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노예를 사들였다. 그닥 떳떳하지 못한 이유로.

두 눈에 반쯤은 두려움, 반쯤은 증오심이 깃든 은여우 일족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다소 먼 타지-약제를 구하기 위함이었다-에서 이루어졌다. 알고 보니 노예시장이었던 건물로 들어가는 옆모습이 눈에 띄였던 것이다,

외모가 취향이기도 했고, 마음 속 공허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려는 이기심도 한몫했다.


꼬박 사흘 만에 도착한 집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여관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씻겨주고, 옷까지 대충 마련하자 꾀죄죄하던 그녀의 몰골도 한층 나아졌다.

우리 사이에는 그간 기초적인 대화밖에 오고가지 않았다.


"앉아 있어. 네 방부터 마련해 줄게."

"언제 할 생각이에요?"


얼음장 같은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앞섶을 슬며시 내려 보였다.

씻겨줄 때 봤던 상처투성이 몸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게 목적 아니었나요? 어서요."

"비쩍 말랐을 때 할 생각 없어. 든든히 좀 먹여야지."


초연한 척하지만 떨리는 두 손은 감출 수 없었다.

자진해서 팔려왔다고 노예상이 말했던가. 막상 이런 상황을 목도하니 본능적으로 두려운 듯했다


"네 상태론 적어도 2주는 있어야겠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모르는데 무작정 안기엔 위생 문제가 있었다. 구충을 비롯한 치료를 거친 후에 뒷일을 생각해야 할 성싶었다.

자칫하면 나까지 성병으로 평생을 고생할지도 모른다. 뜻밖의 대답과 함께 거절당하자 당황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무리하게 자극할 필요는 없었기에, 홀로 남겨둔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먼저 잘게요."


우아하게 식사를 마치자 금방 잠에 빠져드는 그녀였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경계심과 별개로 차려준 밥은 잘 먹어주었다.

성노예라니, 우리 부모님께서도 질색할 행위임은 알았기에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대하고 싶진 않았다. 가령 힘으로 찍어누르며 강제로 범한다던가..

그나저나 주머니에 있던 보석은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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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굶주린 뱀처럼 음흉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에 찌든 존재다.

영토와 재화, 노예에 눈이 멀어 왕국을 멸망시킨 뒤로, 세상을 단둘이 떠돌아다니며 그들의 추악한 면모를 끊임없이 봐 왔다. 


날 사들인 의사도 분명 마찬가지였다. 직접 팔릴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저 성처리 도구로 쓰일 미래를 생각하면 솔직히 두려웠다.

정말 2주는 뒤에야 범할 생각인지, 해가 네 번 뜨고 질 때까지도 그는 나에게 손대지 않았다.


"다녀왔어."


아침을 차려주고 출근, 퇴근하면 저녁을 만들고 내 몸의 상처들을 정성껏 치료해줄 뿐이었다. 지금 몸 상태론 안 된다며 간단한 집안일조차 시키기 않는 그였다.


찢어진 발바닥이나 어깨의 염좌를 살펴볼 때의 눈빛에는 일말의 성적인 욕망도 담기지 않았다.


"식사 예절이 좋더라, 원래 귀족이었던 거야?"

"비슷해요."


고맙게도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남자였다.


"성노예한테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는 생각 안 해요?"

"왜. 아무것도 안 시켜서? 환자한테 그러면 되냐."

"노예라는 개념이 뭔지 모르시나 봐요? 당신 소유물이라고요."

"그러니까 뭘 하든 내 마음이잖아."


거칠게 대하는 쪽이 마음 편할 텐데, 그래도 몸은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이 좋아졌다.


"내일은 같이 갈 데가 있어. 별로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오랫만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날, 그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보석상이었다.


"그 진주 가지고 있지? 네가 항상 들고 다니던 거."

"..그걸 어떻게.."

"주머니에 불룩하게 튀어나오더라. 머리맡에 올려두고 자는 것도 봤어."


주인이 능숙하게 손을 몇 번 놀리자.소중한 진주는 어느새 반짝이는 금목걸이에 붙여져 내 목에 걸리게 되었다.

원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실로 오랫만에 자리를 되찾았으니 상관없었다.


"마음에 드나 보네."


돌아오는 길에 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을 전부 숨기진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신 거에요.."

"아니, 항상 들고 다니는 것 같아서. 걸고 다니는 편이 좋잖아."

"부모님의 마지막 유품이었어요. 이 진주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생일에 받은 진주 목걸이는 유품이자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두 분의 흔적이었다.

오래전 얘기지만 그리움에 사무칠 때는 진주를 만지작거리며 슬픔을 달래곤 했다. 노예로 팔렸을 때조차 필사적으로 숨겨온 덕에 지금껏 간직해오고 있었다.


"목에 거는 것도 오랫만이네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보잘것없는 선물이었다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고마움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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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원한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호의를 배풀 이유는 없었다.

불법 인신매매가 지금처럼 엄격히 단속되지 않던 시절, 상냥한 주인이 가엾은 노예를 사들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줬다. 

혹은 노예문서를 불태우고 소중하게 대해준 끝에 결혼까지 이르렀다, 하는 미담은 몇 번 들어본 적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위인의 그릇은 되지 못했다.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은 단지 환자였기 때문이다. 발에 상처가 있는 여자와 건장한 청년, 어느 쪽이 더 믿음직스럽겠는가?

영양소를 맞춰가며 꼬박꼬박 잘 먹이긴 했지만, 빨리 나아야 마음 편히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데려왔을 때부터 매일같이 들고 다니기에 소중한 물건인 줄은 일찌감치 알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에게 처음을 뺏길 그녀를 위해 이 정도는 해줘도 괜찮다고 여겼다.

 

항상 차갑던 그녀에게서 진심어린 감사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보다 더 예상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 희미한 미소에 화답하듯 마음 한 켠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이었다.


가엾은 노예를 착하고 상냥한 주인이 사들여서 구원해주었다~하는 내용은 이미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흔해서

클리셰 비틀기로 써 볼 거고 다음 파트는 19금일듯?


올바른 성노예 사용법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