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흥하고 망하기를 거듭했고, 그 속에서 수백년간을 이어온 나라도 많다. 하지만 그 역사가 1000년에 달하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 가장 유명한 나라는 당연히 로마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앞에 로마제국도 약해지기 시작했고, 1453년 동로마(비잔틴)의 멸망으로 결국 로마라는 이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역사 덕후들에겐 참으로 아쉬운 일이겠지만 영원한 국가란 존재할수 없고 국가의 흥망성쇠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왜 로마가 무너졌는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기 때문이다. 비잔틴의 최후는 크게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에 우리에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방법을 알려주고, 작게는 인생에 대한 교훈을 알려준다. 또한 역사학적으로는 중세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기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이 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사망하며 로마는 영원히 2명의 황제가 제국을 반씩 분할 통치하게된다. 이후 서로마는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지만, 비잔틴(동로마)은 이를 잘 막아내며 오히려 더 번성하게 된다. 동로마는 이집트와 중동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비잔틴의 제도 콘스탄티노플은 현재의 이스탄불에 위치하며,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에 건설된 도시이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40만에 달했으며, 그중 외국인이 6만에서 8만명이나 되는 나름 국제적인 도시였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위치는 콘스탄티노플을 동지중해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만들어 주었고, 덕분에 상시 도시 내에 3년치 식량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8만 톤 용량의 물탱크과 640km의 수로를 파 절대로 물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식량은 무려 40만시민 전원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했고, 무상급식이 폐지된 후에도 곡물만큼은 국가가 책임지고 충분히 수입해 왔다. 



또한 로마를 이어받은 나라답게 군사력도 강력했는데, 자체 상비군과 용병들을 합쳐 30만여 명의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나라의 심장 콘스탄티노플 역시 방어력이 대단했다. 위 사진 왼쪽에 이어진 성벽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성벽은 도시 둘레 22km를 빙 두르고 있었고, 특히 서부의 6km 구간의 방어력이 엄청났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구조였는데, 먼저 20~40m 길이의 해자를 건너야 했다. 그 다음엔 2m 두께의 외벽이 6m가량의 높이로, 마지막 내벽은 무려 12m 높이에 6m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비잔틴의 천년역사 동안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진 사례는 지진과 후에 설명할 최후의 공방전 단 2가지 경우 뿐이었고, 적이 정공법으로 성벽을 파괴하고 도시로 쳐들어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정말 오버테크놀로지라고밖에 할수 없는것이 보수도 발라서 대지진으로 무너진 성벽을 단 3주만에 복구해 훈족을 막은 적도 있다. 


다시 위의 지도로 가서, 도시 남쪽 해안은 해류가 강하고 항구도 없어 항해가 힘들고, 역시 강력한 성벽이 있어 들어올 수 없었다. 동쪽 해안은 고지대인데다 역시 해류가 강해 가장 방어력이 높았다. 단, 도시 북부의 골든혼(Golden Horn, 또는 금각만)은 확실히 약점이었는데, 비잔틴은 여기에 쇠사슬을 설치한다.

 

그냥 쇠사슬이 아니고 배를 파괴시킬수 있는, 아주 두껍고 강한 쇠사슬이었으며, 역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이 쇠사슬이 뚫린적은 없었다. 참고로 이스탄불에 아직 이 쇠사슬의 일부가 남아있다고 하느 기회가 된다면 한번 직접 보는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부를 바탕으로 온갖 용병들을 데려와(중세엔 상비군보다 용병이 더 흔했고 보편적이었다) 엄청난 훈련을 시켰는데, 그 수준이 어느정도였냐면 달리는 말 위에서 칼 휘두르다가 창을 쓰고, 또 그러나 활을 쏘고 다트를 던지는 동작들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최강의 부와 최강의 방패를 가진 천혜의 요새였으며 덕분에 그 어떤 이민족의 침입도 굳건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콘스탄티노플 앞에 또 다른 적을 불러들였으니 바로 그들이 이슬람이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