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콘스탄티노플 함락-1.천년제국의 제도 - 군사 채널 (arca.live) 


1064년, 비잔틴의 옆동네이자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술탄으로 알프 아르슬란이 즉위한다. 아르슬란은 여러 지역으로 정복전쟁을 벌였는데, 1068년에 시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끌고 갔다가 비잔틴 군대와 우발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셀주크군은 비잔틴에게 패배했고,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는 기세를 몰아 아르메니아를 되찾기 위해 대군을 끌고 나선다. 


그렇게 양측은 아르메니아의 마나즈케르트 지방, 지금의 터키 말라지게르트 인근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셀주크군의 궁기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은 비잔틴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어느 귀족이 황제를 배신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만치케르트 전투라고 기록된 이 전투에서 비잔틴은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로마누스 4세는 포로로 끌려갔고 이런 유명한 대화를 나눈다.


알프 아르슬란: 그대가 나를 포로로 잡았다면 어떻게 하겠소?
로마누스: 아마 그대를 죽이거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겠지.
알프 아르슬란: 나는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할 생각이오. 그대를 풀어주지.


그러나 풀려난 로마누스는 전장에서 자신을 배신한 귀족 두카스와 정쟁과 내전을 벌였고, 패배해서 눈을 뽑히고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비잔틴은 최대의 곡창지대인 팔레스타인 지방과 아나톨리아(터키 지방)을 빼앗긴다. 이는 비잔틴 국력에 엄청난 손실을 불러일으켰다. 비잔틴은 국력 회복을 위해 이 두 지방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약화된 국력으로는 불가능한 과제였다. 더군다나 셀주크 외에도 북방과 남이탈리아에 있는 적군도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비잔틴은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명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슬람 이교도들에게 우리 성지가 빼앗겼으니 이를 되찾아야 한다!!"


근데 비잔틴은 서유럽의 의용군 정도의 병력을 기대했는데, 교황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조직해 보내게 되니 이것이 십자군이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도들에게 도움을 좀 청해보고자 불러들인 십자군은 오히려 늑대를 쫓기 위해 부른 호랑이와 같은 격이 되버렸는데, 비잔틴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4차 십자군은 1198년 교황이 모집을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십자군 참가자들의 결과가 별로 좋지 못한데다 다들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상황도 아니어서 모집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략 3만여 명의 병력이 모여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배가 없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병력 운송과 9개월분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가로 8만 5천 마르크의 은과 일부 점령지의 지불을 약속했다. 참고로 8만 5천 마르크는 프랑스 1년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실제로 모인 병력이 1만 2천 뿐이었다. 덕분에 십자군에 참가한 영주들도 돈을 2배씩 내야함은 물론, 베네치아도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 베네치아는 상업활동을 18개월이나 동결시키면서까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국 다같이 폭삭 망할 위기에 처하자 베네치아가 해결책을 내놓는데, 바로 다른 기독교 국가를 털어서 자금을 충당하잔 것이었다. 결국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할수 없다는 일부 병력이 빠지고 대부분의 병력이 기독교 국가를 털러 출발한다.


우선 헝가리 도시 자라를 턴 십자군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은밀히 접선을 요청한다. 바로 폐위된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자신과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아줄것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20만 마르크의 자금 지원과 성지수호군 파견, 동방정교회를 가톨릭 아래로 통합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십자군도 손해볼게 없었고, 마침 비잔틴과 사이가 나쁘던 베네치아도 비잔틴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둘수 있겠단 계산이 맞아떨어져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게다가 당시 가톨릭은 동방 정교회를 이단 취급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자기합리화도 작용했다.


십자군은 골든혼의 쇠사슬을 통제하는 갈라타 지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골든혼 방향의 성벽을 공격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격전 끝에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십자군이 퇴각하며 불을 질렀고 여론이 악화되자 황제는 외부 지원을 끌어오기 위해 정예병들과 함께 도시를 떠난다. 그런데 그사이 비잔틴 시민들은 알렉시오스와 눈이 먼 전 황제 이사키오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로 즉위한다. 


근데 알렉시오스 4세가 막상 황제가 되고 보니 제국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선 알렉시오스 3세가 아직 도시 밖에서 활동중이니 군대 파견은 불가, 역시 도시 밖 시민들도 3세 편이니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 급고를 열어보니 돈도 없어 자금지원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점차 국력이 약화된 데다 알렉시오스 3세가 돈을 싸들고 나간 덕이었다. 결국 10만 마르크밖에 모으지 못하고 도시 내에서 반십자군 폭동이 벌어지자 곧 라틴&십자군과 비잔틴 시민들은 여러 번 크고작은 충돌을 벌였다. 결국 알렉시오스 부자는 귀족 알렉시오스 두카스(아까 로마누스를 배신한 인물과는 다른 인물이니 주의)의 쿠테타로 감금되어 죽었고,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로 즉위한다. 알렉시오스 5세는 베네치아 지도자 엔리코 단돌로 원수와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고, 결국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한번 공격한다. 


여기서 베네치아가 아주 기발한 방법을 썼는데, 배의 돛대를 모아 공중가교를 만들어 해자를 넘는것이었다. 위 그림 우측 상단에 있는 것이 바로 그 가교인데 실제론 사람 3명이 한번에 지나갈 수 잇는 너비였다고 한다. 결국 황제도 도시를 탈출했고 역사상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버린다. 


처음부터 돈이 없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인만큼 역사에 남을 수준의 대약탈이 벌어졌다. 일반 시민들의 것은 물론이요 성당과 교회도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모든 남자는 폭행당했고 모든 여자, 심지어 어린아이와 수녀들도 강간당했으며 천년을 이어온 비잔틴의 유물을이 모두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실제로 지금도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의 유물보다 극소수 살아남아 베네치아로 가 이탈리아에 있는 유물들이 더 많다. 황제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일부 황제의 시신은 길거리에 끌려다니다 버려졌다. 단 3일 만에 십자군은 90만 마르크를 약탈했고, 더이상 번영하던 도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영토를 할양한 후 라틴 제국(붉은색)을 세워 60여년간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했다. 비잔틴 왕족들은 망명 정권(붉은색 이외)을 세워 저항했고 1261년 망명정권 중 하나였던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가 비잔틴을 부활시킨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 사후 벌어진 내전과 흑사병으로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겨우 지배하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했고, 그동안 오스만이 성장해 발칸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