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휴가 나와서 하는 말이 그거냐고?

야 너도 내 비서함이 누군지 알잖아. 그래 니가 생각하는 걔.


일단 봐봐. 생긴 것만 봐도 딱 여우상이잖아.

말 몇 마디만 나눠봐도 소름이 끼친다니까.

아니 무슨 사람 머릿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게 아주 돗자리를 펴야 돼 걘.

하여튼 걔 잔소리 좀 그만 들으려고

걔가 뭐 말할 때마다 수첩이랑 펜 꺼내서 필기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그대로 써먹으니까 좀 조용해지더만.

지난번에 전투 나갔을 때도

솔직히 멘탈 존나 터져서 얼타고 있었는데

걔가 하라던 대로 해서 겨우 이긴 거 아니냐.

진짜 수첩 안 갖고 나왔었으면 그대로 1계급 특진할 뻔했다니까.


그리고 종종 걔 머리랑 꼬리 빗으로 쓰다듬어주는데

살랑살랑 눈웃음 지으면서 나한테 은근슬쩍 머리 비벼대는 거 보고

와 씨발 진짜 심장 멎어 뒤지는 줄 알았다.

거기다가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계피 냄새 어우야.

어? 그게 왜 좋냐고?

어릴 적에 부모님 돌아가셔서 할머니 밑에서 자라느라

할머니가 주시던 계피 사탕 생각나서 그런다 왜.


근데 그런 주제에 허구한 날 콜록대는 게

아주 사람 걱정시키는 것도 도가 텄다니까.

그래도 어쩌겠냐. 걔가 나한테 해주는 게 얼만데

당연히 나도 걔 도와주고 그래야지 뭐.

넌 내가 받기만 하고 줄 줄은 모르는 뭐 그런 개쓰레기인 줄 아냐?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너한테 좋은 약방 어디 없냐고 물어본 거잖아.

뭐 덕분에 좋은 한약도 선물했으니 다행이지만.

설마 너도 어딘가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아 미안 전화 왔... 뭐야 얘가 왜 갑자기 전화를 했대.


어 여보세요? 저 오늘부터 휴가라고 얘기했었잖아요.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요?

아, 미안해요. 난 또 내가 뭐 실수라도 해서 혼내려는 줄 알았네.

알았어요 알았어. 이번에 복귀할 때 지난번에 샀던 약 또 가져갈 테니까 좀 봐주세요.

그리고 마카롱 세트도 좀 사가고요. 만날 쓴 약만 먹는데 가끔은 단 것도 먹고 그래야지.

지금 옆에 있는 거 누구냐고요? 누구긴요 친구놈이지.

거 지난번에 얘기했던 동기 있잖아요. 예 걔. 지난 달에 전역한.

그나저나 모항은 좀 어때요? 다행이네요. 뭐 어차피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나.

그래요.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까 몸 조리 잘 하시고.

나도 목소리 듣고 싶어지면 전화할 테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복귀하면 또 봐요.


봤냐? 너랑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전화한다니까.

...여기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슬슬 일어나자.

여기 계산이요... 어? 점심값은 네가 낸다고?

됐어 인마. 내가 얘 선물 고르려고 너 불러낸 건데 당연히 내가 사야지.

넌 결혼 자금이나 모으라고? 뭐래 미친놈아.

설마 내가 그 정도 저축도 안 했을 것 같냐?





아마기 비서함 세워놓고 비틱질하는 지휘관 써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