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까 순애 비스무리한 거 한 편 썼는데 올려도 되나 모르겠다. 

그래도 안 올리면 아까우니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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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전직 용사의 일기.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그건 잘 모르겠다.


성녀인 채로 죽었으니 아마 천국에 가지 않았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사람이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제 잘 알겠다.



***



너와 함께 있을 때 내 세상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베릴. 그래. 언제나 두 글자라서 간결하고 좋은 이름.


네 이름은 베릴이었다.


잠시 네가 있던 과거를 떠올려 본다.


아직 내가 어렸던 시절, 우리 마을에서 나는 친구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네가 내 친구가 되기 전까지는.


성격이 괴팍해서.


몸에 기괴한 흉터가 있어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른들한테 대드는 싸가지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항상 겉돌았다.


왕따를 당한 건 아니었다.


나무꾼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빌어먹을 용사의 운명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힘은 더럽게 셌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고, 아무도 내게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어린 시절.


나는 마을 아이들의 몽상 속에서나 나오는 외로운 괴물이었다. 


그리고 베릴.


너는 힘없이 울고 있는 괴물에게조차 손을 내밀어 주는 아이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 귀 옆에는 언제나 라벤더를 꽃고 다니는,


일관성 있는 생김새를 가진 아이였다.


어찌 보면 특이하고, 어찌 보면 순진한.


그런 아이라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 아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내 모든 처음이었을 것이다. 


첫 친구이자, 동료이자, 연인이었으며,


가족이 될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바라던 일이었고. 


네가 지금, 첫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내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



오직 검은색과 하얀색.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던 내 마음이, 


베릴과 함께 있을 때에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빛을 담아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낸 그 빛의 이름은 사랑이었고, 색을 빌려 표현하면 무지개였다. 


이름이 두 개든 어쨌든 그걸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었다.


이름보다 더 중요한 건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다.


신성한 적막이 감돌았던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을 받으며 기도하던 베릴,


가까이 가면 쓰러질 것도 모른 채 다가가고 있던 나, 


결국 쓰러지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과 같은 것들.


사랑은 너무나도 찬란해서, 이제는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이제는 그녀가 있던 시절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마음에 죽음으로 아로새겨 상기시켜 주었다.


원래 추락은 높은 곳에 있을 때 더 아픈 법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모든 비상이 추락을 위한 것은 아닐 텐데.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베릴을 사랑하고 있는데, 


한순간에 그녀가 없는 세계로 끌어내려진 것이다.


오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다.


이제 내 세계는 다시 흑백이 되었다.


아마 다시는 색을 보지 못하리라.



***



용사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입은 안 달렸지만 말할 수는 있는 성검이 그리 말했었다.


망자를 기억하고, 전쟁을 기억하며,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 모든 과거의 편린을 기억하고 미래의 평화를 가져와야 할 존재가 용사라고.


성검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래서 나는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엇을?


자신의 이름. 직업.


그리고 과거와 현재.


에릭. 마왕을 죽여 쓸모를 다한 용사. 


그리고 시든 라벤더를 머리에 꽃곤 했던 아이와 라벤더 향이 나는 나무 관 속의 시체. 


시체는 외롭게 죽었다. 왜인지 다른 동료들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 다 끝난 장례식장 안에 있는 건 나뿐이다.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철학적인 사고를 해 본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잊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잊고 싶은 것을 잊지 못한다는 게 아닐까.


나는 그녀의 모든 모습을 기억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습조차,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성검에 묶인 내 운명이 가여웠다.


이것도 베릴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까지 내 처음을 가져가려는 걸까.


내 장례식이 시작될 때쯤엔 그만둬 줄지도 모르겠다.



***



3일이 지났다.


사실 3일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은 고향 마을에서 했고, 나는 이제 텅 빈 집에서 혼자 외롭기만 했다.


시간 감각이 흐려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제부터 눈앞에 계속 라벤더가 아른거린다.


성녀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항상 머리에 꽃을 달고 다녔던 그녀가 신의 힘을 빌려 치는 마지막 장난일까.


시야에 들어오는 보라색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아, 그리고 또 드는 생각이 있다.


누가


베릴을


죽였을까.



***



사실 나는 그녀가 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신의 뜻인 줄로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멍청한 생각이다.


베릴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


코에서,


입에서,


귀에서,


갑작스럽게 세 구멍에서 피가 왈칵 튀는 꼴을 보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건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패닉에 사로잡히기 전에 이성을 되찾아 가까스로 의사를 불러왔다.


팔다리는 힘없이 쳐졌고,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멀쩡한 건 오직 그녀의 눈과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오래도록 느꼈다.



***


그녀를 진찰하고 부검한 것은 제국 최고의 명의라 불리는 인간이었다.


오크 군락에서 사지가 잘린 채 구출된 엘프 또한 그의 수술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일화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베릴의 사인을 의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부검 결과로 독극물이나 타인의 마력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암살이라면 솜씨가 아주 좋은 자의 짓일 것이 분명한.


의문사.


그녀의 죽음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의사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 되었다.


장례가 끝난 지금까지도,


혹은 앞으로도 영원히.



***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증거가 없다면. 흔적이 없다면.


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의심이 가는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심문하는 것.


오늘, 활력 없던 삶에 드디어 새 목표가 생겼다.


계획을 세워서 하나하나 철저히 파고드는 게 좋겠다.


종국에는 어쩌면 그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데드도 부리는 세상에서 사람을 되살리는 금술 따위가 없을 리 없으니까.


그랬으면 좋겠군. 


목표가 생긴 것에 기뻐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다시,


무지개처럼 빛나는 세상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있는.




***




나는 묵묵히 걸어 네 무덤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면죄부를 받는 심정으로. 

무덤 아래에 있는 네게 지금 내 표정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아마 썩 좋지는 못하겠지.

때로는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도 있다.

베릴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망자는 눈알이 없으니까.

나는 보이지 않을 표정을 손수건으로 애써 가렸다. 날씨는 맑았건만 손수건은 물에 흥건하게 젖었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이 냄새가 베릴의 것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덜 고약하게 느껴질 것 같으니.


어쨌든 시체에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있더라도,

그건 내 마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결국 묘비에 꽃을 한 줌 두고 돌아섰다.


추잡스럽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내게 남은 건 슬픔이 아니라 복수뿐일 테지.


그러니 우선은 마왕성부터 다시 시작하자.


마왕. 그놈이 베릴에게 무슨 수를 썼을지도 모른다. 저주라던가, 그런 것들.


길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천운이다. 아직 내 몸은 그녀의 원수도 갚지 못할 만큼 녹슬지는 않았다.


그러니 알아내고, 응징해야겠다.


내 사랑을 부순 것이 누구인지.




***




용사가 마왕성으로 떠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초대받지 않은 세 명의 남녀가 용사의 방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퍽 익숙할 면면들이었다.


용사가 상상하지도 못할 비밀을 품은, 전직 용사 파티의 동료들.


“···일기가 여기서 끊겨 있군.”


“에릭 그 녀석. 진짜 살벌해지긴 했던데. 우리도 몸 좀 사려야 하는 거 아니야?”


“에이, 그 새끼가 우리가 베릴 죽인 걸 알 수는 있겠냐? 흔적도 안 남기고 했는데.”


“하긴. 동료니까 최소한 우릴 의심하진 않겠지.”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해야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네, 네, 알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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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엔딩은 메챠쿠챠해피엔딩일 예정인 순?애물 써봄

연인을 위해 피의 복수를 준비하는 용사. 얼마나 맛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