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카라이브 군사채널 여러분
전남대학교 총장명예학생 소속으로 6·25 참전용사 분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위해 프로젝트 <리멤버 히어로즈>를 진행하고 있는 아카라이브 Shootingstar입니다. 저희는 현재 참전용사 분들의 회고와 수기를 모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회고록 형식으로 참전용사 분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1차적 목표로 잡고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대중의 관심을 통해 직접적으로 참전용사 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모금이나 생필품 전달 등).
현재 6·25 참전유공자회측과 협력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제가 거주중인 전북지역 참전유공자회를 통해 참전용사 분들을 만나뵙고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나, 향후 시간이 지나면 전국적으로 많은 유공자 분들을 만나뵙고 모든 용사님들과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계신 유공자 분들은 약 7만 명 남짓에, 평균 나이가 91세이십니다. 때문에 공간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제보가 필요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참전용사 분들은 국난에 휩싸인 나라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후손들을 위해 앳된 손으로 수많은 사지를 누비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신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용사님들은 있어야할 명예도, 보상도 손에 쥐시지 못하셨습니다. 전쟁 후 수 십만에 달하던 용사님들은 이제 전국적으로 약 7만명. 그것도 평균 91세의 고령들이십니다. 이제라도 그분들이 자신을 희생해 지켜내신 이 대한민국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참전용사님들에게 마땅한 명예와 보상을 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에 보상이 없다면 그 누가 앞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 나서겠습니까.
아래 첨부한 내용은 2021년 4월 29일, 전주시보훈회관에서 제가 참전용사 분들을 만나뵙고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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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용사님
*- 인터뷰 담당자
2021.4.29일자 인터뷰
김@열 (육군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 수색대원 / 화랑무공훈장수훈 / 1930년 4월 11일 생)
- 내 이름은 김@열이고, 호적상으로는 1930년 4월 11일 생이여. 사변 전에는 이리(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이리농림졸업반에 있었어. 그런데 사변이 나가지고 학도병으로다가 해가지고 1950년 7월 11일자 징집이 돼서 남원용산국민학교(남원 용산리)에서 부대 편성을 하게 됐어. 내가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 수색대원으로 편성이 돼았어(됐어의 전라북도 방언). 인민군이 대전 논산까지 왔다구 혀가지고서(해가지고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부대편성만 해놨어.
*- 그러면 군사훈련이나 이런 것 없이 바로….
- 응 아무렴. 그래가지고서 우린 바로 후퇴하기 시작했지. 진주로 걸어서, 진주에서 부산으로 걸어가는데, 낙동강전투, 영천지구전투(경북 영천), 다부동전투를 끝내고.. 부산까지 걸어갔어요. 그래서 부산에서 주둔 혀가지고 있는데 대구 팔봉산에 적이 나타났다고 혀가지고서 그래.. 또 걸어서.. 대구로 걸어서 팔봉산 전투를 끝내고 왔는디. 매카더(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대성(大成)을 혔어. 그래서 그때부터 북진을 하기 시작혔던거여. 걸어서.
*- 차량 없이 그냥 걸어서 이제 낙동강서부터 올라가신 건가요?
- (그런 것 없이) 걸어서... 그냥 서울까지 걸어서 간거여. 그래서 걷는디.. 잠이 와서... 잠이 막 와서... 하루 백 리(약 40km) 이상을 걸어야하니까. 걸어가면서 자고, 걸어가면서 꿈을 꾸고, 그렇게 우리가 평양까지 가는디. 내가 그 평양을 처음 밟은 사람이여. 1950년 10월 18일, 밤 9시에 내가 최초로 평양 시내에 발을 들였어. 그래가지고서 평양중앙교회에서 우리가 일주일정도 정비하고, 거기서 북진을 또 하기 시작했지. 걸어서.
이북 순천, 순천(평안남도 순천시)을 거쳐서 구개천, 신개천(평안남도 개천시)을 넘어서 북진을 북진을…. 그래가꼬 덕천시내에서 다시 부대 정비를 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북진을 북진을 시작한거여. 내가 어디까지 갔냐면…. 평안북도. 평안북도 회천까지 갔어요. 내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면서…. 난 만 4년이라는 시간을 전쟁 속에서 있었던 사람이여. 총알이 날 피해가서 산거지. 내가 피해서 산 게 아니여.
회천까지 갔는데. 그때 중공군 개입으로 인해서 1951년 1월 4일 후퇴를 했어. 회천에서 다시 걸어서, 덕천 시내까지 걸어서 다시 왔어. 만 하루하고 한 끼 굶고…. 언제 뭐 어디 후퇴하는데 어디서 밥을 먹겄어? 먹을 곳이 없지. 그러고 덕천에 보니까 중공군허고 인민군이 덕천을 십중포위를 혔어요. 덕천 시내에 우리를 가둬 놓고…. 아침 새벽부터서 밤늦게까지 덕천 시내에서 (적이) 몰려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십중포위를 혀가지고. 거기서 우리 전우가 많이 희생됐어요. 덕천시내에서….
몰려서 가면은(포위망을 뚫으려고 하면) 그냥…. 기관총에 따발총이…. 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그런 것이 밤 10시까지 그 짓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만 이틀 되었나? 아무것도 못 먹고, 어떻게 도저히 살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지쳐서 쓰러져 있는데 그 겨울에 어떻게 목이 마른가…. 그 한겨울에, 한 영하 30도에서 40도 가는 추위입니다…. 우리가 서서 소변을 보면 소변이 나가면서 얼었어요. 그렇게 추웠어요. 그러고 있다가, 강냉이(옥수수) 밭 인디 목이 어떻게 마른가 모르겄어요. 그래서 이렇게 더듬어 보니까 움푹 파인 곳에 얼음이 있었어. 그래가지고 그 얼음을 깨서 그 밑에 있는 물을 먹었어. 그 물을 먹고 나니까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어. 지쳐가지고. 누워있는데, 어느 장교가 가면서 누운 시체들을 발로 차는데, 그 장교가 나를 차더라고. 그래서 가만히 (고개를 살며시 들고) 눈을 떠보니께, 육군 대위인가 그려. 그 장교가 그랬어.
‘너 오늘 여기 있으면 죽어. 그릉게 나랑 같이 나가자.’
(그렇게) 해가지고서 그 장교 어깨를 짚고, 700고지라는 산을 넘었어. 산봉우리를 올라가니까 밑에 불이 반짝반짝혀. 그 인간이 있는 게 비다(‘있는 것 같다‘의 전라북도 방언). 그래서 그 저그 보니까 모포, 그 군인들 모포(가 있었어), 뭐 포위망이니까 무기고 머시고 할 것 없이 다 버리고(갔어). 그 두 개를 혀가지고 내가 둘러쓰고 산꼭대기에서 내가 굴러 내려갔어.
*- 그 모포로 몸을 둘둘 마신 다음에 굴러내려 가신건가요?
- 그려. 그러니께 그 불 반짝반짝하는 집 뒤에 가서 떨어졌어. 그래서 거그서 기어서 부엌을 찾아갔더만 할머니가 있더만.
‘할머니 밥 있으면 나 쪼끔만 주쇼….’
‘겨울인게로 밥은 없고, 강냉이 삶은 것이 있네.’
‘그러면 그거라도 쪼끔만 주쇼….’
그러니까 (할머니가) 밥주걱에 강냉이 삶은 것을 담아다 줬소. 그것을 눈을 감고 다 먹고 나니까 배가 불러. 배가 부른데 날이 너무 추우니까 할머니 방에 가서 조금 누워있었어. 보니까 아군 군인아저씨가 다섯 분인가 먼저 와 계시더만. 그래서 인자 방에 들어가서 누워있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주거니 받거니, 전쟁얘기를 하고 있더만. 그런데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여.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 집 앞에 살던 친구여. 신승균이라고. 얘는 의무대로 갔어. 그래서 이름을 부르니께 얼매나 반가운가 서로 껴안고….
어찌저찌 포위망을 뚫고, 나가니께 우리 그 제트기가 얼마나 와가지고 폭격을 하는지…. 우리를 그 인민군, 중공군으로 알고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 그래서 작전(HQ나 OP)에서 있었던 대공포판, 그 빨간 거랑 노란 거, 한 3 메타 정도 돼요. 넓이는 한 1 메타 정도. 그것을 설치하면 아군이 아군인지 알고 피해가. 그걸 깔어. 매일 그게(암호) 바뀌니까 매일 바꿔 깔어. 열십자로도 놓고 노랑 것만 두 개만 놓고 할 때가 있어. 그걸 깔면 다음날 (사단본부에서) 연락이 와. 그걸 이제 깔으니께 폭격을 안하드라고.
이제 청천강을 건너야 했어. 청천강을 건너야 평양에서 집결을 할 수 가 있는디. 이... 여그 까지 물이 닿는다는 말이여(무릎 바로 밑까지). 그 겨울에 강을 건너니까. 여기서(군화바닥)부터 여기(무릎부분)까지 다 얼음이여…. (영하) 30도, 40도 나가니까. 그렇게 걸어서 다시 평양까지 와서 집결을 혀가지고, 평양서 서울로, 서울로 강원도 양구, 화천으로. 화천에서 다시 전투를 했지.
*- 그 3000km를 전부 걸어서….
- 다 걸어서. 차가 없어요. 아 걸어가면서 자고, 자면서 꿈을 꾸고 그랬어요. 언제 잠이 깨냐, 지금은 (포장)도로지요? 예전에는 신작로라고 혔어요. 그 신작로 길 옆에 가보면 수로가 있어요. 비올 때 물 오는 수로가. 거기 가서 넘어지면 잠깐 잠이 깨요. 일어나서 다시 걷다보면 또 잠이 와. 그러면 나 자신이 허벅지를 손으로 이렇게 막 꼬집었어요. 응? 잠 깨라고, 왜 안 깨냐고. 제일로 고통스러운 것이 행군하는데 잠 오는 것….
전쟁 중에 독수리 문신을 혔어요. 여기 팔에. 내 친구랑 나랑 단 둘이. 전쟁터에서 시간이 있을 때. 왜? 내가 죽으면, 네가 팔을 보고
‘아 이게 기열인갑다. 하고 우리 집에 보내 주라고…. 니가 죽으면 내가 찾아서 보내줄게.’
*- 전쟁 후에는 어떻게….
- 내가 만 4년이라는 시간을 최전방에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면서 전쟁만 혔어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이루어졌어. 그러고는 인자... 전쟁은 끝났지만 정비할 것이 많아요. 그래가지고 1954년 7월 1일자로 만기제대를 혔어. 그래서 와가지고서 3개월 있다가. 공무원 시험 봐가지고 공무원이 됐지. 3개월 있으니까 4급 공무원을 뽑는다고 하더라고. 우리 국장한테 가서 부탁을 혔지.
‘네가 석 달밖에 안됐는디 어떻게 4급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그려? 너보다 선배들도 많은데. 니가 가믄 되냐?’
‘안되면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 가봐라 되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거 겄지.’
그래가지고 우리 서에서 세 명이 가서 합격을 혔어요. 직장 470명에서 계장 달구 200명, 250명 되는 과에서 근무했어요.
*- 전쟁 후에 전쟁 중 발생한 일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으신가요?
- 그런 게 제일 문제요. 걸어가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솔직한 얘기로…. 여기서 할 말은 아니지만…. 자살 시도도 몇 번 혔어. 도저히 못 견디겄어. 그런데 그것(자살)도 팔자에 있어야 하는 것이여. 할라고 하면 누가
‘기@아!’
하고 응? 사람들이 자꾸 부르고…. 결국 여까지 살아왔지. 나는 솔직히 이 인터뷰…. 탐탁치가 않아요. 내가 여태까지 20번은 넘게 인터뷰를 했소. 신문사에서, 어디어디 단체에서, 국방부 보훈청(하고)…. 그거 다 필요 없어. 국방일보 기사에도 내가 지금 나와 있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 나라에서, 행정에서 뭔가 변해야하는데, 이런 말하면 요사스럽다고 말하지도 모르지만….우리가 늙은이라고, 표가 안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거창한 걸 바라는게 아니요. 우리 얘기…. 그 뭐냐 그…. 역사책에다가 문교부(현 문화체육관광부 및 교육부)에서 교육 좀 시켜줬으면 해요. 시방(지금) 잘못하면 우리가 북한으로 쳐들어 간 게 돼. 내가, 전우들 시체 넘으면서 회천까지 갔는데…. 전쟁터에서만 4년을 살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