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약한 자라면 보호하고 강하다면 싸워왔다. 어릴 적부터 배워왔던 당연한 이야기였다. 크루크 폐하의 부름으로 울라에 도착했던 날,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이야기는 상당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리니드 같은 신을 구출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원하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 전설마냥 항상 모험의 길이 열려있는 그런 길이. 이전 세상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은 나를 비롯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밀레시안이라 지칭했다. 여느 세상에서나 그렇듯이 힘은 무소불위의 권력의 상징.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아량을 베풀고 내 모든 것을 보호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주신의 힘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도 처리가 되지않는 상황이 일어나버렸다. 내 그릇은 여기까지인가.



 "게 누구신가, 이 어둠에서 날 정확히 찾아내는 걸 보니 평범한 객은 아닌 것 같소만."


 "오호라. 소문만 무성하지 않다?"



  고뇌에 휩싸여있을 무렵, 적막한 숲에서 숨소리마저 죽이고 사람의 것이 아닌 발걸음을 옮기는 낌새가 느껴졌다. 그것이 움직일수록 주변에서 노래하던 풀벌레가 울음을 멈추고, 들켜선 안돼는 양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렸는데 그런 걸 어찌 눈치채지 않으랴. 이질적인 목소리에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가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날 시험하려 떠보지않을 것이고, 명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먼발치에서 내 위치를 정확히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 지금은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소이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게 어떻겠소."


 "그건 조금 곤란한데요, 당신 짐주머니에 있는게 제 목적이라."



  가방 안 무언가가 목적이라 하는 순간 이질적인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유추됐다. 그 증오스런 용을 상대할 때쯤 이따끔씩 맞닥뜨렸던 혼돈의 기사인가 뭔가하는 자들과 같았다. 다만, 보통 한 쪽에 먹히기 마련인데 그 순간만큼은 두가지 목소리로 갈라졌단 거다. 그런가, 두명인 셈인가.



 "거기다 전 싸우러온게 아닌데요, 밀레시안. 근래에 당신은 큰 고민이 있죠?"


 "댁과는 상관없소."


 "그림자 영웅께서 가진 물건 때문에 상관이 있게 됐어요. 우리 서로 이야길 좀 나눠볼까요?"


 "그럼 댁의 목숨을 거둬야겠군."



  그렇게 말하곤 옆에든 양날도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있어야할 건 없고 언젠가 베었을 적이 공허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각이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저것을 보면서부터 주변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불을 때려던 자리에는 혀를 내밀고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섀도우 워리어가, 가방이 있던 자리에는 빛나는 호박들이, 달빛도 잘 비치지않는 이 자리에 늪지대처럼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과거의 어느 적들이 눈만 내놓은 채 날 노려본다. 그럼에도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아.



 "...정말 이야기만 하고 싶은 모양이군."


 "미안해요, 이러지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질 않을 거 같아서."


 "하."



   그제서야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이 혼돈 속에서 들려왔다. 여자의 몸으로, 밀레시안도 아니면서 이런 환각을 내보인다면 필시 평범한 자는 아니리라. 어차피 지금 보는 모든게 허상임을 짐작하고 있으나, 호기심이 동했다. 내가 이런 걸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필요한 건 내가 갖고 있다, 굉장히 조심성이 많고 항상 무언가를 준비하는 자다. 일단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눈을 떴다.



 "놈들이 사라지질 않는군. 이런 식으로 좀 먹는게 장기인가?"


 "오롯이 그렇다고 말하긴 거북하네요. 가장 빛나는 밀레시안에게 정면으로 달려들 바보가 몇이나 될지 본인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생각하기 이전에 많았지."


 "바보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건 그 자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오."



  상대법에 대해 꼬집었더니 생뚱맞은 질문을 해왔다. 포워르인가? 키홀은 실각했고, 그에 따라 내부사정도 복잡하게 돌아가다보니 선지자 같은 이단이나 다름없는 치들이 날뛰는 것 일텐데. 내게 바라는 물건... 그게 뭘까. 근자에도 그렇고 아무리 되짚어봐도 짐작가는 바가 없다. 그저 대화만 원하는 것이었다면....



 "당신은 강하지만 좀 먹히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걸 조금이라도 덜어내서 서로 이득을 보자는 심산이지."


 "....그렇군. 내 정신과 관련된 환각인가, 그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폼새인데."


 "용모도 정리하지 못하고 며칠동안 계속 숲에 머무르기에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놀랍네요."



  나는 일주전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무력했다. 적은 쓰러지지 않았고 그 적에 의해 나만을 믿고 있던 어리석고 나약한 자들이 쓰러져갔다. 물론 그 날 컨디션이 말도 안됐지만 어쨌든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이행하지 못한 내 죄책감이 정신을 좀 먹고 있던 것이리라. 저 여자는 그걸 알고 있고, 주변에서 머무르며 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말도 된다. 기척을 숨기고 잘도 지금까지 버텨왔군. 나는 덥수룩한 수염이 자리잡은 얼굴 하관을 매만졌다. 지키지 못하고 이기지 못했단 죄책감이 날 좀먹는 한, 여기에서 자력으로 빠져나갈 확률은 없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뒤져서 가져가면 될 일 아닌가?"


 "당신의 의지도 어느정도 필요해서요. 양...도의 개념? 손이 가는 아이라서요."


 "나는 그런 생물은 데리고 다니지 않소만?"


 "때에 따라선 생물이 아닐 수도 있구요."


 "콕 짚어서 말하시오, 빙빙 둘러 말하는 건 질색이니."



   어릴 적부터 그랬다. 수수께끼는 골치아프다. 그래서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걸로 돌파해왔다. 어떻게든 잡고 돌리거나 박아버리면 그걸로 그만이었으니까. 내 말에 상대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한숨을 쉬더니 이내 하얀 안광을 번뜩이며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옴이 느껴졌다. 처음 내가 짐작했듯이 정체는 혼돈의 기사 다크나이트가 맞았다.



 "당신과 공명하고 있진 않지만 우리의 파편입니다. 원래라면 당신에게서 증오와 같은 부정한 감정을 먹고 완전한 형태가 되어야만 했지만..."



  그 어떤 빛도 없는 이 어둑한 숲에서 검은 빛을 내비치는 이상한 갑주, 과거 내 손에 목이 여럿 분질러졌던 그것들과 같지만 분위기라던가 모습이 사뭇 다른 이상한 여인이다. 그녀는 숨을 한번 고르고는 스스로 끊었던 말문을 다시 이어나갔다.



 "빛나는 자에게서 얻을 증오는 없었나봅니다. 점점 기력을 잃고 아무것도 아닌 돌덩이로 변해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세번째 호박 안을 뒤져보면 어렴풋이 손 끝에 무언가가 닿을 거에요. 그게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자, 정체를 잃지 않으려고 당신의 약해진 정신을 좀 먹는 혼돈의 기사의 파편입니다."



  이제야 어느정도 감이 잡힌다. 언젠가 방문했던 시드스넷타에서 노란 곱슬머리... 이름이 뭐였지? 아무튼 그 치에게서 받은 무언가의 파편이었지. 처음엔 뭔가 들리는 듯 싶다가 이내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흔들고 입을 두어번 벌렸다 닫았더니 들리지 않게 됐었다. 그게 그 파편이 내던 내면의 소리였던 게로군. 이런 무용한 물건에 손을 대야할 만큼 울라는 위기에 몰렸단 말인가? 그런 것치곤 왕성이 출입할 때마다 잘도 내 앞에서 으름장을 놔왔구나.



 "이놈인가 보군."



  이윽고 손에 뭔가 잡혔다. 처음엔 손 반뼘만한 크기였던 것 같은데, 손에 잡혀 올라온 파편이란 것은 내 손만한 크기에 깜찍하게 세개의 크고 작은 눈을 수없이 꿈뻑이며 나와 그녀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던바튼 발터씨에게 세개에 오십골드 느낌으로 제게 던져주면 됩니다."


 "값을 받고 판매한단 느낌이군. 어쩌면 양도라고도 볼 수 있는 개념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파편을 회수할 때보다 수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서 그런지 당신이 좀 편하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걸 들고 이런 환경에서 캐치볼이나 하라는 건가, 좀 어이가 없다. 기껏 구한 여신이 용과 함께 가둬버렸을 때도, 첫 밀레시안이란 자를 도와야할 때도 이렇게 긴장의 끈이 풀리지는 않았다. 꼭 뭔가 있을 것처럼 말해놓고 이제와서 캐치볼이라니. 내가 의심을 거두지않고 그녀를 미심쩍게 바라만보자 그제서야 뭔가 잊고 있었다는 양 손뼉을 한번 치더니 나즈막히 말했다.



 "당신 주변 현상은 그 파편이 저와 멋대로 공명하며 생긴 일입니다. 즉 양도하면 금새 사라지진 않겠지만 시간을 두며 없어지겠죠. 당신이 제 목을 꺾을 시간은 주지 않으면서요."


 "불가능하나?"


 "네, 그 전에 자릴 뜰 예정이니까요. 당신과는... 어느정도 맞지만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않은 불쾌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래라 함은 서로 손에 쥐어진게 있어야 마땅한게 아닌가. 일방적으로 거개를 받고 돌아간다... 인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뜸 대화 중간부터 목 끝에서 걸려있던 말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파편을 내던졌다.



 "넌 포워르인가?"


 "아뇨, 단지 그들에게 협력하는... 배신자라고 해두죠. 파편을 관리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걸 회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요?"



  라며, 파편을 소중히 양손으로 품안으로 감싸안더니 내게 눈인사를 하면서 제멋대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정신이며 좀 먹히는건가, 세상은 나를 아직도 수호자 수호신이라 칭하지만 내 그릇은 아직 거기에 걸맞지 않구나.



 "그럼 이제 이 선지자 놈들을 어떻게 요리해볼까."



  예티라고 해도 믿을만큼 덥수룩한 용모의 자이언트가 살벌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이 에린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

원랜 오하드때처럼 여밀레로 하려다가 주제를 조금 바꾸기로 결정

요즘 세상 살면서 우울증 없는 사람 어딨냐는 소릴 들어서 알게 모르게 짐을 짊어진 전사의 이미로 바꿨다

대신 전사적인 이미지보다는 점잖은 무관의 느낌으로 대사를 넣게 됨

자 이제 키트 좀 보러가볼가 헿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