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주의>
-오타 있을 수 있음!
-단편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해 개연성에 조금 문제가 있을 수 있음!
<간단한 설정>
무한히 많은 인격이 모여 만들어진 신(절대적인 능력을 가짐)
그것의 파편이 세계에 떨어져 인간이 품게 되면 초월적인 힘을 갖게 됨
부디 재밌게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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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녀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참 어릴 때에 들었던 목소리였기에 이제는 그의 이름이나 얼굴, 다른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말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일의 원흉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국 변방의 어느 작은 도시. 그 안에 있는 더 작은 집에 아버지와 함께 둘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어린 소녀는, 고작 산책을 나갔다가 거대한 빛이 자신을 덮쳤다는 이유로 성국의 성기사가 되어야만 했다.
-아빠…, 나 가기 싫어….
하지만 그래봤자 아직 어린 소녀는 그 큰 일을 알지도 못했고, 감당할 방법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친부와 헤어지기 그의 뒤에 숨어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성국을 위해서라면…, 고작 이 미천한 종의 딸아이가 어찌 아깝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런 소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던 사람.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 날마다 흥해가는 성국의 중심부와는 달리, 온갖 횡포와 악재에 치여 점점 망가져가는 이 변방에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로 불릴 수 있는 이유.
그녀에게 있어서 신이란 존재는 다른 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신에게 버려진다는 것이 고작 십대 초반의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감당이 될 만한 충격일 리가 없었다.
정식 성기사 수련을 마치고 난 이십대 초반의 그녀가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땐, 으리으리한 집들과 번쩍거리는 금은보화가 마을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작 돈이 뭐라고, 쾌적한 삶이 뭐라고.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딸을 팔아다가 호의호식하고도 그녀의 아버지는 슬픈 기색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이미 그녀가 성기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녀는 고아나 다름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날 자신의 머리와 마음 속에서 마을을 도려내었다. 마치 옳은 선택을 하였다는 듯, 성자는 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온 그녀를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악’을 처단하시는 겁니다. 세레니아 님.
그 날, 그녀는 그곳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어두고 성국으로 돌아왔다. 단 하나, 이 지옥과도 같은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를 빼고.
***
“데온 님, 전투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적들이 오는군요.”
“…그래? 에휴, 저 끈질긴 것들. 언제쯤 그만둘려는지.”
그리고 이곳에, 멋대로 주어진 본분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이가 또 하나 있었다.
분명히 피와 살이 튀기는 잔혹한 싸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남자는 미세한 동요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분노, 후회, 그리고 그보다 더한 심연의 그것들이었다.
“아시잖습니까, 설령 저들이 전쟁을 그만둔다 해도 저희는 끝까지 쫓아가 그들을 멸망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그는 다시 한 번 전장으로 내려갔다.
‘ㅈ같은 마왕의 유언 같으니.’
셀 수 없이 많은 마왕의 군대 앞에 선 총사령관 데온은 마치 목줄처럼 자신의 목에 새겨져 있는 마계의 주문들을 매만졌다.
마계의 절대자. 마왕의 명령의 흔적. 지키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듯 주문들은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그의 목을 옥죄어 왔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부사령관이 그의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뭐가.”
“저들의 수명 말입니다. 길어야 백 년이란 말이죠. 마인들이나 저희 흡혈귀 같이 수백 수천년을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
마치 무슨 말이 뒤따라올 지 안다는 것처럼 데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회의적인 듯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부사령관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어떻게 세대를 걸쳐서 저희와 끈질기게 대적할 수 있을까요?”
부사령관의 말은 그 스스로도 수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그 안에서도 더 절망적인 삶을 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은 너무 짧았고, 희망도 없는 확실한 죽음에 몸을 던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살고 싶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곳에서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는 눈앞에 사내가 주는 것은 헛된 희망, 거짓된 약속임을 알고 있었다.
-마셔라.
단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는 그 한 마디에 짓눌려 온 몸을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느꼈다.
‘저것이 진짜 자유구나.’
지독하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되었던 집에서 태어났지만, 버려졌다.
훔쳐먹을 수 있는 음식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흙을 퍼먹으며 똥물을 마셔야 했었다.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의 손을 잡고, 마왕이 주는 피를 마신다.
그에게 있어서 마왕의 그 손은, 절대 헛된 희망이나 거짓된 자유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위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얻을 수 없었다.
마왕이 준 피를 마셔 흡혈귀가 되었다.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어쩌면 마계의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갖고 다시 태어난 그는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 마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는 목줄은, 마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쟁의 노예로 만들었다.
***
“웃기지 않나?”
쇠와 쇠가 부딪히는 마찰음이 끝없이 일어나고, 함성과 비명이 공명하여 온 땅과 하늘을 벼락같이 울리는 전장.
그런 전쟁터에서 별안간 어울리지 않는 요란하고 경박한 웃음소리가 온 전장에 쩌렁쩌렁하게 퍼졌다.
“푸흐하하하하! 어째서 그런 전쟁을 계속하는 거지? 어째서 명을 재촉하는 것이냐?”
“누가 너를 그 자리에 이끌었지, 너 스스로인가? 아니면 이 기구한 운명인가?”
“고작 너 하나의 죽음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정도 말에 흔들릴 긍지로 무엇을 바꾼다는 것이지?”
사기를 낮추고 힐난하는 말을 쉬지 않고 적에게 쏘아붙이는 데온, 그런 그의 말에 성국의 기사들은 그들의 찬란한 빛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데온이 본 그들의 모습,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결국에는 나약한 마음이 진짜 죽음 앞에서 생을 갈구하는 그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한 장면에 불과했다.
쾅!
“그렇게 뒤에 숨어있지 말고 나와서 말해.”
그리고 더 이상 그런 꼴을 못 보겠다는 듯, 한 명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밝고 찬란한 광채가 겹겹이 쌓인 마왕군을 순식간에 돌파해 데온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단 한 번의 돌파에 마왕군의 일할이 궤멸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돌파한 그녀의 모습에, 한순간 전장에 있는 모든 것들이 멈췄다.
“아직도 성국에 너 같은 전사가 있었나?”
그리고 그것은 데온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낀 생명의 위협에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풉, 명을 재촉하는게 누군지 모르겠네.”
“……추한 모습을 보였군.”
하지만 동요도 잠시, 바로 정색하며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눈앞에 빛을 몰아내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내 이름은 데온이다.”
“…세레니아.”
다시 한 번 침묵이 감도는 전장은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백 년에 걸쳐서 마왕의 모든 간부들과 군대들을 궤멸시켰던 성국의 위대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또 다시 수백년 동안 싸운 이유, 바로 저 데온 때문이었다.
반대로 수백 년 동안 질질 끌린 싸움을 고작 십여년 안에 마무리 단계까지 이끈 성국의 성기사, 그것이 바로 세레니아였다.
둘은 서로가 서로의 적수였고, 그뿐이었다. 이외의 누구도 현재 그들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 중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것 같지?”
“…그런 것 같군.”
일촉즉발의 상황, 끈임없이 수싸움을 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둘. 결국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세레니아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왜 아직까지 싸우는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녀의 말에 반문하는 데온이었지만, 이미 그의 눈빛을 확인했던 세레니아는 확신의 찬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듣는 귀가 너무 많은 것 같으면 줄여주지.”
쉭!
“끄아악!”
“으아아악!”
단지 가로로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엄청나게 큰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자 이상함을 느낀 데온을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순식간에 절반이나 더 줄어든 마왕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 있던 몇몇 성기사들까지.
말 그대로 데온을 제외하고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검에 의해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데온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떨림은 팔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고,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온 몸은 마치 마왕을 처음 마주한 그 때를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는 그녀는 그 안의 어딘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데온. 나이 현재 300세, 성별은 남성. 시궁창 출신의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버려지고, 마왕에 의해 흡혈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왕 아래 최강의 자리에 올라 마왕이 죽은 현재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마왕군을 이끌고 있다라….”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마왕이 다 불었으니까 알지.”
세레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데온을 향해 수첩을 던졌다. 수첩을 받은 그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 말고도 수백년 전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마왕군 간부들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어… 어떻게 이걸…!”
“너네 마왕이 말했다니까, 그 망할 성자랑 같이 자멸하는 꼴은 보기 좋았지.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아는 걸 다 말하면서 고작 한다는 복수가 자기 군대에게 ‘끝까지 싸워라’ 라고 말하는 거라니.”
한심해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듯, 그녀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듣는 게 좋을거야, 흡혈귀씨?”
고혹적인 목소리의 속삭임을 끝으로 그 날의 전투는 그렇게 내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
“다들 마지막에 그거 봤어? 그냥 가로로 한 번 휘두른 공격 한번에 마왕군 절반이 날아갔잖아!!”
“맞아, 역시 세레니아 님이라니까! 어떻게 그렇게 강하실까, 아름다우시기도 하고 말이야….”
“말 조심해, 그런 말을 막 내뱉었다가는 오늘 그분 곁에 있던 사람들처럼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지도 몰라!”
필요에 맞지 않으면 아군도 손쉽게 썰어버리는 무자비한 인상을 가진 그녀였지만, 성국의 그 누구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평할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길 원하는 것이 그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느 하나 불평 없이 그녀의 선택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길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뭔가 이상했단 말이지…, 총사령관이었잖아! 그 놈만 잡으면 이 전쟁도 끝이라고!”
“에이~ 그렇게 보여도 엄청 강했었나보지. 아무래도 순식간에 적을 많이 쓸어버린 세레니아 님 쪽에서 힘이 빠지셨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세레니아님이?”
“그렇다기엔 너도 상대해봤잖아? 마왕군, 절대 일대일로는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단 거. 제아무리 세레니아님이라도 그 정도의 수를 일격에 정리하면 무리가 있을수도 있지.”
한편,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막사에서 온전히 듣고 있는 세레니아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가장 먼저 새벽을 깨우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살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듣는 게 좋을거야. 흡혈귀씨?
전투의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남자의 경험은 전무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다른 마왕의 권속들과는 다르게 매력적인 인상을 타고난 흡혈귀를 보고서는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었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절대 그 눈빛 때문이 아니야….’
그녀 나름의 핑곗거리이기도 한 데온의 눈빛. 그 눈빛은 자신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생을 갈망하면서, 자유를 원하는 그 눈빛.
어떻게 수백 년을 마왕의 권속으로 살아온 이가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지는 같은 눈빛을 한 그녀로서도 의문이었고, 결국 외형으로 인한 연정이라고 합리화를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악’은 절대로 그런 눈빛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수많은 모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그녀는 그 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데온은 자신의 침상에 앉아서 목을 연신 매만졌다. 그는 ‘마왕의 저주’ 라고 일컫지만, 사실은 축복과도 같은 그것은 마왕의 힘의 근원인 신의 파편에서 유래된 그것이었다.
총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이후 마왕의 자신의 진전을 잇기 위해 그에게 준 것이지만, 사실은 그냥 보이지 않는 구속구와도 같았다.
어긴다면 죽음뿐, 자유를 갈망하던 그의 유일한 실수라고도 볼 수 있는 그것이었다. 또한 그것조차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한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해방한다 해도 그는 그녀를 온전하게 이길 수 있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왜 나지?’
그와 동시에 생긴 하나의 새로운 의심은, 도대체 왜 자신은 살려서 돌려보냈냐는 것이다.
물론 다른 간부들과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기에 그녀의 전투방식에 대해서 판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고작 십여 년의 활약으로 전쟁의 막을 코앞까지 끌어당긴 이의 정보가 아예 없을 리는 없었기에, 그는 세레니아라는 인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성국 변방 출신에… 현재 이십 대로 추청된다라…, 어?”
데온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수록 점점 자신이 알고 있던 누군가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거…, ‘신의 파편’ 보유자 아니야?”
신의 파편, 셀 수 없이 많은 무한한 인격들이 하나로 뭉쳐 만들어진 신에게서 떨어지는 파편으로, 하나하나가 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알려진 보유자는 마왕과 성자이지만, 데온은 한 명을 더 알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마왕 그놈이 생전에 그렇게 고집한게 힘의 균형이었는데, 진작에 죽였겠지….”
***
한 사람과 한 사람이었던 흡혈귀, 둘 모두에게 찝찝했던 밤이 지나고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
“…”
승부의 결착은 결국 둘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성국의 군대와 마왕의 군대는 멀찍이 떨어져서 두 사람의 조용한 대치를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왜 그래? 어제처럼 그렇게 강하게 나와봐.”
어제와 달리 우물쭈물대는 세레니아의 모습에 약간은 긴장이 풀린 데온은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데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야, 너 신의 파편이냐?”
“…으, 응?”
“신의 파편이냐고, 뭔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세레니아. 매혹적이고 강인한 모습의 성기사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데온에 눈에 비쳤다.
결국 이 상태로 전투는 무리라고 판단한 데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세레니아는 일단 검을 뽑아들었다.
정신상태는 맛이 갔어도 그 힘은 어디 안가는지, 어제의 그 찬란한 빛은 여전히 검에 서려 있었고, 그것을 본 성국의 기사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아!!!”
“그놈을 죽여버려요!!!!!”
“전쟁을 끝내자!!”
‘지금 니들이 붙잡고 있는 희망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 데온에 모습에 얕보였다고 느꼈는지, 세레니아는 조금 과하게 검을 앞으로 내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지 말고 너도 앉아. 우리 얘기나 좀 해보자고.”
“내, 내가 왜…!”
“어차피 언제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냥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고 좀 어울려 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
“그냥 빨리 앉아.”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짓으로 온갖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며 데온을 따라 자리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칭찬을 간절히 바라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세레니아를 자리에 앉힌 데온은 혹여나 그녀가 정신을 차릴라 빠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 대다수였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한 본인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불쌍해.”
“뭐, 그럴 수 있지. 잘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망가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잖아? 그래도 나는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
“…아니, 넌 후회하고 있어.”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상당히 데온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데온에 비해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깊이가 절대 데온보다 얕다고 할 수는 없었다.
“널 만났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 건 처음 봤어….”
자유를 갈망하는, 정해진 선택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 눈빛은 그녀의 마음을 울렸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며 묻어뒀던 어린 아이의 자아를 깨어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성자는, 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게 ‘악’이라고 정의했어.”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언젠가는 이 지옥 같은 굴레를 벗어나길 소망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부를 이루는 것 또한 그녀의 바램은 아니었다.
“단지…, 단지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건 안되는 거였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데온은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왜 나여야 했을까.”
데온은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세레니아 대신 마지막 말을 해 주었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더욱 더 심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 눈빛이 ‘악’이라고 정의된 자의 것이겠어?”
“…그, 그러면 악은 뭔데? 누가 정의한 건데?”
수많은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데온은 도리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고작 십여 년, 수백 년을 사는 흡혈귀에게 있어서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억겁의 시간이었다. 신의 파편을 받은 이후 그녀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가? 신의 파편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저 마왕의 권속이 되어 마계에서 살아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강제되지 않았다.
그것이 구속구라고 생각하여 벗어나려고 한 것은 그저 자신의 선택이었고, 헛된 희망, 거짓된 자유라며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유일 뿐이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자유가 무엇이었는가.’
수백 년의 전쟁으로 무뎌진 그의 감정 너머에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마왕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줬을 뿐. 그 뒤에는 모두 데온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가족을 죽이고, 마을을 죽이고, 나를 죽이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너가 그런 눈을 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하지만 지금의 데온은 그의 거짓된 눈빛에 희망을 찾은 세레니아의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그런 눈빛을 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합리화를 해가며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완전한 고립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떠날까?”
그리고 또 한편으로 느낀 책임감은, 그가 무모한 선택을 하도록 이끌었다.
“…어디로?”
“어디든.”
“둘만?”
“데려갈 사람은 있고?”
그녀는 데온의 목에 있는 마왕의 표식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정말 신의 파편을 받은 거야?”
“내가 알기론, 아마 그럴걸?”
“네 목에 있는 그것도,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거지?”
“그렇지?”
그녀는 찰랑거리는 금발을 뒤로 넘기며 목을 보였다. 데온은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그녀를 말렸다.
“다,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데온은 그저 흡혈귀가 되고도 마왕에게 힘을 공급받아 한 번도 피를 빨아보지 못해 당황스러워할 뿐이었지만, 세레니아는 그 행동이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듯해 보였다.
“…너도 똑같구나.”
“아, 아니야! 그….”
결국 하는 수 없이 데온은 사실을 말해야만 했고, 세레니아는 귀엽다는 듯 쿡쿡 웃었다.
“괜찮아, 안 죽어.”
그러면서 마치 키스를 하듯 데온의 머리를 잡아 이빨을 자신의 목에 박았다.
“…맛있네.”
처음 맛본, 그리고 아마 앞으로 유일한 식량이 될 그것이 목을 타고 넘어올 때, 데온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감격이었다.
목에 있던 주문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그는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고마워.”
“몰라, 기분이 이상해.”
분명히 피를 빨렸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피가 많이 몰린 것처럼 붉은 홍조를 띈 세레니아의 모습을 데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떠날까?”
“그러자!”
쾅!
순간 엄청난 힘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며 알 수 없는 빛이 전장에 중심에서부터 퍼져나와 주변을 밝혔다. 빛이 꺼지고 나서 성국의 전사들과 마왕의 전사들은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결국 전장의 판도를 가를 두 중요한 인물이 증발하듯 사라지자, 성국과 마계는 휴전을 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또 다른 신의 파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
“정말로 여기가 괜찮겠어? 여기는 성국하고도 조금 가까운 것 같은데….”
“괜찮아, 오히려 나는 여기였으면 좋겠어.”
데온과 세레니아가 도착한 곳은 이제는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형체를 잃은 어떤 장소였다.
하지만 데온은 이곳이 그녀가 원래 살던 마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버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의 유일한 추억이 남아있던 곳이야.”
좋지 않은 추억을 새로운 좋은 추억으로 덮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데온은, 단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대견해 꼭 끌어안아줄 뿐이었다.
“근데 이건 뭐야?”
잠시 떨어진 데온은 자신의 목에 새겨진 새로운 문자들을 보며 말했다.
“아, 그거? 그건 말이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꺼려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 표정의 데온을 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벼, 별거 아니야! 단지…, 나한테서 못 벗어나게 하려는 것 정도….”
“아.”
데온은 여러모로 미숙한 이 아이를 이지경이 될 때까지 키운 성국을 떠올리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지만, 나름 기분도 나쁘지 않고 결국 자신이 키우면 된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더 이상 이 세계의 안위는 그들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집중했고, 서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제로, 공허함을 채워주는 사랑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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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왔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