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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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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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제자와 답답한 스승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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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수도자로서 훗날 산트릴랑이라 불릴 마리 드 로셀리에와 그 제자로서 죈노비스라고도 불리는 베르토눌라는 며칠을 걸은 끝에 제누아에 다다라서 그곳 수도원에 묵었다. 베르토눌라가 날랜 다리와 굳센 팔로 그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장작을 패고 건물을 고치고 짐까지 나른 덕에, 다음 여행길을 위한 질 좋은 물자를 잔뜩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빵과 치즈, 깔고 눕기 좋게 넓게 편 가죽과 밧줄, 양초, 양피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부대에 이르는 각종 물품은 물론이고 말까지 한 마리 있었다. 베르토눌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따졌다.


"내가 해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말 한 마리가 뭐냐?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마차까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자 산트릴랑이 기도문을 외워 그를 굴복시킨 다음 연신 감사를 표한 뒤 물러났다.


다음 목적지인 플로렌티아(Florentia)는 옛 로마 제국 때 깔려 이탈리아 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직통로에 위치한 도시 중 하나였는데, 이곳에 한번 다다르면 첫 총대주교좌가 위치한 로마까지 손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산트릴랑은 짐 일부를 든 채 말에 타고 나머지는 전부 죈노비스가 들도록 한 채 출발해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말을 탄 덕에 전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둘은 금세 마르가(Marga) 강과 바라(Vara) 강이 만나는 지점에 예상보다 하루 일찍 이르렀다.


베르토눌라는 그곳에서 요술로 물을 정화하고 옮겨 식수를 충당했고, 그동안 산트릴랑은 불을 피워 기도를 올렸다.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두 사람이 열중하는 동안, 제누아에서 얻은 말은 주변에서 노닐며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방심한 틈에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큰 파도가 치는 소리가 나기에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이 돌아보니, 두 강이 만나 물이 흘러넘쳐 호수를 형성하 곳에서 거대한 드래곤이 나온 게 아닌가? 그 용모는 앞다리까지만 드러났는데도 그 드러난 부분만으로 여느 왕성을 내려다볼 만큼 거대했다. 또, 온몸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날카로운 비늘에 덮이고, 입은 커다란 머리를 둘로 나눌듯이 크게 벌어지고, 푸른 눈은 뱀과 같았으며, 이빨과 손톱은 소라 껍데기 같았다.



베르토눌라는 스승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라 말을 노렸고, 순식간에 입으로 말을 낚아채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눈 뜨고 말을 빼앗긴 격이 된 베르토눌라는 격분해서 툴리코기툼을 뽑아 들었지만, 산트릴랑이 그를 말렸다.


"죈노비스! 그거 휘두른다고 이미 잃은 말이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잖니. 나도 그 애가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은 돈 모아서 또 사면 된단다. 그보다 우리 둘이 무사한 것에 감사하자."


"이거 놓으시오, 스승이여! 소싯적에 황금 사과도 지켰던 나를 기만하다니, 저 송사리를 이 툴리코기툼으로 한 삼십 대쯤 대가리를 후려쳐 주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리겠소!"


베르토눌라는 어깨죽지를 치켜 올리며 자신을 말라던 스승을 뿌리쳐 바닥에 나뒹굴게 하고는 즉시 호수 위 공중을 밟고 툴리코기툼을 석 리그쯤 늘였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마구잡이로 호수 바닥을 쑤시고 휘저었다. 이에 그 주변 땅이 울려 지진이라도 난 듯했고, 들짐승들마저 겁을 먹고 쏘다녀 말 글자 그대로 대혼돈이었다. 산트릴랑은 다시 죈노비스를 말리려 했으나, 호수를 휘저으며 생긴 파도가 호숫가를 덮치는 것이 두려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고, 땅 울리는 굉음 탓에 목소리도 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울리는 소리와 다른, 사람 말소리 비슷한 것이 또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어떤 반항적인 하급 신이 포세이돈님 명령도 안 받고 지진을 일으키는 거야!"


그것들은 호수 주변의 땅과 물의 토속신들의 고함이었다. 사실 올림푸스를 따르는 각지의 토속신들은 포세이돈의 명을 받고 재해를 일으키는데, 이번엔 명령을 들은 자가 그들 가운데 없었음에도 땅이 자꾸 울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하면서 신을 거스르려는 자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자, 정신없이 재난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산트릴랑이 그들의 말을 듣고 외쳤다.


"도와 주세요! 제 제자가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자기가 내는 소음 탓에 제 목소리도 못 듣나 봐요!"


토속신들이 그것을 알아듣고 호수 위를 바라보니, 공중에 떠서 지진을 일으키는 자가 보였다. 그는 다름아닌 한때 자신들의 주인들과도 겨루었던 문둠비케라타스였다. 이에 그들은 두려워하였으나, 그를 방치하면 주변의 숲과 짐승들과 사람들이 죽거나 살 곳을 잃을 게 뻔했기에 하는 수 없이 떼지어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오, 문둠비케라타스여! 노여움을 풀고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 주변이 모두 물에 잠기겠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베르토눌라는, 자신이 제 성질을 못 이겨 호수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마법으로 그 땅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그들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돌았었군. 용서해 주게. 나는 나자렛 예수로부터 오백 년간 벌을 받고 그의 말에 따라 저기 있는 수도자를 스승으로 삼은 뒤 함부로 죄를 짓지 않기로 한 몸이고, 이 사달도 일부러 일으킨 게 아니다. 이 호수 아래에 사는 괴물이 내 스승이 타는 말을 잡아먹고 숨어버렸는데, 그놈을 잡으려다 주변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토속신들이 자기들끼리 잠깐 말을 섞더니, 곧 베르토눌라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당신을 제멋대로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문둠비케라타스께서 망가진 땅과 물을 복구하시고 용서를 청하시니, 이 일을 없던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이 호수의 드래곤이 당신에게 원한을 샀다기에 말씀드리거니와, 막대로 바닥을 들쑤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 호수의 바닥에는 서로 통하는 수천 개의 굴이 주변 몇십 리그의 땅 깊숙한 곳으로 뻗었기 때문에 그 괴물은 당신이 물러갈 때까지 굴들을 쏘다니며 공격을 피할 것입니다."


베르토눌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자 토속신들이 대답했다.


"그 드라콘은 본래 바다의 왕자이자 포세이돈 님의 아들이신 트리톤님의 세 번째 적녀입니다. 그는 어느 날 에트나 화산에서 튀어 바다로 들어간 용암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지고 놀다 실수로 포세이돈님의 허벅지에 던져 화상을 입히고는 사죄를 하지 않고 냅다 도망치려 했지요. 이에 포세이돈님께서는 분통을 터뜨리시며 그를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에 던져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트리톤님께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올림푸스의 다른 신들께 중재를 요청하셨지만, 제우스님께서 에트나 산의 용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절대로 그 딸을 용서해선 안 된다고 선언하셨고..."


"그래서? 올림푸스 신들이 안 된다 하셨으니, 설마 나자렛의 예수를 찾아갔다더냐?"


베르토눌라는 불안한 목소리로 토속신들의 말을 중간에 끊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베르토눌라를 바라보았고, 이에 그는 혀를 찼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짜로 따님이 분화구에 들어가기 직전에 예수님께 간청해서 포세이돈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셨고, 포세이돈님은 손녀따님께 다른 벌을 내리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 벌이 바로 이 호수에 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인데, 자세한 것은 저희도 모릅니다."


"알겠다. 더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자를 또 찾아가야겠구나."


토속신들의 설명을 다 들은 베르토눌라는 주먹을 떨며 스승 앞으로 가서 말했다.


"스승이여, 저 드래곤을 끄집어 내려면 나자렛 예수에게 가야 할 것 같소. 저것을 이 호수에 심어 둔 자가 그라는구려."


그러자 지진이 멈춰서 겨우 마음을 추스린 산트릴랑이 제자를 말렸다.


"죈노비스! 예수님께 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죽어서 천국에 가겠단 말이니? 그만두렴! 정녕 내가 말을 잃은 게 주님의 뜻이라면 그냥 걸어갈게.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지만,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여정에 그분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니?"


그 말을 들은 제자는 역정을 내며 소리쳤고, 스승도 그에 대꾸하며 말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예수 하나를 못 이겼을 뿐, 결코 약자가 아니오! 올림푸스도 직접 가서 밟아 본 이 몸이 그깟 천당을 못 갈 것 같소? 그리고 당신이 말을 잃은 게 그자의 뜻일 수는 있어도, 내 뜻은 절대 못 되오!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끌고 마법을 부려서 다섯 도시를 재까닥 한 번씩 들러 이 짓거리를 끝내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순례가 되지 못한다며 당신이 저지하는 탓에 그러질 못하는 게 아니오! 그나마 말 타는 건 당신도 괜찮은 듯해서 참고 있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내다 버리고 가려는 거요?"


"어쩔 수 없잖니. 무릇 순례란 주님과 관련이 있는 땅을 직접 찾아가서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과 의지를 체험하고 예배와 존경을 드리는 것이야. 그런데 마술을 써서 자기 방 한 번 도는 것마냥 쉽고 빠르게 끝내버리면, 그들이 강생구속(降生救贖)의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기 위해 치른 고귀한 희생들을 어떻게 온전히 체감하고 상기할 수 있겠니? 그럴 거면 차라리 방에 드러누워서 성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을 흝어보는 것이 낫지."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입씨름을 하는데, 난데없이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그들을 붙잡고 말했다.


"주님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