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기준 78%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69
예를 들면 소련 곡물 수입의 78%에 이르는 1500만t(2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곡물이 소련으로 수출되던 1979년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미·소 간의 사이가 가장 평온했던 냉전시절이었다.
소련의 곡물 수입은 이 기사가 말해주고 있음.
소련은 미국의 2배를 넘는 국토를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방은 한시절 전「유럽」을 먹여 살리는 곡창이었다. 1970년대 초입까지만 해도 소련은 자급자족을 하고 남은 농축산물은 수출했었다. 미국·「캐나다」 다음가는 막대한 양이었다.바로 그 소련이 지난 72년부터는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다. 72, 75년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흉년이 들어 곡물의 수확량은 일시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때 농민들은 가축을 죽여 들에 버리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었다.「미·소 곡물협정」이 서둘러 체결된 것도 이 무렵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27060#home
1978년 기준 78%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69
예를 들면 소련 곡물 수입의 78%에 이르는 1500만t(2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곡물이 소련으로 수출되던 1979년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미·소 간의 사이가 가장 평온했던 냉전시절이었다.
소련의 곡물 수입은 이 기사가 말해주고 있음.
소련은 미국의 2배를 넘는 국토를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방은 한시절 전「유럽」을 먹여 살리는 곡창이었다. 1970년대 초입까지만 해도 소련은 자급자족을 하고 남은 농축산물은 수출했었다. 미국·「캐나다」 다음가는 막대한 양이었다.바로 그 소련이 지난 72년부터는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다. 72, 75년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흉년이 들어 곡물의 수확량은 일시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때 농민들은 가축을 죽여 들에 버리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었다.「미·소 곡물협정」이 서둘러 체결된 것도 이 무렵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27060#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