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검이라 불리는 용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인 이곳 레스카티에엔 각양각색의 다양한 용사들이 모여 있다. 레스카티에 최고 귀족 가문의 딸로서 태어나 용사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교회를 맡고 있는 수녀이면서도 용사인 사람도 있다. 하프엘프이면서도 용사의 칭호를 받은 자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나처럼 평민 출신으로 용사가 된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용사들은 각각의 출신과 신분에 상관없이 교단에의 순명과 주신께의 헌신만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는다. 주신 앞에서 귀족이던 평민이던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내가 귀족 가문 출신 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리고 그 종자는 누군가 내게 보냈다는 서신을 가지러 갔다 막 돌아오는 참이었다.


"세라리드님, 성빙화 기사단에서 입단 제의가 있었습니다. 노스크림 가문의 장녀가 이끄는 그 이름높은 곳에서..."


"그 제의는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해 주세요. 저는 일선의 전사들과 함께 싸우고 싶으니까..."
내 방의 문이 열리고 종자가 들뜬 표정을 한채 뛰어 들어온다. 최강의 용사가 있다는 기사단의 입단 제의라. 그 소식에 그렇게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나는 특정 단체에 소속되기보다는 교국 정규군에 남고 싶은 마음뿐이다.


"알겠습니다. 뭐, 세라리드님이라면 그리 말씀히실 줄 알았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에게는 제가 그 기사단에 들어가는 편이 좋은 이야기겠지만"


"세라리드님의 장병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존경스럽습니다.


"존경받을 건 아니예요. 주신의 검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뿐이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존경스럽다'는 말, 용사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고생스러운 현장임무만을 고집하는 나를 칭찬하기 위한 말이겠지만... 사실 존경받을 만한 일은 절대 아니다.

내가 용사가 되기 전 고향 마을에서 살 때 소꿉친구이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내가 용사로 선택받아 레스카티에로 떠나온 이후 그는 고향 마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 교국의 군대의 신병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를 찾기 위해서 계속 일선에 배치되어 있기를 고집한 것이었다.


"그렇게 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장병들은 세라리드님의 존재로 인해 큰 위안을 얻고 있으니까요. 자신들과 끝까지 함께 싸워주는 용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계속 교국 정규군 소속으로 남아있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알고 계셨겠지만 이번에 다른 부대와의 합동훈련 계획이 잡혔습니다. 준비를 위해 먼저 병영으로 가보겠습니다."


"네. 저도 곧 갈 테니 수고해 주세요."

불순한 이유로 일선에서 일하고 있지만 용사로서의 책무는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이렇게라도 주신과 그 백성들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을 수호해야하는 용사가 단 한명의 특별한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으니까.

전 인류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한 몸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모순된 내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을 느낀다. 그런 착잡한 기분을 털기 위해 일부러 평소보다 요란한 발걸음으로 병영에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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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카티에 교외에서 행해지는 이번 합동훈련은 수도를 지키는 부대뿐 아니라 교외에 배치된 부대와 성기사단까지 참여하는 꽤나 큰 규모였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이면 그를 찾아내기 어려운데. 귀에 들려오는 주교의 축사를 듣는둥 마는둥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번 훈련은 마물군의 총공세 상황에 대비한 합동방어훈련으로서..."

알렉스... 알렉스...

몇년동안 레스카티에 방위군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소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레스카티에의 땅 곳곳에서 마물들의 은신처를 찾는 이곳 유격부대 군영이라던가... 소중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리운 이름을 되뇌이며 그의 모습을 찾는다.


"여기 모인 장성들과 용사들은 이 훈련을 통해 한층 더 예리해진 검으로서 주신의 의지를 행하기를..."


알... 알...


나도 모르게 손이 머리 뒤편으로 향한다. 말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린 뒷머리를 묶는 머리끈을 만지작대는 손버릇이다. 10년 전 용사가 되어 고향을 떠나오기 전에 받은 마지막 선물이 알렉스가 손수 색실로 엮어낸 이 머리끈이다. 지난 몇년동안 그를 찾아내지 못해 어릴적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도 이 머리끈의 존재가 그와 나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세라! 이제 레스카티에로 간다며? 나 없으면 외톨이 세라리드가 외로워서 어쩌나~'


'나는 이제 용사님이 될 테니까 혼자서도 외롭지 않거든!
ㅁ.....뭐, 그래도 가끔 얼굴 정도는 보러 와줄수 있어.'


'흐흥, 역시 나랑 떨어지는게 외로운 거지? 너는 여자애인 주제에 바느질도 요리도 잘 못하니까 내가 있어줘야 하는데.'


그리 말하면서 알은 주머니에서 색색의 실의 매듭으로 되어 있는 긴 끈을 꺼내 내게 건네 주고는 작별인사도 없이 뒤돌아 버렸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보아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장난꾸러기면서 사실은 여린 마음을 가진 게 그의 가장 귀여운 점이었다. 내가 나중에 자신을 만나러 올 테니 작별인사는 필요 없다는 그의 말에 나 역시도 훗날 그를 꼭 만나러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고향에는 그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행방을 물어도 돌아오는 것은 대화를 거부하는 곤란한 표정뿐. 나는 그렇게 첫사랑의 남자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알, 만나고 싶어....


"....님? 세라리드님!"


"아, 네. 말씀하십시오."
내 이름을 부르는 종자의 목소리에 의식이 현실로 돌아온다. 주교가 단상에 올랐을 때부터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단상에 아무도 없다. 꽤 긴 시간동안 회상에 빠져있었던 듯 하다.


"축사가 끝났습니다... 세라리드 님께서 그렇게 멍하니 계시다니,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닙니다. 잠시 옛 생각에 빠져버린 탓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리 쪽 군영으로 돌아가시죠."


"아, 먼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조금 할 일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후에는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니 그 전까지 돌아와 주십시오."

내 의사에 군말없이 따라 군영으로 혼자 돌아가는 종자를 배웅한 후 다시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갈색 곱슬머리는 변하지 않았겠지. 군영의 중앙 임시막사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 병사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갈색 머리 남자는 안 보이네. 물어서 찾아야겠... 윽!"


"세라리드. 걸을 때는 앞을 잘 보셔야지요."


"죄송합니... 엘렌? 당신도 이 훈련에 참가하셨군요? 그간 안녕하셨나요?"
옅은 금색 장발의 화사한 색채와 대비되는 병약한 인상의 창백한 얼굴색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자 나와 함께 최전선에 배치된 용사 중 하나인 엘렌이 눈앞에 있었다.

엘렌의 아버지가 레스카티에에 계실 때에는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신부셨고, 그 덕분에 엘렌과는 예전부터 안면이 트여 있다. 지금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의 교회로 떠나신 듯 하지만...


"저는 무탈히 지냈습니다. 여기 찾는 분이라도 계신가요?"


"네... 혹시 알렉스라는 남성의 이름을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제가 있는 레스카티에 방위부대에는 없는것 같아 다른 부대에 소속되어있지 않을까 해서요."


"확실히 이 부대에는 알렉스라는 남성이 있습니다. 그가 당신이 찾던 이인지는 모르지만..."


"정말요?? 지.. 지금 어디쯤에 있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이렇게나 쉽게 찾아내다니, 래스카티에에서 못 찾았으니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임무 외의 사정으로는 레스카티에 밖으로 나가는것을 허락치 않는다. 그런 교단이 살짝 원망스럽...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내게 주어진 의무는 교국 수도의 수호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인데, 레스카티에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이렇게다시 알을 만나게 된 것을 주신께 감사드려야겠지. 머리를 붕붕 흔들어 순간 떠올랐던 불경한 생각을 지운다.


"그런데... 그와 무슨 관계시죠?"


"어릴적부터 사귄 소중한 친구예요. 첫사랑이기도 하고.."
알렉스와의 관계를 물어오는 엘렌의 질문에 그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대답한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엘렌의 눈매가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흠... 정말 소중한 사람인가 보군요. 하지만 세라, 그런 관계는 주신과 인류의 검인 용사에게 허락되지 않습..."
8등신의 신장과 날카로운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고고한 분위기에 맞추듯이 그녀는 꽤나 고지식하고 잔소리가 많은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상냥한 구석이 있는 곳이 엘렌이라는 여성의 매력이지만 지금은 1초라도 빨리 알을 만나러 가고 싶은 기분이기에 대 엘렌용 필살기를 꺼낸다.


"엘렌도 소중한 사람이 있잖아요. 엘렌이 신부님께 보내는 그 열띤 시선을 보고 있자면 제가 다 낯간지러워지는걸요?"


"네? ㅇ...아..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버님을 딸로서 존경할 뿐입니다. 결코 아버님을 바라보며 애달픈 마음이 들었던 적도 없고 절대 아버님께 그런 애틋한 시선을 보낸 적도..."


"엘렌은 신부님 이야기만 나오면 진정하지를 못하네요.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는 언제나 응원하고 있답니다. 이제 저도 소중한 사람을 만나도록 도와 주시겠어요?"


"으... 자각은 하고 있지만 저도 어쩔수가 없네요. 그는 척후 및 정찰의 보직을 맡아 지금쯤 군영지 서쪽 관문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훈련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움직일 테니 만나보시려면 지금 바로 가십시오."


"고마워요, 엘렌. 당신도 사랑하는 아버님을 만나뵈러 갈 기회가 있기를."
평소엔 무뚝뚝하고 고지식하지만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귀여운 소녀가 되어 버리는 그녀. 별 것 아닌 유도신문에도 보기좋게 걸려 버린다. 그렇기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작별인사를 듣고 얼굴이 빨개져 손만 휘적휘적 흔드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알이 있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엘렌은 디시에 있을적에 썼던 다른 소설의 여주였읍니다. 파더콘은 정말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