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세상이 이렇게나 예상과 다를 줄이야…”

지휘관 옆에는 코트 자락을 꽉 붙잡은 Z46, 일명 퓌제가 벌벌 떨고 있었다. 여태 추위라고는 모항 근처의 상대적으로 따듯한 겨울 정도만 겪어 온 온실 속 화초인 그녀였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북련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처음 맛보고는 거의 울먹이듯이 떨고 있는 것이었다.

얼음과 눈으로 가득한, 이질적인 활주로에 내린 지휘관과 그녀는 감탄하고 있는 것도 잠시, 얻어맞는 듯한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아늑했던 비행기에서의 휴식을 떠올렸다. 메탈 블러드와 노스 유니온의 협약을 중재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지 상의하고 있었던 그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지휘관이여…우리의 친애하는 벗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연락해 봤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강구트가 방금 방 안에서 취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 같더라.”

“처…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지…”

목소리가 얼어붙고 있는 것 같은데. 지휘관은 코트를 벗어 그녀를 덮어 주었다. 

“지휘관의 배려에는 늘 찬사와 경의를 보내고 싶지만…그대 또한 괴로울 터, 마음만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냥 받아 둬. 네가 감기라도 걸렸다간 그라프가 날 죽이려고 할걸. 오기 전에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화를 낸다고 말했으니까.”

아직도 그녀 뒤에서 그르릉 거리던 의장이 기억난다.

퓌제는 지휘관이 건네준 코트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럼 이쪽으로.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어쩌면 좀 더 견디기 수월할지도 몰라.”

그 말을 반박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여유가 없다. 지휘관과 퓌제는 코트 하나 아래서 겨우 바람을 견디기로 했다. 그렇게 영원과 같은 시간을 겨우 버티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애앵거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경찰차 같은 것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동지 지휘관!!”

경찰용 사이렌으로, 그토록 기다리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크론슈타트다. 지휘관은 멍해져 가는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바로 앞까지 달려온 경찰차 문이 쾅 열렸다. 그러곤 운전대에 앉은 키로프가 말했다.

“크론슈타트 동지, 차가 좁아질 것 같군. 필요 없는 물건은 내버리도록 하지.”

“으응.”

크론슈타트는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강구트를 발로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곤 지휘관과 퓌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서 들어와, 지휘관 동지. 오래 기다렸지…”

“얼어죽기 직전이었어.”

입술이 새파래진 지휘관은 슬슬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으음, 다음부턴 마중 나갈 사람을 신중히 고려하도록 할게.”

듣자하니, 어제 이 나라에 도착한 강구트는 진을 몇 병이나 들이켰다는 모양이다. 노르웨이 선원들이나 먹던 독한 술을.

“그래도 일단은 데리고 가자. 따지는 것도 죽은 사람한테는 못 하니까.”

“트렁크를 열어 두었다.”

키로프 또한 진심으로 미안한 것 같았다. 강구트를 대충 트렁크 안에 쑤셔놓고 차는 노스 유니온의 임시기지로 향했다.

“철혈의 동지여,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었던가?”

키로프가 슬쩍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첫 인상이 최악이었군. 부디 용서를 빌지.”

“이 또한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 중 하나니.”

용서한다는 뜻일까. 퓌제는 창가 너머에 비치는 부동항을 흥미로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설빙으로 뒤덮인 이 곳에서 아직 얼지 않은 바다를 볼 수 있다니.”

“놀라운 곳이지. 굉장히 탐이 나는--, 아니, 아름다운 항구야.”

바다가 얼면 항구는 무용지물이 되고, 함선들의 역할도 크게 줄어버린다. 그래서 이 곳 노르웨이의 니르비크라는 곳은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기에 그나마 가까운 두 진영의 화담을 위해서도 이용되는 곳이었고.

“그런데 크론슈타트, 소비에츠카야 소유즈는 어때?”

그녀는 이번 협상에 있어서 시발점이라고 여겨지는 존재였다. 그녀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없었을 일이니까. 그렇지만, 몸 상태가 심히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휘관도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는 조금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신기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준 점, 동지 지휘관에겐 몇 번의 감사를 전해도 모자랄 정도야. 철혈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왔을 땐 솔직히 놀랐지만.”

“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이렌과의 싸움이 격해지는 지금, 적보다는 친구가 필요했다. 물론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장 비스마르크는 그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분명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 일도 없었겠지.

“저기 보이는군. 동지 지휘관, 저 곳이 우리 노스 유니온의 임시 기지다.”

키로프는 속력을 더욱 높였다. 이젠 슬슬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임시라곤 해도, 기지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있을 것은 전부 있는 그런 장소였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여태 느끼기 힘들었던 온기가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으니까. 지휘관과 퓌제는 거의 쓰러지듯이 주변에 있던 소파에 몸을 뉘었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무한한 찬사를-.”

“이거 잠이 쏟아지네…”

크론슈타트는 트렁크 안에 넣어뒀던 강구트를 꺼내며 말했다.

“동지 지휘관, 지낼 곳은 제대로 준비해 뒀어. 여기서 잠들면 곤란해. 마치 노스 유니온의 접대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잖아.”

지휘관은 그녀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추운 곳에 있던 터라 움직이고 싶진 않았지만.

지휘관은 퓌제를 들쳐맸다. 그녀는 이미 이 곳의 온기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나누자. 아직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크론슈타트, 그런 이야기 다음엔 반드시 급한 일이 벌어진다네.”

둘의 이야기를 애써 무시하며 지휘관은 계단을 올랐다. 누군가를 업고 가는 것은 익숙하진 않아도, 등에 업은 소녀는 가볍기 그지없어 전혀 힘든 느낌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