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그랬다. 


다니던 회사에서 일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니 어딘가엔 흔할 법한 말기암이 내 몸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회사는 그만 두었고,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가까운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기를 몇 년.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있던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뭐, 우스갯소리겠지. 그냥 병원을 제때 제때 가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까지 직면한 걸지도 모른다. 

평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니, 자업자득이겠지. 


그러다 문득, 정처 없이 집 근처를 걷던 도중, 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던 도로 한 켠에 새하얀 교복을 입고 서 있던 여성이 보인 것이다. 


처음엔 가만히 바라보며 갈 길을 걸어갔고, 여전히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한 채로 걷다 앞 사람과 부딪힌 것이 시작이었다. 

부딪힌 이는 나를 째려보는 듯 했지만, 지금 그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여자. 1분이 넘도록 가만히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을 신경 쓸 인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기엔 오히려 도움받기 급급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던 내가, 도대체 무슨 용기가 있었을까. 


나는 왔던 길을 돌려, 그녀가 서 있던 도로 한 켠 보도블럭도 없는 길을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녀의 옆에 다가설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내게 눈길을 주었다. 


텅 비어 공허하디 공허한 눈동자. 생기를 잃기 시작한지 얼마나 된 건지 가늠 조차 안 될 정도로 피폐한 눈동자는 그녀가 가진 사정의 깊이를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까. 자살하지 마? 여기서 이러면 안돼? 

뭐가 됐건, 참으로 난 남을 달래는 일은 못한다 싶었다. 


그러던 도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 뭔가요. 왜요, 가출 청소년이라 어떻게든 해보려고요? " 


차마 무어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날도 추운 12월 중순의 한 겨울에 별다른 외투도 없이 교복만 걸치고 있던 아이의 손은 벌겋디 벌겠고, 새하얀 입김은 힘 없이 공중에서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런 날에 홀로 서서, 처음 본 이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꽤 여러 일들이 있었겠지. 


한참을 말을 고르던 나는, 그저 짧게 중얼거리듯 내뱉을 뿐이었다. 


" 그래, 까짓거 뭐 어떻게 해보지. 밥이나 먹으러 갈까. " 


" …… . "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던 그 눈빛마저 힘없이 식어 있었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지 허탈한 건지 내 눈을 피해버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 내가 봐도 어이가 없긴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와서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차에 치여 죽는 것보다 얼어 죽는 게 더 힘들걸. " 


" 지랄. 신경 쓰지 말고 가요 빨리. " 


앳된 얼굴에서 튀어나올 말이 아니었지만, 뭐 따지고 보면 내 쪽에서 꺼낸 말이 그녀에겐 상당히 자극적이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체 여자 경험도 없고 가뜩이나 사람을 달랠 줄도 모르는데, 이성 앞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리. 그저 이게 내 한계인 것이다. 


" 그래, 가자. "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꺼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고, 누군가 본다면 납치나 범죄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이 차디찬 손에 내 따스한 온기를 줄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 뭐해요? 아, 놔요. 놓으라구요! " 


연신 손을 뿌리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 큰 20대 초반 성인 남성을 이겨내기엔 힘이 부족하지 않나. 

게다가 쥐고 있는 손과, 그녀의 손목 사이에는 두꺼운 밴드가 붙여 있었으니 아마 자해로 인한 상처겠지. 그렇다면 되려 힘을 줄 수록 본인만 아플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서.


연신 속으로 사과를 반복하고, 나는 그녀가 무얼 하던 신경쓰지 않고 걸었다. 아마 걷다가 등짝을 몇 번 두드려 맞은 것 같은데, 백날 때려봐라. 어디 내가 아프다고 놔줄까보냐. 





*





내 앞에서 느껴지는 매우 언짢은 시선을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난동을 부리지 않던 것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꽤 있는 음식점 내에서 소란을 피우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 … 그거 알아요? 저 교복도 입고 있고, 당신 성인인 것 같은데 제가 소리라도 지르면 큰일날걸요? " 


" 그 말은 안 그러겠단 소리네. 오히려 이 시간에 학교에 가지 않은 네가 더 문제아처럼 보일 걸. " 


" 아저씨가 납치했다 하죠 뭐. " 


" 그러기엔 얌전히 잘 있네. " 


뭐가 그리도 맘에 들지 않는지 연신 표정을 찡그리던 탓에 메뉴판으로 고갤 돌려버렸다. 

평생 올 일 없을 것 같던 레스토랑 집에 오니, 이게 참 뭐랄까 내가 원하던 분위기가 나오질 않는다. 

결국 한참을 헤메고 나서야 옆에서 대기중이던 종업원에게 눈길을 준 뒤, 이것 저것 주문을 한 뒤 메뉴판을 치워버렸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니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싶던 때가 있었으나, 너무 오래 바라본 탓이었을까. 

눈이 마주친 그녀가 역겹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던 탓에 내 자그마한 안도감은 금방 부숴지고 말았다. 


" 딱히 묻지는 않네요. " 


"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 


그러다 문득 먼저 질문을 건넨 그녀에게 나지막이 대답해주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겨서, 무엇이 그리 힘들었을까 궁금증이 없지는 않았지만, 섣불리 이것저것 캐묻기에는 아직 나와 그녀의 사이가 가깝지도 않을 뿐더러, 되려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낼 테니 말이다.


" 그래서 뭐, 한번 대달라는 거에요 뭐에요? " 


" 푸흡- 케흑, 뭐? " 


물을 마시던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찡그린 눈매로 날 바라보던 그녀는 내 반응에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기에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선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 죽기 전 한 번 쯤은 해보고 싶지만, 아저씨랑은 하기 싫은데요. " 


" … 나도 그러긴 싫다. 감옥에서 죽기는 싫거든 나도. " 


내 말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진 모르겠지만, 흥미를 잃은 건지 시야를 사선으로 틀어버린 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이라도 하듯 한마딜 덧붙였다. 


" 도대체 뭐야… . " 


참 별난 아이다. 뭐 물론 난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랑 고작 해봐야 얼마 차이도 않는 애가 저런 말을 하고 다닌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적막이 전부였다. 

음식이 나온 이후로 그녀는 한번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 이후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깨작거릴 뿐이었다. 

돈이 있다는 게 참 좋은 거구나. 평생을 모으고 살았던 내가 이런 사치스러운 것도 먹어보고, 근데 아무래도 조금 많이 시키긴 했나보다. 


말 없이 날 흘깃거리며 포크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말재주가 없는 나와, 경계심 가득한 그녀의 첫 식사는 이렇게 말 없이 침묵 속에 마무리되었다. 


대충 배를 채우고 계산을 마치고 식당에서 먼저 나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는 건지, 경계를 하는 건지 맘 편히 먹지 못하고 있던 그녀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홀로 남겨진 상황이 더 불편하긴 하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절반 정도 태웠을 무렵.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섞이고 섞여 새하얀 공기가 공중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을 즈음,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말 없이 다가와 내 눈을 가만히 보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나 보다. 


" 저도 하나 줘요. " 


" 미쳤냐. 너 교복이야. 학생이고. " 


" 저는 신경 안 쓰는데요. " 


" 내가 신경 쓴다고. " 


결국 다 태우지도 못한 담뱃재를 툭툭 털어 재떨이 통에 던지고는, 혹여 냄새가 나지 않을까 몸을 돌려 말했다. 


" 다음에 멀쩡한 옷 입고 보면 그땐 줄게. " 


" 그래요… 아니, 또 방해하려고요? " 


수긍이라도 하려다 멈칫한 그녀는 아무래도 눈치가 느린 편은 아니었나 보다. 

그나저나, 방해라고 말하는 구나. 정말 내가 그 자리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 세상에 흔적만 남긴 채로 사라졌을까. 


" 대답한 거네. 난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은 싫어. " 


" 그럼 더더욱 안지키죠. 제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 


" 아쉽네.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았는데. " 


뭐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 건지 그녀는 말 없이 등을 돌린 채 걸어가 버리고 만다. 

그럼 나는 또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걷고, 그런 나를 의식했는지 걷다 걷다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다. 


" 왜 계속 따라다니시는 거에요? 말 했잖아요. 아저씨랑은 하기 싫다고. " 


" 나도 하기 싫어. 그냥 나도 가는 길일 뿐이야. " 


"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전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 


" 다행이네. 마침 나도 할 일이 없었거든. "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꼬리가 꿈틀거리던 그녀는 다시금 등을 돌리며 걸어갔고, 그런 그녀의 걸음에 나는 조용히 맞추어 걸을 뿐이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을 법한 아이가 어째서 저렇게 됐는지,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건지 나로써는 알 방법도 없고, 위로할 방법도 없겠지만 그냥 나의 죽기 전 마지막 오기라고 생각했다. 

생명이 하나 스러질 때, 아직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생명은 제 빛을 찾아 빛날 수 있기를 빌며 말이다. 





*





" 왔네. 늦었잖아. " 


" …… 아저씨 뭐에요 도대체?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데요? "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정확히는 여느 학생들이 등교에 바쁜 시간인 7시 30분 정도 즈음. 조금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아침 일찍 고생한 나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었을까.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는 다시 처음 만났던 그 길을 걷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다가오기 만을 기다렸다가 말을 건넨 것이었다. 


" 우연이네. " 


" 아니, 방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뭐에요 그건? " 


" 그야, 진짜 올 줄은 몰랐으니까. " 


내가 말하고도 어이없는 상황에 그녀는 얼마나 날 이상하게 보고 있었을까. 

뭐, 그래도 상관 없다. 단지 오늘도 그녀를 찾아 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사실 어제 있던 일로 보건데, 그녀가 걸음을 옮긴 곳이 여고라는 사실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정문을 응시할 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주변 공원을 서성이던 모습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름의 sos 신호가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그럴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녀 입장에서는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겠지. 


" 아침 안 먹었지? 오늘은 어디로 갈까. " 


" 알아서 하세요. 저는 갈 길 갈테니. " 


" 그럼 아쉽지만 따라가야겠네. 오늘은 어디야? " 


" 하… . "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평소와 같이 등을 돌려 걸으려 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 뭐에요? " 


바로 옆으로 다가간 나는 나란히 그녀와 걸음을 맞추었고, 이에 불쾌함을 느낀 것인지 곧장 걸음을 멈춰서던 탓에 나도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 왜, 그냥 갈 길이 같아서 그런 것 뿐인데 왜. " 


" 그러니까 도대체 어딜 가시길래 어제부터 이러시냐고요. " 


" 니 옆으로 가려고 그러지 뭘. " 


" …… . " 


이제 좀 포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죽음에 미련이 남은 것인지 날 무시하듯이 빠르게 걷던 탓에 나도 급히 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마지막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보려 이러고 있는데. 

왜 또 다른 누구는 이 삶을 이렇게 포기하려고 하는 걸까.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았는데. 누구보다 더 살고 싶었는데. 이제야 조금 사람 답게 살 수 있나 싶었는데. 

나와 정반대의 길을 걸으려 하는 너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만약 어제 널 내버려 뒀다면 너는 정말 행복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조금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오지랖으로 시작된 일은 이미 진심으로 내가 이뤄내고자 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이미 내 마음속 깊이 그녀라는 사람이 깊이 뿌리를 터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그만해 이제. " 


" 하… 아저씨가 도대체 뭘 안다고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 


" 닥쳐. 그만 하라고. " 


" …… 지금 뭐라고… . " 


제 3자가 이런 나를 본다면 그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 저것 오지랖이며 화나 내는 정도의.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그녀를 대할 수 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어보자면, 나는 이제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걷기만 해도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럽다. 매일 밤마다 잠은 안 오고 식욕은 떨어지며 그 날에 있던 일 중 후회스러운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왜 그랬을까 하는 자괴감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원인 속에 그녀라는 이가 자리 잡고 있으니 나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어째서 이런 식으로 변질되었는지, 왜 사탕 발린 말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쓰디 쓴 말을 뱉고 있는 것일까.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어야 하지만, 이미 터져버릴 것 같은 두통에 온전한 사고는 커녕, 제대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 내가 다 도와주겠다고. 할 수 있는 건 뭐든. 니가 살기 싫던 말던 내 알 빠 아니고, 그냥 제발 좀 행복하게 살자고. 안되면 도와달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어려워? " 


머리가 어지럽다. 살면서 이토록 화를 내고, 열을 낸 적이 있었던가. 누구에게 이토록 나의 사상을 강요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분명 없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생각 없이 막 말을 내뱉을 정도로 나는 자아가 확실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였을까. 지금 내가 무너지려고 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부정했기에 벌을 받는 걸까. 


몸이 힘 없이 쓰러졌다는 것이 통증과 함께 미약하게 나마 느껴진다. 

시야는 어둡고, 귓가엔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아저씨. 라니. 






*






다행히 아직 죽지는 않았나 보다. 

어디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삐, 삐, 소리가 지속적으로 귓가에서 거슬리게 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병원으로 옮겨졌구나 싶었으니까. 

천천히 눈을 떠보니 의외의 인물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 뭐해, 여기서. " 


" …… 아저씨는 고맙단 말 한마디 못해주나 봐요? 누구 덕분에 살아있는 건데. " 


" 그러는 넌. 내가 살려준 것에 감사하단 말도 안 하잖아. " 


말문이 막혀버린 것인지, 아니면 져주려는 것인지 별 다른 대꾸도 없이 미간을 좁히던 그녀는 사과가 올려진 접시를 내 머리맡으로 올려두었다. 

이리저리 비뚤빼뚤 불규칙적으로 깎여진 껍질 탓에 사과는 울퉁불퉁 했지만, 조각난 사과 가운뎃부분이 전부 깎여 나간 것을 보아하니 나름 성의껏 준비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 칼질은 조금 연습해야겠다. 그러면 나중에 결혼 못해. " 


" 못하는 말이 없네요. 까짓거 죽죠 그럼 뭐. " 


" 또 그러네. 그럼 나랑 결혼해야겠다. " 


장난스레 꺼낸 얘기였지만, 뭘 그리 생각에 잠긴 것인지 찡그린 시야 틈으로 가만히 날 째려보던 그녀는 고갤 휙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 어디 가려고? " 


" 뭘 물어요? 실례에요 그런 거. " 


뾰루퉁하게 대답하던 그녀는 표정을 숨기기라도 하듯 곧장 병실 문을 열어 나가버렸고, 다시 혼자로 돌아온 나는 지끈거리는 고통에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찰나 다시금 문이 열리고, 그녀인가 싶어 억지로 눈을 떠보니 아무래도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인 것 같았다. 


정말 무리하면 안된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였지만, 솔직히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겠는가. 


가까운 가족도 없는 나는 수술을 받을 만큼 큰 돈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누굴 위해 살아본 적도 없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수술을 포기하겠다고 의사에게 일러둔 뒤,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나는 퇴원 예약을 잡았다. 

극구 만류하던 의사선생님은 결국 질렸는지 포기하며 나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밥 못 먹었겠다. 어디로 갈까? "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눈꺼풀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말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노력했다. 적어도 그녀에게 내 고통마저 알려주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손목을 다시금 붙잡았다. 

가까운 손목을 잡아 끌었지만, 다행히도 상처가 있던 왼쪽 손목은 아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저항이라도 하려나 싶었지만, 얌전히 멈춰 서선 나와 시선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 또 죽으러 가게? " 


" 네. 죽어야죠. 이제 절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 


" …… . " 


끝까지 매정하구나 너는. 

나름 죽기 직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정했는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애써 두통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내 손이 떨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 들었어 혹시? " 


" 뭐를요? "


" 아니, 못 들었으면 됐어. " 


" … 누워서 쉬지. 또 방해하게요? " 


" 해야지. 살아야지… . " 


무뚝뚝하게 여느 때처럼 말하기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살아야지. 살아야지… . 


살았으면 했다. 

그게 누가 됐건 간에. 아니, 둘 다 살았으면 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결코 행복한 엔딩따윈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자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너라도 살았으면 했으니까. 


옷을 갈아 입으려 주변을 둘러 봤건만, 팔이 닫지 않는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힘을 내주라고 내 몸에 기도를 해봤지만, 어제부터 무리한 탓일까. 쉽사리 움직이지 않던 몸과 손 끝은 미약하게나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날 지켜보던 그녀는 말 없이 내 옷을 집어주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되려 내가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누가 누굴 도와주는 건지,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 없이 고개를 돌려주는 그녀. 

부스럭거리며 힘겹게 옷을 갈아 입었다. 

몸을 혹사 시키고 있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견뎌 달라고. 애써 나 자신을 혹독하게 갈궜다. 






*






결국 멀리 가지 못했던 나는 병원 옥상 테라스가 한계였고, 내게 건네는 마지막 호의였는지 그녀는 조용히 날 부축하며 따라와 주었다. 

아마 내 마지막 소원은 실패로 돌아가겠지. 이렇게 약해져 버린 몸으로 누가 누굴 살리겠다는 건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깨우던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 아저씨. " 


" … 응. " 


" 내일도 자살할 거에요. " 


" …… 응. " 


" … 내일은… 아니다. 아니에요. " 


" …… . " 


무언가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다. 

그토록 차갑던 공기가 조금 녹았다고 해야 할까. 

아마 기분 탓이겠지. 


내일도 그녀는 자살할 것이고, 

내일도 나는 그녀를… . 


공기가 참 차가웠다. 

하지만 어째선지 춥지는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죽을 때가 된 걸까. 아직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꿈을 꾼다. 

내일이 멀쩡히 돌아오기를. 

꿈을 꾼다. 

내일도 그녀가 살아있기를. 







*






" …… . " 


기분이 묘연했다. 

나보다 먼저 와있던 그녀는,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이 가만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그녀 앞에 내가 설 때까지. 


어젯밤 상태가 조금이나마 괜찮아졌던 나는,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 곧장 잠에 빠졌고 오랜만에 꾼 달콤한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건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시간은 9시.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었다. 


" 늦었네요. 날 구한다는 사람 치고는. " 


" 그러게. 그래도 다행이네. 아직 안 죽어서. " 


이건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본인의 길대로 갔다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 

솔직히 이제는 모르겠다. 네가 먼저 죽을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먼저 죽을지. 


하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는 욕심내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널 살리고 싶다고. 


" 춥네요 오늘. " 


그렇게 말하며 입김을 후- 내뱉던 그녀는 조용히 내게 손을 뻗어왔다. 

그 의미를 파악했을 때, 내 손가락은 의지와 상관없이 꿈틀거렸고, 이내 그 손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따뜻했다. 저번과는 달리. 


아니, 어쩌면 내 손이 차가운 건 아닐까. 


그녀도 느껴서 였을까. 오히려 내 손을 꽈악 쥔 채로 말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나를 배려해주는 그녀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나는 방향을 바꾸려 제자리에 멈추었고 당황이라도 한 것인지 이번엔 그녀가 멈춰선 나를 올려다 보았다. 


" 갈 곳이 있어. 미안하지만 따라와 줄래? " 


" … 뭘 새삼스레 그래요? 처음부터 제멋대로 였으면서. " 


속으로는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나는 지정해둔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병원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을 때 집을 하나 구해뒀다. 덕분에 통장에 남은 돈은 거의 빈털터리였지만 어쩌면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마지막으로 가기 전 남기는 내 삶의 흔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정확히는 욕심이 맞겠지. 


목적지에 도착하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에게 애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 내가 불순한 의도로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있다고 생각할까 싶어 불안했지만, 굳이 변명은 꺼내지 않았다. 

그야, 집 문을 여는 순간 깨닫고 말 테니까. 


도어락이 열리고, 혼자 살기에는 조금 넓지 않나 싶을 정도의 아담한 내부는 그녀에게 궁금증을 자아냈을 것이다. 


" 뭐에요? 누가 살고 있는 집 치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 


" 여기, 집 근처야? " 


" … 그건 그렇긴 한데, 왜요? " 


" …… 춥잖아. 겨울은. "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현관에 서서 가만히 내 뒤를 응시하던 그녀는 내가 말 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그제서야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제 부탁했던 대로 침대와 같은 기본 가구류는 이미 설치되어 있었고, 가전제품도 전부 들여 있으니 아마 잠시라도 지내는 것엔 문제되지 않겠지. 

참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큰 돈을 들여 평생 번 돈의 대부분을 소비했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몸이 또 무거워지는 것이, 이젠 이 정도로만 움직여도 한계인가 싶기도 하다. 아침의 나는 그저 신이 잠시 도움을 준 것 뿐이었을까.


" 그래서 도대체 뭔데요. " 


" 말 했잖아. 추우니까 여기 있으라고. " 


" … 아저씨 장난치는 거에요? 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하는 게 더 쉬운 일 아니에요? " 


" 네가 싫어하잖아. " 


" … 아저씨. "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버릴 것 같아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버렸다. 

그런 나를 부르며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자세를 굽히고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갈색 눈동자엔 내가 비추고 있었고, 그제서야 나는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었다. 


처음보다 많이 밝아졌구나. 원래 이렇게나 예쁜 색으로 빛나고 있었구나. 


" 날 봐요-. 잘 들어요 아저씨. 내가 필요한 곳은 아저씨 곁이지 아저씨가 없는 곳이 아니라고요. "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훅 들어온 그녀의 언행에 어쩔 줄 몰라 그저 얼어있었다. 

기뻐해야 할까? 분명 기쁜 일이 맞지만, 나는 그 달콤한 감정을 결코 끝까지 음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와 닿을 정도로 늦어버렸다는 것을. 

심장은 요동치고,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었다. 


" … 약속 하나만 하자. " 


" 말해봐요. " 


" 죽지 마. "


" 내일도 자살할 거에요. " 



" …… . " 




" 그러니까, 내일도 만나요. 제가 죽는 걸 막아줘요. " 




어째서일까. 


그 짧은 한마디. 평범한 대화도 아닌 이 무언가가 내 어디를 자극했길래. 


다 커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일까.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역시 난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소원을 이뤘다는 기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거라는 공포 때문일까.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이모든 것이 전부 다 뒤섞이고 뒤섞여서 금방이라도 사고가 멈출 것만 같았다. 

머리는 온통 까맣게 물들어 있는데, 왜 이 안에서 너라는 사람은 이렇게도 밝게 빛나고 있는 걸까. 


" … 그래. " 


거짓말.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해야만 했다. 


그저 기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라는 사람에게 난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아니, 내가 너무 깊이 들어가 버린 걸까. 


평행선과 같이 결코 만날 수 없는 관계가 될 텐데. 어쩌면 시작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욕심과도 같은, 꿈과 같은 소원임을 알면서도. 나는 마지막까지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착잡했다. 그럼에도 내 눈물을 애써 닦아주는 그녀 탓에 더욱 슬피 울거나, 일그러진 표정을 그릴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희망은, 어느샌가 내 남은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고, 그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될 수 없음에. 


" 죽지 않겠다고 해줘. " 


" 좋아요. 약속할게요. 대신. " 


말을 끊고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한마딜 툭 던질 뿐이었다. 


" 약속. 아저씨도 지켜야 해요. 꼭이요. " 


차마 긍정은 하지 못했다. 

본인은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에게는 강요하는 꼴이라니. 

나 자신이 한심하고 또 한심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내일도 내가, 널 만나러 갈 수 있을까? 






*






오늘 따라 유난히도 추웠다. 


그리고, 늘 불행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찾아온다고 했던가. 

나는 아마,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추울텐데. 내가 오지 않으면 알아서 집에 들어가 있겠지.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마지막까지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머릿속은 천천히 암전되어가듯 꺼지기 시작했다.


그저 희망 뿐이었을 발걸음은 그렇게 짓밟히듯 으스러졌다. 


다시 한번 꿈을 꾼다. 

제발, 살아 달라고. 

다시 한번 꿈을 꾼다. 

부디, 행복 하라고. 












*












깊은 심해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던 의식이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온다. 

신기한 감각이다. 마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은 묘한 감각이다. 


여느때와 같이 익숙한 비프음과 새의 울음소리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었고, 시야 틈으로 보이는 하얀 빛 조명은 아직 내 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 조금 피곤함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것도 없는 몸 상태였다. 

곧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의사는, 전에 봤던 의사와는 다른 의사였다. 

기구들도 여간 심상치 않은 것이, 아무래도 어디 상급 병원으로 실려온 듯 했다. 


" … 참,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환자분, 괜찮으십니까? " 


" 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 


" 치료는 전부 끝난 상태지만, 그래도 당분간 격렬한 활동은 자제해 주시고 무리는 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 


헛된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 눈을 뜬 채로 볼 수 있는 꿈이 되어 있었고, 그토록 갈망하고 갈구했던 현실은 다시금 희망으로 차오르는 듯 했다. 

허나 다시금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 혹시, 지금이 몇 일입니까? " 


" … 3월 19일 입니다. " 


머리를 한 대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잊고 있던 중요한 기억의 파편이 다시금 맞춰지듯 억지로 움직이던 머릿속은 금방 복잡해졌고, 추가로 덧붙여진 말은 나를 패닉상태에 들게 하였다. 


" 환자 분께서 쓰러지신지 450일이 지났습니다. " 


당황한 나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겨를도 느끼지 못한 채, 이것 저것 다급히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 혹시, 혹시 절 병원으로 데려온 게 누군지 아십니까? " 


" 글쎄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지나가던 시민 분이 신고하신 걸로 압니다만. " 


" 제 병원비는… . "


"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족분이 내주셨습니다. " 


가족, 가족… . 

헛웃음이 세어 나왔다. 

그토록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그래도 가족이라고 챙겨줬구나. 도대체 그게 누군지는, 지금 당장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감사인사라도 하자며 머릿속 어디 구석에 곱게 접어두고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물음을 쫓았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까?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없는 게 아닐까. 


몇 번이고 날 막아서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 더 소원을 빌었다. 




제발, 그녀가 아직 살아있기를. 







*







걸음은 여느 때보다 다급했고, 또 불안에 젖어있었다.

늘 걸어 다니던 거리였건만 평소와는 달리 삭막함이 감돌았으며, 불안감에 휩싸인 시선은 이리저리 주변을 훑기에 바빴다. 

이윽고 도착한 그녀와 처음 만난 다리였지만, 혹시나 하는 희망은 역시나, 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바란다는 것은 그저 욕심이 될 뿐이겠지. 

그럼에도 나는 또 한번 걸음을 옮겼다. 

혹여 그 집에는 그녀가 있지 않을까 하며. 


조급함에 성급해진 발걸음은 숨을 거를 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고, 울리는 심장 박동은 어떤 이유인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다급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두르고 들어간 공간. 

그리고 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최근까지도 사람이 있었다는 듯이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 거실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찾았던 그녀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을까. 그로부터 수없이 긴 시간이 흘러버렸는데. 


허나,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 나는 다시금 일어나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포스트잇과, 동글동글하게 쓰여져 있는 글씨들. 


그중 제일 위에 있던 포스트잇을 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차마 억제할 수 없었다. 




『 아저씨. 오늘 크리스마스인 건 알고 있어요? 내가 꼭 나오라고 했는데. 선물도 준비했는데. 』 




그리고 적혀진 1. 이라는 숫자. 

나는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린 것으로, 그 숫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백 개의 포스트잇 모두, 하루 하루 빠지지 않고 적었다는 것. 


흘러내리던 눈물은 턱선을 타고 들고 있던 포스트잇으로 뚝 떨어져, 선물이라는 글씨를 적셨고 나는 흐릿한 시야로 계속 이어진 포스트잇을 갈구하듯 떼어내 읽기 시작했다. 



『 사실 알고 있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전부 알려주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전 기다릴래요. 그리고 또 자살할 거에요. 그러니까, 꼭… 와주셔야 해요. 』



『 있잖아요 아저씨. 나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왠지 내가 졸업하는 날엔, 아저씨가 꼭 와줄 것 같아서요. 그날만 학교를 갈 순 없잖아요? 친구들도 소개시켜주고, 이 아저씨가 내 남친이라고 진짜 착하다고… 』 



『 이제 손목 마음대로 잡아도 돼요. 그때 신경 쓰셨잖아요. 사실 진짜 아팠는데. 그래도 이제 상처도 다 아물었고 괜찮아요. 이젠 마음대로 끌고 다니셔도 괜찮다는 얘기니까, 빨리 와요. 』 



『 사실 저도, 아저씨한테 말 못한 비밀이 하나 있어요. 그래서, 아저씨 치료비도 전부 제가 냈어요. 부모님께 이 사람이 제 남자친구라고 말하니까 흔쾌히 내주셨어요. 그러니까, 꼭 돌아와요. 나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 아저씨, 그거 알아요? 저 학교에서 고백 엄청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다 거절했어요. 빨리 잘했다고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 



『 사람들이 가을탄다고 하면, 솔직히 잘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을지도. 』 



『 보고 싶은데.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에요? 』 



『 …… 보고 싶다. 』 



『 아저씨 때문에 난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서 와서 내게 살 의미를 줘요. 나 이제 정말 아저씨 없으면 안될 것 같아. 』 



『 … 졸업식이었는데. 나 이제 성인인데. 아저씨. 아니, 오빠. 이제… 눈 좀 떠주면 안될까. 』 



『 하루 하루가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 있으면 계속 아저씨가 올까 봐. 매일 마다 부모님이 엄청 걱정하신다? 하루에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계속 서있어. 혹시나 오빠가 날 찾아오지는 않을까. 』 



『 너무 궁금해서 한 번 보러 갔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출입 금지 시키던데… 조금 힘내서 들어가니 오랜만에 오빠 얼굴 보니까 좋더라. 기적이 일어났대. 맞아. 기적이야. 이제 진짜 오빠를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얘기겠지? 』



『 집안 사정 때문에 이제 슬슬 바빠질 지도 몰라. 그래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어. 부모님한테 엄청 혼났다? 그래도 난 기다릴거야. 사랑하니까. 』 



『 … 나 엄청 힘든데. 이상하다. 분명 의사 선생님 말로는 금방 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하루가 긴 걸까… . 』 



『 나 진짜 이제 죽어버릴 것 같아. 조금만 더 견디면 되겠지. 조금만 더, 더… 언제까지, 제발… . 』 



『 오빠. 오늘이 1년 째 되는 날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 내가 성인이 되고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라는 소리야. 이런 날 오빠랑 같이 있어야 하는데… . 선물도 준비했단 말이야. 아니지, 이제 선물이 아니야. 이제 난 오빠꺼니까. 제발 와서 날 가져주면 안될까. 』 



『 춥다. 오빠 손 따뜻했는데. 곧 봄이야. 오빠랑 같이 꽃구경도 가고 싶다. 』 



『 나 일이 생겼어. 아마 당분간 오지 못할지도 몰라… . 』 



『 나 이제 내일부터 당분간 여기 없어. 그래도 나는 언제 까지고 기다릴 거야. 그러니까, 꼭 돌아오면 연락해 줘야 해. 010-xxxx-xxxx 

사랑해 오빠. 』 



어느샌가 눈물 범벅이 된 포스트잇은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안도와, 날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한없이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내 약속을 지켜줬구나.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내 손은, 통화 버튼 만을 남겨두고 멈추었다. 


감정에 휩싸여 충동적이었던 손은, 금세 미약하게 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한 순간에 터진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온,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가 이제서야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녀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에 나 같은 남자가 필요할까.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갈팡질팡 거리던 이성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아니지… 이게 무슨 말인가. 날 누구보다 믿고 기다려준 그녀인데. 

당장에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살리려던 사람이, 날 이렇게 살려주었는데. 


망설이던 손가락이 액정을 한번 터치함과 동시에, 통화음이 적막한 공간을 가득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 


" … 여보세요. " 


왠지 예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허나, 불안스러웠던 점은 그녀의 목소리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갑디 차가웠고, 생기 따위는 없는 목소리가 짙게 내려있다는 점이었다. 


" … 살아있었네. " 


그리고 또 한번의 적막. 

돌아왔다는 사람이 하는 인사 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말을 고를 틈도 없이 금세 핸드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한번 더 울려 퍼졌다. 


" 어디야. " 


" … 어? 여기, 그 집이지… ? " 


뚝- 


갑작스레 끊겨버린 전화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핸드폰을 바라봤지만, 확실히 전화를 걸기 전 번호를 입력한 화면에 넘어와 있었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걸어보니 그녀는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았다. 


도통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문자라도 남기려던 찰나, 읽지 않은 포스트잇 뭉텅이가 남아있단 것을 확인했고 나는 궁금증에 포스트잇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뒷 내용은 분명 없었을 터인데… . 


그리고, 나는 포스트잇을 넘겨 나갈 때마다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540도 드리프트 주의---------------------------------------------------------------------------






















『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












등골이 서늘해진다. 분명 춥지 않은 계절인데, 벚꽃이 흐드러 지게 핀 3월인데. 그럼에도 오한이 느껴졌다. 


온 페이지를 뒤덮고 있던 자그마한 글씨는 전부 한 단어의 반복이었고, 묘한 공포에 휩싸인 내 동공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이리저리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조금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포장된 거대한 선물 박스를 발견했다. 


궁금증에 선물 박스를 천천히 열어본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박스 안에 들어있는 수도 없이 많은 또 다른 박스들은 전부 콘돔이었고, 심지어 박스 아래에 숨겨져있던 결박기구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하다 못해 과분할 정도였다. 


무언가 잘못되어감을 느끼던 와중, 덜컥- 하는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불안한 발걸음을 옮겨 소리의 근원지로 걸어갔다. 


다름아닌 현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보니.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문고리를 흔들어도, 도어락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저히 시작점을 파악할 수조차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면서, 분명 그렇게 말했던 그녀의 감정은 이 긴 시간 동안 어딘가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한 소리.


삑삑삑삑- 띠리링. 


그리고 들려오던 또각, 또각 거리던 힐의 소리는 얼마 못 가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시야를 올려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윽고 맞닿은 그녀의 시선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도저히 오랜만에 재회한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색으로 물들어져 더 이상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새까만 검은색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 아… 늦었네 오빠. 너무 늦었어. " 




" 잠, 잠깐, 우리 오랜만인데 얘기를 우선… . " 




" 얘기는 앞으로도 잔뜩 할 수 있는데? 아… 그거, 이미 열어버린 거야? 뭐 어쩔 수 없지. 밀린 만큼 오늘 다 쓰자? 정확히 450개. " 




" ㅈ, 잠깐만 진정하고- " 




" ── 오빠가 그랬잖아. 분명 뭐든 다 해주겠다고. " 




" 그러니까 그건… . " 




" 그리고, 결혼해주겠다고 했잖아. 이제 와서 도망치려고? 절대로, 이제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 




" … 아, 그러고보니까. 이제 성인이라 저것도 필요 없겠네? "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들어오던 그녀는 어느덧 나체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저항하지 말라는 듯 내 두 손목을 움켜쥐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날 내려다 보고 있었으며, 새빨갛게 물든 입술은 파르르 떨리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 나, 정말 오래 참았어. 그러니까… .  " 








" 하자? 죽기 전까지… ♡. " 





원본: https://arca.live/b/yandere/80488782/406288388#c_406288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