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기..
여보세요?
선배
안녕하세요.
 
네 저에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휴대폰 번호로 걸었으니까
저 이외의 사람이 받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아니면
다른 여자의 전화번호랑 제 전화번호가 섞여서 알 수 없게 되었나요?
 
하아
변명은 됐으니까 하려던 얘기를 해주세요.
저한테 무슨 일이신가요?
 
흐음~ 그런가요.
용건도 없는데 전화하신 거네요.
 
아니요 아무것도.
연인사이니까요.
용건이 없어도 소소한 대화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보통의 관계라면
밤 늦게 급한 용무도 없이 전화를 걸어 온다니
몰상식하기 짝이 없지만
여자친구한테는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아무 용건도 없다곤 해도
사흘이나 저를 방치해두고
성가신 여자친구가 없는 즐겁고 즐거운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배를 움켜쥐고 웃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가지는 들려주겠죠?
 
뭔가요?
별로 화나지 않았어요.
선배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게 너무 기뻐서 환희가 넘쳐 화난 것처럼 들리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빨리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리고
저를 웃겨주세요.
자 빨리
해주세요.
 
뭘 사과하는 건가요?
어떤 거에 화가 났는지 말해주지 않은 채로 그냥 사과를 받으면
제가 이유도 없이 화나서 남자친구를 귀찮게 하는 성가신 여자처럼 되잖아요.
 
아니면 정말로..
성가신 저는 아무래도 좋아져서..
다른 여자랑 놀았다던가 하는 건가요..?
 
아닌 거네요.
그러면 일일이 저를 걱정시키지 말아주세요.
 
하아
알겠어요.
그럼 이런 때니까 사실을 말할게요.
오늘 저는 기분이 별로예요.
 

이유는 어차피 선배가 이해할 수 없으니까 가르쳐드릴게요.
제가 집으로 가기 전날 밤
오늘 이날까지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알고 있었으면 왜 전화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요.
첫날 보낸 메일은 봤어요.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내용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뭐가 ‘전화할까?’인가요.
결정권을 저에게 맡기지 말아주세요.
그런 제안에 ‘걸어주세요’라고 답신하면
제가 남자친구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전화를 하게 하는 제멋대로인 여자같이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통화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답장할 수도 없고..
그때 제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라고 하면
본문에는 아무것도 안 쓰고
그냥 제 사진을 첨부해서 계속 보내는 거 정도였어요.
 

그건 이상한 사이트의 스팸 메일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여자친구의 사진이에요.
저를 만날 수 없는 외로움에 빠져 있을 선배를 위해
매일매일 빠짐없이
얼굴이나 가슴 같은 기본적인 곳은 물론
목덜미, 쇄골, 겨드랑이, 배, 발 같은 페티시즘이 넘치는 부분까지 전부 보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어땠나요?
제 사진
이상한 곳에 썼나요?
제가 그런 목적으로 보낸 건 아니지만..
제 매력 앞에서 참지 못하고 써버리고 마는 기분도 이해하고
이미 선배 손에 넘어가버린 이상 이제 와서 제가 이것저것 말 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솔직하게 자백해주세요.
 
저기..
침묵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주세요.
둘만의 비밀이니까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도청도 안 당하고 있어요.
자 작은 소리라도 괜찮으니까 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선배를 제대로 만족시켜 주고 있는지 불안하니까요.
선배는.. 제 사진으로.. 어떤 걸 하고 있었나요?
 

고마워요.
선배는 그러면 돼요.
사귀지 않았을 때 제 사진을 반찬으로 이상한 짓을 했던 것처럼
체면을 챙기지 말고 저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돼요.
 
그리고
오늘까지 저에게 전화하지 않은 거, 이제 화 풀렸어요.
그렇다기보다
처음부터 화나지 않았어요.
전화가 갑자기 와서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로 오랜만에 선배와 이야기하게 돼서 부끄러워서..
또 옛날처럼
솔직하게 못하고 쑥스러워서..
심한 말을 한 것 뿐이에요.
 
뭐.. 전화를 하지 않은 불만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심이라고 할까..
불안감에 3일 동안 제대로 진정할 수 없어서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해서
불만 밖에 없지만
그래도..
선배가 저에게 선택지를 남겨주는 상냥함은 제대로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선배
저야말로 죄송했어요.
솔직하지 못한 성격을 바꾸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런가요.
선배
의외로 상냥하시네요.
모라하라 남자친구니까 틀림없이 전화로 엄청 화낼 거라고 생각했어요.(*모라하라 : 정신적 폭력이나 학대)
농담이에요.
오랜만에 선배님 목소리 들어서
앞으로 세 시간 정도는 잡담하거나
제가 보낸 사진의 어느 부위로 어떤 망상을 하면서 어떤 일에 썼는지를 차분히 추궁하고 싶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야 하니까
이제 끊을게요.
 
오늘은..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이야기를 더 하는 건 내일, 선배의 집에서 느긋하게 해요.
 

그러면 안녕히 주무세요.
 
저기.. 선배
전화 끊어주세요.
 
아니요 저는..
끊는게 조금 늦었을 뿐이에요.
별로 선배보다 먼저 끊으면 쓸쓸한 생각을 하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서 선배가 끊는 걸 기다리거나 한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하나, 둘’이라고 하면 동시에 끊는 거예요.
이러면 서로 평등하고 신경 쓸 일 없이 전화를 끊을 수 있어요.
 

갈게요.
하나 둘
 
저기.. 제 말 들었나요?
하나 둘에 끊는 거예요.
말하고 나서 벌써 5초는 지났어요.
 
선배의 반사신경 어떻게 돼있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오늘은 척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반응이 늦었어요.
 
하아.. 어쩔 수 없네요.
이대로 선배랑 바보커플 같은 일을 해버리면 내일 아침 늦잠을 자 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돌아가는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져서
선배랑 있을 시간도 없어질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전화를 끊는 건 이제 포기하고
머리맡에 둔 채로 잘게요.
선배는 끊고 싶은 타이밍에 끊어도 상관없어요.
혹시 저랑 아직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얘기해 주세요.
 
잠들어 있어도
꼭 일어나서 대답할 테니까요.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잘게요.
 
선배
돌아가면
또 잔뜩
키스 해드릴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