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카드에 소원을 담아-

 

"다음 번엔 집으로 초대하죠"

"감사합니다"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해 여러 대화가 오갔다. 우울한 분위기가 가실때 쯤 로리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리, 연락해 볼 수 있어?"

"없어요"

"아쉽네"

"연락한다고 해서...서로 마주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도...서로 마음도 정리 안된 것 같은데"

 

뚜껑 덮인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세리와 뤼비올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멜레피슈도 뤼비올라가 미련을 남기고 있단 걸 알고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리에게 연락 할 수단도 없었고 어디있는지도 몰랐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뤼비올라의 애매한 반응은 그녀를 그와 직접 만나게 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인연이 맞다면...만날 기회가 오겠죠"

"아쉽네..."

 

로리미엘은 속에 남은 한숨을 뱉어낸다. 오지랖이 넓은 건지 미약한 마음이 공간을 휘감는 감성에 휘둘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로리미엘이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바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멜레피슈 자신이 그런 것 처럼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들의 모습이 투영되어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멜레피슈 역시 세리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한참 어릴때부터 봐왔던 동생같은 아이였으니까. 류디트가 멜레피슈를 아껴주는 것 처럼 자신도 세리를 아꼈다. 그런 세리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뤼비올라가 맞을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좁은 마차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셀비티 클럽의 멤버들은 이 주에 한 번 씩은 클럽에서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보통의 클럽은 회원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를 하는 장소였지만 이 클럽은 그렇게 운영하기에는 회원이 너무 적었다. 표현만 클럽이었지 클럽보단 비밀스러운 모임에 가까웠다. 오늘은 빈 손으로 클럽을 방문한다. 조금 먼 곳에서 오는 만큼 먼저 도착한 셋과 류디트가 멜레피슈를 반긴다.

 

"저건 뭐에요?"

 

겨우 이 주만에 클럽 중앙에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높이가 꽤나 높은 것이 앉아서 책 읽는 테이블은 전혀 아닌 듯 했다.

 

"당구대"

"그러니까 그게 왜 여기 있는거에요?"

"얘들 따라온 하인들이 옆방에 있는데 마냥 가둬놓기도 뭐하고...우리 없는 동안 여기를 놀리기도 뭐해서 이것 저것 가져다놨어"

 

큰 테이블에 구멍이 6개 뚫린 당구대 위에 긴 막대들이 놓여있었다.

 

"너도 할래?"

"할 줄 모르는데"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외출용 장갑 대신 밋밋한 면장갑을 손에 끼고 긴 큐대를 쥐어든 디올리제가 오묘한 웃음과 함께 로리미엘을 끌어들인다.

 

"나는 못하는데..."

 

우물쭈물거리던 퀴스띠브가 로리미엘의 조끼 끝을 잡아당긴다. 답지않은 퀴스띠브의 모습에 디올리제와 디키너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로리미엘씨, 퀴스띠브랑 좀 놀아주시겠어요?"

"네"

 

로리미엘에게 건네주려던 큐대를 디키너가 받아든다. 류디트 역시 남은 큐대를 쥐어든다.

 

"저기, 퀴스띠브씨. 좋아하는 건..."

"그냥 얘기하거나, 바이올린 같은 거 좋아해요"

"연주하시나요?"

"네.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꼭 들려주세요"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에 마주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 시작한다.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퀴스띠브의 모습은 설레임을 인형으로 만든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로리미엘은 퀴스띠브의 분위기를 퀴스띠브는 로리미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저번부터 신경쓰인건데요"

"네?"

"손 냄새 한번만 맡아봐도 되나요?"

 

뜬금없는 퀴스띠브의 부탁에 로리미엘의 혼이 빠진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지만 이유도 알 수 없는데다 냄새를 맡는 행동에서 느껴지는 묘한 에로스가 그를 당황시켰다. 공과 공이 맞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나서야 로리미엘은 다시 정신을 차린다. 말로하는 대답 대신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중앙에 자신의 손등을 올려놓는다. 공중에 뜬 손을 꼭 감싸쥔 퀴스띠브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다.

 

"뭔가 달콤한 향기가 나네요. 신기해요"

"허브잎을 많이 만지니까요. 겨울이라 계속 건조시키기도 하고, 말린 허브잎은 향이 강해지거든요"

"좋다"

 

로리미엘은 퀴스띠브의 마지막 말을 듣지는 못했다. 퀴스띠브 역시 자신이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놓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마지막의 한 마디는 클럽의 분위기로 어우러져간다.

 

"카드게임 좋아하세요?"

 

로리미엘은 가슴에 차오르는 어색한 감정을 돌리기 위해 괜한 주제를 꺼낸다. 가슴을 꼭 죄는 것 같은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할 뻔한 퀴스띠브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해본 적은 없지만...가르쳐주시겠어요?"

"네"

 

서랍장에 놓여있는 플레잉카드를 한 묶음 가져온다. 두꺼운 종이가 손에 감기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카드를 쥐기엔 작아보이는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기다리고있는 퀴스띠브의 눈을 돌릴만한 여러 기술들을 보여준다. 팔랑거리며 로리미엘의 손 안에서 뛰노는 카드의 모습에 퀴스띠브의 눈이 점점 동그레진다. 긴장감에 얼어붙어있던 퀴스띠브의 표정에 봄바람이 불어온다.

 

"와, 신기해요"

"하하...잔재주입니다"

 

멜레피슈에게 배운 화려한 셔플로 퀴스띠브의 마음을 녹인 로리미엘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앞에 카드 두장을 그리고 자신에게 두장을, 바닥에 카드 세 장을 깔아놓는다.

 

"자, 퀴스띠브씨에게 드린 카드 두 장은 퀴스띠브씨만 확인할 수 있어요"

 

키 작은 꼬마 둘이 즐길만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별 달리 아는 게임이 없던 로리미엘은 퀴스띠브에게 포커의 규칙을 하나 하나 설명해가기 시작한다. 그림 맞추는 법이며 간단한 심리전, 현금을 걸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금액을 베팅하는 법과 승부를 가리는 법을 설명하는 동안 카드가 몇 번 뭉쳤다가 흩어진다. 그때마다 퀴스띠브의 눈은 로리미엘의 손과 그 안에서 춤추는 카드 그리고 가끔씩 그의 눈을 응시한다.

 

"간단하게 한 판 해볼까요?"

"베팅은요?"

"우리끼리 돈을 거는 건 좀...그리고 베팅을 하면 제가 밀리지 않을까요?"

 

다소곳한 예의범절에 귀티가 넘쳐흐르는 퀴스띠브에 비하면야 로리미엘은 말만 귀족인 적당히 부유한 평민에 불과했다. 아마 베팅싸움으로 가면 로리미엘은 계속 죽기만 할 것이었다.

 

"돈 말구...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내기에 걸린 상품에서 자신이 멜레피슈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했던 다트내기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럴까요?"

 

멜레피슈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자신도 퀴스띠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기도 멜레피슈에게 번번히 지는 초보였지만 그래도 이제 규칙을 익힌 퀴스띠브에게 심리에 있어서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넘쳐나는 귀티에 비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영악함 따윈 없어보이는 순수한 눈망울이 더더욱 로리미엘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로리미엘, 애한테 왜 그런 걸 가르쳐"

"재미있어요"

"카드가 재미있는게 아니고 로리미엘이랑 있는게 재미있는 거 아니야?"

 

로리미엘에게 핀잔을 주려는 류디트의 말에 되려 퀴스띠브가 대답을 한다. 투명한 마음 속을 그대로 내비치는 퀴스띠브의 말에 류디트는 받아치는 한 마디로 퀴스띠브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고개를 슬쩍 숙이고 자신의 앞에 놓인 카드를 확인한다.

서로 좋은 패를 쥐었는지, 포기 없이 바닥에 깔린 5장의 카드가 모두 펼쳐진다. 다이아2, 클로버3, 하트6, 하트10, 하트9. 검은 클로버를 포인트로 둔 붉은 융단이 테이블에 깔린다. 베팅은 없다. 소원을 은화 대신으로 한 만큼 둘의 승부는 올인 뿐이었다.

 

"먼저 오픈하시겠어요?"

"제가 이긴 것 같으니까. 로리미엘씨부터"

"자신만만하시네요"

 

처음 보는 퀴스띠브의 천진한 웃음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개운하진 않을 듯 했지만, 승부는 냉정한 법. 로리미엘은 바닥에 엎어두었던 카드를 뒤집으며 브이자로 모양을 낸다. 클로버4와 스페이드5. 2, 3, 4, 5, 6 스트레이트였다. 처음부터 스트레이트를 만들어두었던 로리미엘은 승부는 이미 이겼다 생각하며 커뮤니티 카드를 오픈 할지 말지 고민하는 퀴스띠브를 지켜볼 뿐이었다. 어차피 졌을 게임에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스트레이트랑 이거 중에 뭐가 더 높은거에요?"

 

무언가 있어보이는 카드를 본 퀴스띠브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한다.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며 카드를 뒤집자 로리미엘이 열심히 준비한 포커페이스가 단번에 무너진다.

하트5, 하트8. 테이블에 25개, 퀴스띠브의 앞에 13개 총 38개의 하트가 바닥에 깔린다. 로리미엘은 13개의 하트와 25개의 하트, 익숙한 숫자에 당해버린다.

 

"플러시가...더 높죠"

"제가 이긴거에요?"

 

이긴 줄도 모르는 사람과 카드를 해서 지다니 로리미엘은 황당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맨 처음 깔린 카드가 다이아, 클로버, 하트였는데 나머지 카드를 다 오픈하고 플러시를 만들 생각은 카드를 처음 쥐어본 사람이 아니면 못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세 장 뒤집었을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다 뒤집을 생각을 했어요?"

 

소원을 듣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의문을 질문한다. 설마 '그냥' 같은 대답이 나오면 허탈함이 배가 될 것 같았다.

 

"그냥..."

 

말 끝을 흐리는 '그냥'이란 단어에 로리미엘은 눈을 질끈 감는다. 저런 사람에게 지다니, 멜레피슈와 카드를 하며 나름 센스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택도 없는 수준인 듯 했다.

 

"하트 카드를 두 개 쥐고 있으니까 왠지 예감이 좋았거든요"

 

그냥 못지 않게 허탈한 대답이었다. 아무리 그림 맞추는 놀이라지만 두 장의 히든에 나온 그림에 기대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퀴스띠브의 이야기를 듣자 뭘 해도 질 판이었단 걸 느낀다. 자신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쥐었으면 그녀는 로열을 쥐었을 판, 이 판은 그런 판인 듯 했다.

 

"소원, 말해도 되나요?"

"제가 졌으니까. 무엇이든"

 

퀴스띠브의 기대감 넘치는 표정에 태클을 걸기가 미안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승부의 결과에 승복한다.

 

"헤헤, 별 건 아니고...집 구경 시켜줄 수 있어요?"

"네?"

"멀지 않다고 들어서"

"보여주기엔 부끄러운 집인데..."

"괜찮아요. 나갔다와도 되죠? 언니?"

 

천진난만한 웃음을 무기로 로리미엘을 이끄는 퀴스띠브는 길도 모르면서 문 밖으로 먼저 나갈 채비를 한다. 로리미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장갑과 모자를 챙긴다.


13, 25 맞춘다고 카드 뒤집는 부분 새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