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던 최대의 번화가, 커닝 타워의 로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이따금씩 반복되는, 그러나 어딘가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한 기타의 선율만이 계속해서 그 적막함을 부수고 있었다. 곡조의 주인인 붉은 머리의 소녀, 루비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주를 멈출때마다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마법사들의 보편적인 근거리 이동 마법인 텔레포트가 동반하는 섬광과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실루엣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루비 씨! 여기 계셨군요!"


"아...프로듀서 님이구나. 어떻게 알았어?"


프로듀서 님이라 불린 이 젊은 모험가는, 여느 때와 같이 로비에서 버스킹을 하던 루비의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순수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걸 정말 좋아했던 루비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구경꾼들은 항상 자신의 버스킹에 환호해줬기에 실력에 대한 약간의 자만심 또한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비슷한 방식으로 이 '프로듀서'가 캐스팅한 나머지 네 명의 멤버들과 함께 데뷔의 기회인 '환상의 스테이지'에 도전하기로 했고, 그를 위해 문자투표에서 1등을 해야 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2등도 아닌 4등을 해버렸고, 멤버들의 사기는 최저인 상태였다. 지금은 왜인지 끈질긴 매니저와 더 이상 포기하지 않겠다는 디아의 설득으로 간신히 연습생 신분만 유지하며 뭉쳐 있는,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루비 씨는 어디 계시든 티가 나는 걸요?...는 농담이고, 어디 계신지 잘 모르겠어서...발품 좀 팔았죠. 제가 발은 좀 빠르기도 하고, 한 달 전에 디아 씨 찾을때도 이렇게 했었거든요. 기억나시죠?"


"오, 역시 소문의 모험가 다운걸. 그래, 한 달 전에도 디아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네가 찾아왔었지. 그땐 걔가 우리랑 같이 무대에 서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루비는 짧은 쓴웃음을 짓고 이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악보로 시선을 옮겼다. 프로듀서는 뭐라 더 말하려다 그만두고는 품에서 맑은 물을 꺼내어 건네며 물었다.


"...루비 씨. 괜찮으신가요?"


"오, 땡큐. 잘 마실게. 밤에 몰래 자리 비웠는데 그걸로는 뭐라 안하네. 응, 괜찮아. 아미나 사피한테 잔소리 듣는게 한두번도 아니고...걔넨 그야말로 천재잖아? 길거리 버스커 출신이던 내 실력으론 아무래도 성이 안차겠지. 아, 탓하는건 아냐! 걔네 둘에 비해 내 실력이 부족한건 나도 느끼는걸."


문자투표로 데뷔가 좌절된 직후에는 다음에는 잘 될거라며 멤버들끼리 서로 너나할것 없이 위로했었다. 하지만 속내는 실망이 컸던 건지 다음 기회를 위한 연습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정말 이 정도 수준으로 무대에 오르려 했던 건가요? 매번 똑같은 실수로 노래를 망친다면 혁이 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건 물론이고,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민폐에요. 염치라는게 있다면, 저희와 같이 무대에 서는 건 다시 생각해주시지 않겠어요?'


'노래에 혹해서 이딴 허름한 소속사의 캐스팅을 받아들이는게 아니었어. 더 좋은 소속사에 갔으면 너 같은 허접한 멤버랑 같이 무대에 설 일도 없었고, 성공은 보장된 일이었을텐데!'


일전의 실패가 루비의 실수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그룹으로 뭉치기에 너무나도 이들의 개성이 강했고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좌절감과 무대를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은 이들을 예민하게 만들었고,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루비가 연습 중 유난히 실수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합리화가 가능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 원색적인 비난에도 루비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내적으로 인정했고, 이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집착으로 이어져 이런 야밤에 연습하기에 이른 것이다. 루비는 눈앞의 이 프로듀서가 자신이 비난에 대해 상처받았을까 걱정하고 있다 생각했다.


"음... 그것때문만은 아닌데."


"그래? 그게 아니면 뭐일까...응?"


그녀는 별안간 루비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십대 소녀의 손이라기에는 굳은살이 두껍게 배긴 딱딱한 손. 그것은 루비가 버스킹하던 때부터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처가 생길 정도로 심해진 굳은살은, 그때처럼 음악에 대한 순수한 동경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딱딱한 손끝을 매만지던 부드럽고 따뜻한 손에는 이윽고 흔한 치료마법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치료마법은 굳은살까지 없애주진 않았지만,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갔다.


"손에 굳은 살이 많이 배기셨네요. 몰래 연습하고 계셨던건가요? 낮에도 연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면서..."


"괜히 쑥스럽네. 난 괜찮으니까 들어가봐. 시간 늦었잖아. 프로듀서 님도 한창 때 소녀인데, 늦게 자면 예쁜 얼굴에 다크서클 생긴다?"


루비는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얼버무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장 질문해왔다.


"루비 씨, 아직도 한달 전 문자투표의 실패가 신경 쓰이시는 건가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려나? 역시 단번에 신경 끄긴 힘드네. 내가 실수한건 사실이고, 그건 내 잘못이니까."


"아니에요. 일이 그렇게 된건 여러분들 중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굳이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혁이 씨의 음악을 듣고 혼자 들떠서는, 서로 걸어온 음악의 길이 다르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한번에 캐스팅 해서 그룹으로 묶어버린 제 잘못이겠죠."


"엥? 그건 아니다. 프로듀서 님이 그 짧은 시간동안 무대 준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는 내가 아는데. 필요한 물건 있을때마다 커닝 타워의 그 흉악한 몬스터들을 사냥해다가 전부 구해왔잖아.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구. 게다가 장부 보니까 사비까지 썼더라?"


"아, 혁이 씨... 디아 씨가 비서 일을 못하게 되셨으니까 서류 좀 잘 관리하라고 말씀드렸는데."


루비는 한때는 연합에서 치켜세워줄 정도의 모험가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서 프로듀서 일이나 하고 있는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시간동안 그녀의 열정은 결코 이 일을 가벼운 장난이나 여흥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괴물들을 때려잡아 소품을 마련하고 문자 투표를 알리기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순간순간이 적어도 루비가 보기에는 진심이었다. 정말 고마웠지만 감사는 곧 부채감과 미안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프로듀서 님 잘못이 아니야. 걔들 말대로 제일 실력이 부족한 내 잘못이겠지. 디아나 페리도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지, 아마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걸 느끼고 있을거야. 역시, 아미 말대로 민폐가 되니 그만두는게 나으려나."


"아니에요, 아미 씨나 사피 씨도 분명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아미 씨는 완벽주의라 지금까지 실패를 몰랐고, 사피 씨는 데뷔에 대한 기대감때문에 실망하셔서 조금 거친 말을 하셨을 뿐이에요. 지금은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걸 그 둘도 알았을거에요."


"......"


"그러니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도,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페리 씨가 쓴 가사에도 써있었잖아요.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다고. 이제 겨우 첫번째에요.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였다면, 다음엔 정말 '환상의 스테이지'에 어울릴 정도가 될 거에요. 음악, 정말 좋아하시잖아요.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눈부시게 빛나는 루비 씨의 모습을 무대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던 프로듀서의 목소리는 끝에 가서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루비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루비는 잠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정말 간단한 것을 잊고 있었다. 음악을 하는건 단순히 연주하고 노래하는걸 너무나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환호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어느새 그건 뒷전이 되고 데뷔에 성공하기 위한 실수 없는 음악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계속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이런 정석적인 응원이나 위로를 받을 일이 없어서였을까. 평소 같았으면 웃고 말았을 말에 루비는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아, 역시 안 되겠어. 잘 참을 수 있다 생각했는데...프로듀서 님 진짜 바보구나? 원래 울기 직전인 애한테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울고 싶어지는거라고..."


"앗, 울지 마세요...그리고 울지 말라고 한 적 없잖아요...그러시면 저도...!"


그렇게 한동안 둘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좀 진정되고 나서는, 어째 프로듀서가 위로를 받은 루비보다도 더 많이 울었는지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실컷 같이 울기는 했지만, 역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걸. 사실 무작정 연습하러 나오긴 했지만, 정말 안 늘어서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야."


"단순히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면, 단번에 실력을 끌어올릴 방법이 있어요. 조금 고통스러우시겠지만...해보시겠어요?"


휴지가 없어 3층 팬시샵의 노트를 때려잡고 나온 낱장을 구겨 코를 푸며 프로듀서가 제안했다.


"오, 뭔데?"


"루비 씨, 버스킹 하실때 연주는 독학으로 배우셨죠? 대체로 굉장히 훌륭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를 하시던데."


"오, 예리한데? 프로듀서 님, 단순히 얼굴만 보고 우리를 캐스팅한건 아니었구나?"


"모델을 뽑는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루비 씨의 문제는, 잠재력은 훌륭하지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가장 필요한건 좋은 스승이겠죠. 혁이 씨도 경험이 있으신 만큼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사장 일을 비서도 없이 하시느라 바쁘니까요."


"맞아, 사장님 왕년에 완전 전설이었지. 그런데 음악 선생님은 그럼 어디서 구하...응? 그 기타는 뭐야, 프로듀서 님?"


말없이 허공에서 갑자기 기타를 꺼낸 프로듀서는 그대로 독주를 시작했다. 루비는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혁이의 연주와도 견줄만큼 훌륭한 실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음과 박자를 맞추는 기계적인 연주가 아닌, 셈여림에 어딘가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감정조차 고스란히 녹아있는 연주였다. 밤이 내려앉은 어두운 커닝타워의 로비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밝은 곡조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밝은 조명을 받은 가수보다도 지금의 프로듀서가 더 빛나보였다. 연주가 끝나자, 잠시 루비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뭐야, 프로듀서 님 완전 대박이잖아! 우리 여섯번째 멤버 안 할래? 아니지, 그냥 솔로로 데뷔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손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어?"


"과찬이세요... 약간의 편법같은 거라서요. 이 기타, 스승님의 기타에요."


"프로듀서 님 마법사니까...하인즈 씨? 그 할아버지한테 그런 취미가 있었다고? 혹시 잡고만 있어도 기타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마법도구 같은건가?"


"대충 비슷해요. 자세한 경위를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만...이 기타로 음악 실력을 키울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는 것까진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어때요, 제게 배워보지 않으시겠어요?"


"나야 좋지만 낮에는 프로듀서 님도 바쁘지 않겠어? 밤에 나 혼자 연습해도 괜찮은데."


"저도 밤잠이 없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혼자 연습하면 더 나아지지 않았다면서요. 그러니까 같이 해보죠. 연주를 가르쳐보는건 이번이 두번째라 조금 힘들 수도 있겠네요. 첫번째는 같이 연습하다 실력이 너무 모자라서 제가 가르치는 꼴이 된 경우지만...루비 씨는 그 얼간이보단 훨씬 잘하실거에요."


"프로듀서 님이 욕할 정도라니, 그 녀석 대체 누구인거야...어쨌든 잘 부탁해, 프로듀서 님...아니, 사부님!"


"사부...처음 들어보는데 은근히 듣기 좋은 말이네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스파르타식으로 갈테니 각오하세요!"


"예이!"


처음보다 훨씬 더 높은 빈도로 반복되는 곡조가 커닝 타워의 로비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이번 노래는 매번 불쾌하게 끊어지지 않고 천천히 이어져나갔다. 그 선율은 동료에게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상처받았을 상대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고 있던 이들에게도 자장가가 되어주며 그렇게 밤새 흘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가 얼핏 써줬으면 했던것 같아서 돚거해온 주제 뿌직뿌직. 물론 5인방 다 쓸 능력 안되지만 누군가는 이걸 1편빌런으로 받아들여 나머지를 써주리라 기대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