걸 그랬네요"

"허브티도 나쁘지 않죠"

 

사실 허브티보단 커피가 주류였다. 허브는 재배량도 적고 차를 달이는 것 말고도 쓸 방법이 많은데다 한 번 달일 때 들이는 양도 커피보다 많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허브에 둘러쌓인 로리미엘은 허브티가 훨씬 익숙했다. 오히려 커피 한 잔 제대로 마시지 않을 정도로 차를 선호했다.

 

"지팡이로 공격하는 것도 무술 같은건가요?"

"비슷하죠"

 

세 잔에서 일어난 커피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울동안 여러 이야기들이 오간다.

 

"멜레피슈, 나도 배워볼까?"

"배우고 그러는건 아니에요. 그냥 접할 일이 많다보니"

"아, 군인 가문이니까"

"하하, 물론 진짜 전쟁터에서 지팡이 들고 싸우진 않습니다. 아버지때만 해도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으니까요. 뭐 칼 대용이라기엔 뭐하지만...하여튼 아버지는 고지식한 분이라서요. 온갖 건 다 배웠죠"

"와 이런거 말고 또요?"

 

멜레피슈는 무술이랑 무기 얘기가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서로 눈을 밝히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엔 싸움이니 칼이니 얘기 한 번 안하던 로리미엘의 눈에 아까 도둑을 한 번에 제압하던 모습이 꽤 인상적으로 남은 듯 했다. 커피의 카페인이 심장에 돌기 시작한 로리미엘이 무술 얘기까지 듣자 흥분해서는 뤼비올라를 재촉한다. 뤼비올라 역시 한참 동생같아보이는 그가 이런 분야에 호기심을 보이자 꽤나 텐션이 올랐다.

 

"뭐, 검술은 당연하고, 총이나 활, 맨 손으로 싸우는 법도 배웠구요"

"멜레피슈, 나도 하나 배워볼까?"

"하하, 엄청 힘들걸요?"

"저도 나름 힘 세요. 허브잎을 얼마나 옮기는데"

"주인님은 총이나 칼보단 책이 더 어울리세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뤼비올라에 비하면 로리미엘은 가늘고 얇은 몸은 역시 무술엔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권총을 쥐고 쏘면 뒤로 꽈당 하고 넘어질 것이 분명했다. 몸을 써서 사람을 제압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있는 멜레피슈는 주인에게 굳이 그런 쪽을 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말도 직접 모세요?"

"그럼요"

"타보고싶다"

"사실 직접 타면 별로 재미 없어요"

 

뤼비올라는 흥미 위주로 말을 탄 적은 없었으니 항상 긴장한 채로 위험한 군마를 모는 경험이 그리 재미있을리가 없었다.

 

"아가씨 한 분 위에 태우고 앞에서 끌어주는 게 더 재미있을걸요?"

"태워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쉽게도 없네요. 어릴때 해외에 나가있다가 돌아오고 나서는 임관준비 한다고 진지한 만남을 가질 기회가 없어서 말이죠"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나요?"

 

있었나요. 지금은 아마 없을 것이란 확신을 자신도 모르게 내비쳐버린다. 뤼비올라도 미묘한 어감의 차이는 알아채지 못하고는 대화를 이어간다.

 

"뭐 없진 않았지만, 지금은 없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멜레피슈와 로리미엘 모두 뤼비올라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꺼낼 때가 되었단 걸 알아챈다. 순간 서로의 눈치를 본 둘의 눈동자가 콱 마주친다. 마음이 겹쳤단 걸 확인한 둘은 그 주제를 꺼내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혹시, 세리라고 아세요?"

 

입이 떨어지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미묘한 떨림, 눈 깜짝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둘 모두가 지켜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아시는거죠"

 

스스로도 놀란 티를 냈다는 걸 눈치챈 뤼비올라는 숨길 의욕을 잃어버린다.

 

"제 지인이에요"

"아뇨, 이런 주제에서 갑자기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잖아요?"

 

뤼비올라는 이미 두 사람이 자신과 세리의 관계를 알고있단 사실을 파악했다.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신의 치부를 이런 곳에서 들춰내다니, 평범한 커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대담하고 독특한 인물들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퍼지던 미소가 젠틀해보이던 뤼비올라의 표정이 식어버리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서늘함을 느낀다. 검술을 배웠다는 것이 허세는 아닌 듯 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런 소문 가지고 저한테 수작질 하는 거면 소용 없답니다"

"설마요.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 거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뤼비올라는 태연한 모습으로 모른 척한다. 꽤나 달아오른 듯한 멜레피슈는 뤼비올라를 재촉하지만 뤼비올라는 꿈쩍도 않는다. 뤼비올라의 반응이 처음부터 부정이었다면 이렇게 재촉하지도 않았을텐데, 세리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아주 잠깐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 우리가 비밀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면...들려주실 건가요?"

 

식어버린 표정의 뤼비올라의 심장에 다시 불을 올려버리면 그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어차피 뤼비올라에게 보여줄 믿음의 징표따위는 없다. 내보일 것이 없었으니 자신의 약점도 그에게 쥐어줄 수 밖에 없었다.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입, 커피와 우유에 젖어있던 입술이 멜레피슈의 볼에 투명한 자국을 남긴다.

 

"비슷한 타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얼떨떨한 표정의 멜레피슈와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뤼비올라의 표정이 볼만하다.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뤼비올라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긴다.

 

"못 당하겠군요"

 

입으로는 긍정을 말하지만 미소는 돌아오지 않는다. 빈 잔에 담겨있던 커피처럼 씁쓸하고 무거운 기억을 꺼내는 것이 상쾌한 경험은 아니니 말이다. 우중충한 하늘에 어울리는 대화 주제다. 하늘에 해는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리도 없다.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편지의 답신을 하려다가 손이 저려서 세리를 내 방으로 불렀었죠. 손재주가 좋은 애라고 들어서 제 글씨체를 흉내내게 해서 답신을 좀 더 빨리 치우려고 했어요. 반 년 정도였나...딱딱한 우리 집 안 분위기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밝고 명랑한 애였으니까요. 제 앞에서도 눈치 안보고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좋았죠. 별로 길지도 못했지만"

 

창 밖에 빗방울이 툭툭 두들겨치는 소리가 들린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을 때 쯤, 집 안에 소문이 돌았죠. 세리가 날 유혹했니 어쩌니 하는 그런 소문. 내가 부정해도 소용 없었죠. 어머님까지 눈이 뒤집혀서 세리를 죽이네 마네 하길래 정말 큰 일이 나겠다 싶어 세리를 쫓아냈어요. 어디로 갔는지 알면 분명 그 집에서도 쫓겨나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결국 저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렇게 보냈어요"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미소도 짓지 않는다. 언제나 얼굴과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로리미엘과는 다르게 뤼비올라는 몸을 감싸는 분위기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멜레피슈의 눈엔 짓눌릴 듯 무겁고 숨 막힐 듯 우울한 그의 분위기가 보인다. 로리미엘 역시 어렴풋 그의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이제와서 후회는 안하지만요"

"어째서죠?"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에요. 어처구니 없는 연애보다 신경써야 할 게 많거든요"

"전 어처구니없다기보다는 좋은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뤼비올라는 우유와 설탕으로도 감출 수 없는 쓴웃음을 짓는다. 아주 작은 쓴 맛도 강렬히 느끼는 로리미엘은 그의 웃음을 보며 가슴이 아려지는 서글픔을 느낀다.

 

"방금 전에 저한테 보여줬던 건 장난이라고 믿을게요"

"네?"

"진심으로 사랑하니 어쩌니, 우리같은 사람에겐 의미 없거든요"

 

세리가 짓던 표정, 세리가 하던 말, 세리가 풍겼던 분위기.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로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내어버린 듯 했다.

 

"만약에 세리가 눈 앞에 있어도 똑같이 얘기 할 수 있나요?"

"시험하는건가요?"

 

잠자코 듣고있던 멜레피슈가 그에게 한 마디 건넨다. 아가씨다운 감성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 뤼비올라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멜레피슈를 응대한다.

 

"진심인지 알고싶을 뿐입니다. 제가 아끼는 동생이거든요"

"진심입니다. 귀족이란 이름 아래 살면 사랑보다 중요한 일들이 더 많으니까요"

 

그의 말이 진심일까? 멜레피슈는 알 수 없었다. 표정에도 몸짓에도 아까와 같은 빈틈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세리가 지어낸 거짓말이었다면 그럼 그렇지 하고 넘어갔을텐데, 최악의 반응을 맞이한 멜레피슈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않는다. 비 오던 새벽,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세리의 서글픈 미소가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근데 순애물에서 하나는 깨지고 하나는 이어지면 순애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