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으로 이어진 구멍들 사이에서 개미들이 빠져나오듯 사람들이 지하철역에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일상의 권태로움과 삶의 피곤함에 어느샌가 웃음이라던가 배려는 사라진 도시. 그회색빛 풍경 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은 두 어린 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형아 우리 어디가, 6살 쯤 되보이는 아이는 위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꼬마의 손을 잡은 아
이 역시 어려보이긴 매한가지. 기껏해야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앳된 외모였다. 형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동생을 한번 내려다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칭얼대는 동생을 이끌고 작은보폭으로 어른들 사이를 걷는 아이의 눈은 추웠다. 그 또래의 아이들답지 않은, 그런 추위.
아이들의 엄마는 필리핀에서 온 국제신부였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10년 동안 간호하고, 자식들을 먹여살리던 그녀는 큰 아이의 10번째 생일날 결국 집을 떠나고말았다. 책상 위에 남겨진 자그만한 케이크와 만원 지폐 다섯장. 생일날 아침 기대감에 부풀어 눈을 뜬 아이를 위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선물이었다. 편지 한장 조차 없었다. 10년전 이 나라를 왔을때처럼 현실에 지친 그녀는 슬픈 눈을 한 채 집을 나섰을 것이다. 구청에서 오는 도우미 아줌마가 오기 전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입고, 동생을 깨웠다. 목도리 싫어 답답해, 갑작스런 외출에 심술이 난 동생이 땡깡을 부렸지만 형은 그저 주섬주섬 옷가지와 공책, 연필 몇자루, 그리고 5만 원을 챙길 뿐 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지 사흘 째, 아이들은 정처없이 엄마를 찾아 길 위를 떠돌고 있었다. 친척 하나 없는 그들을 받아줄 곳은 다행히 마음씨가 좋았던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던 피씨방과 허름한 찜질방이었다. 캄캄해질때까지 돌아다닌 뒤 그들은 겨우 빵 두 개를 사 더욱더 캄캄한 구석에 앉아 허기를 떼웠다. 남은 돈은 이제 겨우 만원. 4일째 되는 날 형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엄마가 전 에 일하던 식당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지하철을 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은 처음 타보는 지하철이 신기해 방방 뛰었다. 지하철 역을 나오는데 델리만주의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어릴적 딱 한번 엄마가 사줬던 델리만주. 동생을 잡은 손이 뒤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입을 벌리고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향에 빠진 동생을 보는 형은 어쩔수가 없었다. 자신은 먹어보기라도 했지 동생은 그러지조차 못했잖은가. 마지막 남은 만원이지만, 엄마를 찾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더 헤매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은 그들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도저히 동생의 눈빛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잠깐만 있어봐, 아이는 동생의 손을 놓고 돈을 꺼내려 등에 맨 가방을 열었다. 그러나 가방 입구 속에 보인 건 아이의 낯빛보다 더 창백한 색의 대리석 바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