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검에서 뿜여져나온 빛은 맹렬하게 뻗어나갔다.

빛이 목표에 충돌하자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서 있기도 힘든 후폭풍 속에서 용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천왕도 일격에 날려버릴 출력이다.

이번엔 틀림없었다.



'이건 먹힌다! 이번엔 된다!'



하지만 용사의 바람과 달리 자욱한 연기가 가시고 나타난 것은 흠집 하나 없는 멀쩡한 문이었다.



"그러니까 짐이 소용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얼이 빠진 채 성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용사의 너머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슬쩍 쳐다보는 용사에게 마왕은 침대에 팔을 궤고 누워서는 자기 옆 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자. 포기하고 어서 이리로 들어오도록 하거라."



그 모습을 보며 용사는 실성한 듯 하핫 하는 웃음을 흘리더니 발작적으로 문을 성검과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문 열어! 씨발 문 열라고!"




*




기나긴 여정의 끝에 마침내 마왕성에 도착한 용사 일행을 맞이한 것은 수 없이 많은 함정이었다.

고전적인 낙하 함정이나 화살 함정부터 전설급 던전에도 얼마 없는 전송 함정까지.

수 없이 많은 함정에 일행은 뿔뿔이 헤어졌다 합류했다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마왕의 거처 앞까지 도착하기는 했지만 전사와 마법사는 어떤 함정에 걸린 것인지는 몰라도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전송 함정에 당한 성녀의 합류는 요원했다.

이대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기에는 보급품이 부족했다.

재도전을 한다고 해도 이번보다 더 나은 상태로 여기까지 도착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미라처럼 말라있는 전사와 묘한 고열에 시달리는 마법사를 보며 용사는 결심했다.

홀로 마왕을 상대하겠다고.


전송 스크롤로 둘을 강제로 귀환 시킨 용사는 혹시나 도착할지 모르는 성녀에게 돌아가서 그 둘을 돌봐 달라는 메세지를 문 앞에 남겼다.

그리고 숨을 고르고는 거대한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이 열리자 거대한 홀 끝 옥좌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마왕은 드래곤 해골 모양의 머리를 좌우로 돌리더니 기지개를 쭉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느냐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용사여."



전투는 치열했다.

갑옷은 거의 박살이 났고 온 몸의 근육과 뼈는 회복 포션의 부작용에 비명을 지르며 삐걱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성검의 빛은 더 밝게 빛났고 마침내 용사는 승기를 잡았다.

마왕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느 방에서 마왕을 붙잡은 용사가 성검에 맹세했던 의무를 완수하기 직전, 

마왕은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이 곳에서 짐을 죽이면 후회할 것이다, 용사여."

"개소리."



용사는 그대로 성검을 마왕의 목을 향해 찔렀지만 검끝은 마왕에게 닿지 않았다.

성검을 뽑아서 다시 내려찍으려 했지만 마왕의 손에 잡힌 성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조금 전까지 도망치던 자의 힘이라고?'


무릎아래 깔린 채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성검을 붙잡은 마왕은 턱으로 그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용사는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왕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O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내가 죽어버리면 혼자서 할 수 없지 않는가?"

"...뭐?"



야릇한 네온빛으로 빛나는 간판에 얼이 빠져있는 사이 조금 전까지 활짝 열려있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곧이어 자물쇠 잠기는 소리와 함께 몇 개인지 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잠금 및 보안마법이 순식간에 문고리에 걸렸다. 



"지금 여기서 짐의 목에 검을 꽂는다면 인간계에서는 그대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대는 그 노래를 들을 기회도 없이 여기 갇혀 죽어가겠지만 말이다."



걸걸한 목소리에 용사는 다시 마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마왕은 검을 붙잡은 손을 놓고 죽일테면 죽여보라는 듯 팔을 쭉 펼치고 있었다.



"어찌하겠느냐? 지금 짐의 목에 성검을 꽂겠느냐?"



드래곤 해골 모양의 머리는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지만 그 걸걸한 목소리에서는 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




빛의 의지로 강대한 악을 앞에 두고도 쓰러지지 않던 용사는 하찮디 하찮아 보이는 나무 문 앞에서 쓰러졌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 방은 마계의 모든 역량을 다해 만들어진 곳이라서 짐조차 부술 수 없다고."

"...이딴 거에 마계의 모든 역량을 다하지 말라고.."



용사의 일격도 막아내는 함정이라니.

얼마나 인력을 갈아 넣었을지 눈에 선했다.

그야말로 마왕답다고 해야 할까.


용사는 마왕성의 함정 기술자들과 건축 기술자들의 원혼이 서린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셔라."



어느새 용사의 옆에 온 마왕은 물통을 쥔 검은 팔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뭔 줄 알고?"

"네가 죽으면 짐도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걸 잊은 거냐? 독 같은 걸 타진 않았으니 우선 목부터 축여라."



용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병과 마왕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이내 낚아채듯 물병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좀 묘한데?"



전분탄 물 같이 걸죽한 식감에 달달한 게 물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게 뭐야?"



좀 진한 포카리스웨트 같은 맛이었는데 이세계로 와서 이런 건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음마의 정수란 음료다. 이건 그 중에서도 서큐버스 퀸의 정수로 만든 최상품이지. 맛은 짐이 정했느니라."



오랜만에 맛보는 반가운 맛에 한 모금 더 마시던 용사는 그대로 입에 머금은 걸 뿜었다.



"...독 같은 거 안 탔다며!"

"독은 안 탔다. 서큐버스 퀸의 정수가 들어있을 뿐이지."

"사람이 못 먹을 걸 타면 그게 독이지!"



마왕은 잠깐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지더니 오해라는 듯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많이들 오해하고 있지만 서큐버스 퀸의 정수는 서큐버스 퀸의 질 분비액이 아니다."

"질 분비...뭐?"

"애액 말이다."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말문이 막힌 용사를 뒤로하고 마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성녀의 소변을 성수라고 우기면서 파는 식품위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성변태 늙다리들과 달리 이 음료는 진짜 서큐버스 퀸의 정수, 그러니까 체내 마력으로 만든 음료다. 마계에서는 정력제로 유명하지."



마왕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길과 함께 양피지 쪼라기가 나타나더니 용사의 품으로 떨어졌다.



'음마의 정수. 서큐버스 정수 함유. 100% 서큐버스 퀸에게서 추출. 가족이 먹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광고지로 보이는 종이에는 속을 메슥거리게 만드는 문구와 원재료를 오해하기 충분할 만큼 외설스러운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가장 최근 이용한 사람의 후기가 네온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한 병이면 짝사랑하던 그이도 한 방! 비명의 산맥 이남의 그 어떤 미약보다 추천해요! -늪의 마녀-'



용사는 눈을 비비고 다시 종이를 쳐다봤다.

늪의 마녀는 마법사의 이명이었다.



'전사랑 마법사가 그 꼴이었던 게 설마?'



삐쩍 말라있는 전사와 열이 올라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못하던 마법사의 모습이 용사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고 손에 쥔 종이가 잔뜩 구겨졌다.



'함정에 빠져서 그렇게 됐다며!'



전사와 마법사는 마왕의 <O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함정에 빠진 거고, 

또 거기서 전사가 마법사의 함정에 빠져서 그 꼴이 된 거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용사는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흠. 역시 상태이상 내성이 높으면 효과가 없나."



용사의 이런 속도 모른 채 마왕은 아쉬운 듯 그의 사타구니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엄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사는 질린 얼굴로 마왕의 머리를 향해 물병을 던졌다.

그대로 물병에 맞아서 그 음마의 정수인지 뭔지 범벅이 되었으면 속이라도 조금 후련해지겠것만.

마왕은 보지도 않고 물병을 가볍게 받아냈다.



"그래서 넌 진짜 그...나랑 하려고?"



그대로 물병을 얼어 해골에 붓 듯이 마시던 마왕은 용사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무엇을 말이냐?"

"아니, 그...스 말이야.."

"스? 체스 말인가?"

"어?"



그러고보니 O스라고만 적혀있었지 따로 섹스라고 적혀있지는 않았다. 



"그거면 돼? 체스?"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체스판을 찾는 용사를 보며 마왕은 킥킥거렸다.



"당연히 안 된다. 굳이 O스로 표현한 것은 지금 그대같이 현실도피를 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 위해서일 뿐. 왜, 이전 방문객인 전사와 마법사도 섹스로 탈출하지 않았는가."



핏줄이 튀어나온 흉흉한 손으로 성검 손잡이를 움켜쥐는 용사를 보면서도 마왕은 이죽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대의 오랜 애인인 오른손과의 질펀한 섹스도 안된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 그새 왼손으로 바뀌었나?"



용사가 싸늘한 얼굴로 성검을 들어올리자 그제서야 마왕은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뻗어 휘휘 저었다.



"엄정한 심사를 거쳐 갇혀있는 살아있는 두 사람의 진심을 다한 섹스로만 탈출 가능하다."



성검은 마왕의 옆에 그대로 꽂혔고 용사는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섹스도 아니고 진심섹스라니. 

용사는 울고 싶었다. 



"그대는 나가기 싫은가?"



당연히 나가고 싶다.

아니, 나가야 한다.

마왕을 죽여도 돌아갈 수 없다면 약속했던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준다는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다.

지금까지 어떤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하...나가야 하긴 하는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용사는 마왕을 슬쩍 쳐다봤다.

드래곤의 머리뼈와 닮은 머리, 온 몸은 검은 망토로 감쌓지만 몸의 형태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면서도 그 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였지만 그것 외에 다른 성별의 특징은 발견할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성행위가 가능한 종족인지조차 모르겠다.

극한의 가능충이라면 모를까.

용사의 머릿속에는 빨간 불과 함께 '불가능'란 단어가 깜빡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밤 그냥 자는 척 하고 있는 거였는데...'



용사는 그날 밤 성녀의 광기어린 눈빛을 떠올리고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이런 괴물보다야 사랑의 기도문을 외우며 방으로 기어 들어와서는 침인지 땀인지 뭔지 모를 액체로 침대를 적시던 성녀 쪽이 몇 배는 낫지 않을까.

둘 다 트라우마로 남을 게 분명하지만.


자신의 몸을 위 아래로 훑으며 한숨을 내쉬는 용사를 보며 마왕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아. 그 문제였나."



마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망토를 훌렁 벗었다.



"이 정도면 그대도 괴물이랑 한다는 생각은 안 들겠지?"



먼지와 땀이 가득한 치혈한 전투를 벌였지만 망토 아래의 여체는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갈색의 여체는 서큐버스와 같이 검은 가죽 질감의 하이레그 아머가 걸쳐져 있지만 그 어떤 서큐버스보다도 아름다우면서도 육감적이었다.



"...폴리모프?"

"무례하구나. 짐의 본 모습이다."



뽐내듯 자신의 몸을 드러내며 서 있는 마왕의 몸은 장인이 조각한 여신상을 보는 것 같이 경외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뭐 할 말은 없느냐?"



망토에 음성 변조 마법이라도 걸려있던 것인지 걸걸한 목소리는 어디가고 이웃집에 사는 여자 사람 친구 같은 친근한 목소리로 마왕이 물었다.



"어? 몸 좋네...?"



용사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마왕은 작게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머리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썩 유쾌하지 않다는 투였다.

이 반응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쯤, 마왕은 용사의 팔을 잡아 침대로 끌었다.



"볼만큼 봤다면 침대로 가지."



마왕의 기세에 침대에 걸터앉은 용사는 오른쪽 팔과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오랜만의 사람 피부의 온기에 몸을 움츠렸다.

마왕은 용사와 몸을 딱 붙히고 앉아서는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 그럼 저 쪽을 보면서 이름과 나이를 말해 보거라."

"이름은...지금 뭐 하는 거야?"



용사가 은근슬쩍 어깨에 올라온 손을 쳐내며 노려보자 마왕은 혀를 칫 찼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어디에 녹화용 수정구슬 숨겨 놓은 건 아니지?"

"...이 침대 어떤가? 무려 킹슬라임으로 만든 물침대다. 적당한 탄성 덕에 격한 체위도 허리에 부담 없이 할 수 있게 해 주지."



용사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침대 위를 아이처럼 방방 뛰는 마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왕은 민망했는지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흠흠 흠흐흥 흠흠흠흠흠흐흐흠"

"뭐라고?"

"뭐가 어쨌던 간에 그대가 나랑 섹스를 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빨리 옷이나 벗거라. 씻고 싶다면 샤워실은 저쪽이다."



마왕의 손끝을 따라가면 투명한 유리로 된 샤워 공간이 보였다.

대체 이 정신 나간 함정에 얼마나 공을 들인 걸까.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한숨이었다.

용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섬주섬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저기 말이야. 넌 왜 그렇게 적극적인 거야?"

"뭐가 말이냐?"

"조금 전까지 서로 죽기살기로 싸운 상대랑 그...섹스 해야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냐고."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마왕에게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련의 행동들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노린 것 같이.



"마왕과 용사가 서로 죽이려 드는 건 당연한 것이지 않나. 그리고..."



마왕은 몸을 꿈틀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를 기다리고 있었어."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끝 맺은 말은 너무나도 작아서 용사가 갑옷을 녹화용 수정구슬이 있을 법한 곳에 올려놓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어? 뭐라고?" 

"...짐의 200년 묵은 처녀막을 뚫어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퉁명스럽게 던진 마왕의 폭탄 선언에 용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섹스는 하고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이유가 그 적극성의 이유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왕을 쳐다봤지만 마왕은 해명할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부끄러운 것인지 푹신한 이불 속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옷 벗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짐도 하나만 묻지. 왜 그렇게 머뭇거리는가?"



마왕은 아직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것인지 이불 속에서 비음 가득한 물음이 들려왔다.



"그저 여기서 나가기 위해 몸을 겹칠 뿐 아니더냐. 무엇이 그대를 그렇게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냐?"



용사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함정에 걸린 것 같은 찝찝함도 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짐이 그렇게 매력이 없느냐?"



매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용뼈다귀 모양 머리와 조각 같은 여체의 조합이 조금 컬트적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느낄 만큼 미적으로는 전보다 훨씬 나았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무엇이냐? 인간계에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런 셈이지. 인간계는 아니지만."



문득 용사의 머릿속에 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른이 되면 나를 신부로 맞이하러 와 줘. 나를 꼭 구해줘.'



멍과 피투성이인 손으로 어릴 적 나눈 두루뭉실한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 덕에 고통과 수치심도 이겨낼 수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세계에서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마왕과 원치 않는 섹스를 하게 되더라도.


잠깐 속으로 그녀에게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빈 후 용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문이 열리기만 하면 바로 널 죽일 거야."



마왕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이불이 그녀의 몸을 따라 흘러 내려가며 다시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냈다.



"참 정 없는 사내로구나."

"뭐라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널 죽여야 해."

"...그들이 너에게도 그런 약속을 했구나."



마왕은 용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신의 해골 머리를 양손으로 쥐고 그대로 올려 들었다.

머리라고 생각했던 드래곤의 해골은 그대로 뽁 하고 뽑혀나가고 검은 비단의 폭포가 어깨 아래로 흘러넘쳤다.

마왕은 머리카락이 엉킨 게 답답했는지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는 말했다.



"그 씹새끼들은 나한테도 같은 약속을 했었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원색적인 욕설에 마왕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용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왕은 제 힘에 못 이겨서 멋대로 뻗어나간 것 같은 불규칙한 모양의 뿔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 혹시 뿔 달린 여인은 싫어하는가?"

"아니, 그건 아닌데..."

"이게 보기엔 좀 흉하긴 하지만 특정 체위에서는 손잡이로도 쓸 수 있고 매우 유용하다."

"아니..."

"역시 없는 게 좋은가? 흠. 아프진 않지만 깔끔하게 잘라버릴 자신은 없는데."

"그게 아니라!"



마왕은 자신의 말을 끊어 놓고 말을 잇지 못하는 용사를 보며 물었다.



"뭔가? 짐의 미모에 반하기라도 한 것인가?"



투구 아래에서 드러난 마왕의 모습은 미녀라고 불힐 만큼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용사가 제대로 말도 못 할 만큼 놀란 건 다른 이유였다.



"아니면, 이 모습에서 다른 누군가라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이더냐?"



저 이죽거리며 올라간 입꼬리와 휘어진 눈꼬리에 용사는 숨이 멋는 것만 같았다.

폴리모프가 아니다.

환상 같은 건 더욱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마음을 홀렸던 살짝 처진 눈과 그 끝 위치한 점.

사람 놀리는 흥분을 참지 못해서 꿈틀거리는 입꼬리.

기억하는 것 보다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지만, 머리에 뿔이 자라났고 피부가 갈색이 되었지만

그 얼굴을 용사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알아채는 게 늦어 바보야."



어떻게 네가 이세계에 있는 건지,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 것이 한 가득 있었다.

하지만 용사는 묻지 못했다.


소꿉친구이자 사랑하는 연인이자 살아갈 이유인 마왕은 그의 타액 한 방울, 호흡 한 숨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탐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자 마왕은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대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고 싶었어...진짜진짜 보고 싶었어..."



용사는 뜨거운 눈물로 미처 벗지 못한 셔츠를 적시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 같이 우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구나.

그녀의 모습이 아이 같다고 생각한 것도 무색하게 용사는 이내 자신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도 곧 연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꼈다.



"나도...정말 보고 싶었어."



약 10년만이자 200년만의 기다림 끝에 닿은 서로의 온기는 마왕성의 역작, <O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의 굳게 잠긴 문을 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문이 열렸음에도 본래 이어져야 할 용사의 칼부림 소리도 마왕의 영창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 사이에서는 킹슬라임 물침대 에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울고, 웃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소리만 세어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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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편이자 전편


네? 용사의 일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함정을 만들라고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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