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아직 안에 있냐?"



호랑이 여인이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오두막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호랑이 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령 녀석이 수도에서 돌아온 후 저 오두막에 짱박혀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저 오두막은 예전에 신령과 그 청년이 함께 살던 곳이였다.


 


...지금은 신령 밖에 없지만.


호랑이 여인은 구미호로부터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들은 터였다.



신령이 저 집 안에 짱박히고 난 후 부터 신령이 관리해야 할 계곡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더니, 오늘은 아예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조리 말라버렸다.



계곡이 그 꼴이 났다는 것은, 신령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뜻이였다.


친구로써 호랑이 여인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계곡이 그 상태로 계속 유지되었다간 신령에게도 무슨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신령의 존재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보다못해 호랑이 여인은 밤을 틈타 마을로 내려와 신령을 집 밖으로 끄집어내러 온 것이였다.


 



"야,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문 열어."


 


"..."


 


"너 지금 네가 관리하는 계곡이 어떻게 되버린 줄은 알아?"


 


"..."


 


"야!!! 문 열라고!!! 안 그러면 내가 문 뜯고 쳐들어간다!!!"


 


"..."


 


"야, 나 문 연다. 나 막지 마. 나 들어간다."


 


"..."


 


 


호랑이 여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한 손으로 문짝을 잡아 뜯어버렸다.

그러자 오두막 안의 시커멓게 썩어들어간, 음기가 끔찍히 많이 섞인 공기가 쏟아져나와 그녀의 숨통을 막았다.


 


 


"흐읍...!!! 이런 미친..."


 


 


호랑이 여인은 밝은 밤눈 덕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음기 덩어리들 너머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엄청나게 끔찍하고 어두운 기운이다. 호랑이 여인과 같은 신적 존재가 아닌 일반 인간이나 짐승이라면 저 음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기절하거나 죽고 말리라.


 


저 끔찍한 구렁텅이 안에 신령 녀석이 있다고?



대체 안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호랑이 여인은 숨을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을 더듬거려 끔찍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친구를 찾아냈다.


 


세상에, 꼴이 말이 아니였다.


폭포같던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은 색을 잃고 바래버렸고, 눈동자는 썩은 동태눈에, 눈 밑에는 피눈물을 줄줄 흘린 자국까지...


게다가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시커먼 음기가 흘러나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호랑이 여인은 지금까지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경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이 녀석을 데리고 이 끔찍한 집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야, 빨랑 일어서. 눈 똑바로 뜨고! 빨리 일어나! 너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진짜 죽어!"


 


"...래..."



"뭐?? 안들려. 됐고, 일어나기나 해. 빨리 일어나라고!"



"... 차라리 죽을래..."


 



그 말과 동시에 신령의 눈가에 붉은 피가 맺혔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 난... 그냥 이대로 죽을래... 살아있고 싶지 않아...

난... 난...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냥 날 여기 놔둬 줘... 날... 날... 내버려 둬..."


 


 


호랑이 여인은 친구가 죽고싶다고 웅얼거리는 걸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꽈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꽉 다물고는 주먹질을 날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신령의 목이 거의 부러질 수준으로 휘청거렸다. 다행히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신령의 한쪽 뺨이 퍼렇게 부풀어 올랐고, 이내 눈가에 피 대신 말간 눈물이 맺혔다.


 


 


"아... 아파..."


 


"아 그래? 아파? 너 죽고싶다며? 내가 죽여줄게. 이리 와."


 


 


호랑이 여인은 다시 한번 더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다시 울렸고, 신령의 뺨은 더 부풀어 올랐다.


 


 


"아... 아파... 아파..."


 


"원래 죽는 건 아파. 내가 죽여줄게. 이리 와. 어딜 도망가?

어딜 도망가냐고!!! 이리 와!!!"


 



신령은 부풀어오른 뺨을 움켜쥐고 호랑이 여인을 피해 방 안쪽으로 깊숙히 몸을 숨겼다.


그녀의 눈에는 확실히 생기가 돌아왔고, 맑고 깨끗한 눈물이 계곡물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통에 뺨을 움켜쥔 채로 웅크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호랑이 여인은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이를 악물고 신령의 반대쪽 뺨을 후려갈겼다.


 


 


쩌억!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신령의 입 안에서 뭔가가 튀어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이빨 하나가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나뒹굴었고, 신령은 잠깐 현실감각을 잃은 듯 멍때리다가, 이내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이... 이빨이...!! 아아악..."


 


"왜??? 왜??? 죽고싶다며!! 죽고싶다며!!! 이리 와!!! 마저 죽여줄테니까!!!"


 


"시...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죽기 싫단 말이야...!!!"


 


 


신령은 비명을 내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호랑이 여인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죽기 싫잖아, 이 바보 멍청아... 근데 왜 죽고 싶다고 그래? 왜... 왜... 그랬어...?? 죽기 싫잖아 너도... 죽기 싫잖아..."



"...흐윽... 윽... 아파... 숨막혀... 공기가...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일단 나가자. 응? 여기 이 안은 이제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돼.


나도 숨 막히니까... 이제 나가자... 알겠지?"


 


 


신령은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빠져버려서,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비틀거리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호랑이 여인은 그런 신령을 껴안고, 시커먼 음기가 가득한 집 안에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맑아지고 살 것 같았다.


아까까지 자기 자신이 내뱉은 음기에 숨막혀하고 있던 신령은 켁켁거리며 다시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했다.



신령의 입 안에 가득 고인 피가 흘러내려 호랑이 여인의 모피를 적셨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족했다.


호랑이 여인은 신령을 껴안고 천천히 산 속에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보름달은 밤하늘에서 무심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


 


 


 



"...정말 다 말라 버렸네..."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나?"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신령이 자신이 관리하던 계곡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신령을 껴안고 산을 오르느라 진땀 뺀 호랑이 여인이 바위에 몸을 기대 쉬는 사이,


신령은 자신이 관리했던 계곡이 있던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백년 전, 자신이 태어난 곳이 여기였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실상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호랑이 여인을 만난 곳도 여기였다.


그녀와 술을 즐기며 밤을 새던 곳도 여기였다.


 


그리고... 그이를 처음 만났던 곳도 여기였다.



인간으로 변장해서 어렸던 그와 친해지려 했던 곳도 여기...


그이가 매일 아침 물을 뜨러 왔던 곳도 여기...


그이를...



그이는...


 



"흐읍... 흑..."



"... 왜 또 울어 임마..."



"흑... 으윽... 너무 괴로워... 너무 슬퍼..."


 


"...인간들이란 원래 그런 거야. 너무 짧게 살다 가는 생명이다 보니, 뭐든 해보고 싶어 안달이지.


그래서 약속도 안 지키고... 누군가를 배신하기도 잘 해."


 


"그래도... 난 그이를 믿었어... 반드시 돌아와 줄 거라고 했어... 그런데 그이는... 그이는..."


 


"...이제 그 놈은 잊어. 잊는 게 최고야.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다. 그런 일들은 잊는 게 나아. 기억해 봤자 별 도움도 안돼."


 


"...하지만 잊혀지질 않는걸... 그이의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리는걸...


손을 뻗으면 즉시 닿을 것만 같이... 아직도 그이가 그리워..."


 


 


"...휴우... 사랑이란게 대체 뭔지..."



"...흐윽..."


 



신령은 울음을 삼키고는 둥근 자갈돌 하나를 집어 메마른 계곡 바닥에 집어던졌다.


툭 데구르르 하고 돌이 메말라버린 바닥에 굴러갔다.


 



"...여기에 다시 물을 채우려면... 일단 내 기분이 좀 나아져야 뭐든 간에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도와 줄 수 있을까? 술이라도 마실래?"


 


"...아니. 술 마시면 눈물만 더 나올 것 같아."


 



신령은 눈을 감고 그이와 함께 지냈던 행복했던,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와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순간 행복감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와 이어질 수 없으며, 그이는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머릿속 깊이 파고들었다.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히고 솟아올렸던 야속한 행복감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휴우... 정말... 못 잊겠어... 못 잊겠다구... 그걸 어떻게 잊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였단 말이야... 사랑...


내 사랑하는 사람... 내 사랑..."


 



호랑이 여인은 그 청년을 떠올리며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는 신령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친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어 줄 수 없다는 현실에서 나오는 무력감에 화도 났다.


 


 


 


 


...화...?


분노?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야. 그렇게 울지만 말고, 화는 안 나?"


 


"으응...??"


 


"화 안 나냐고, 그 녀석에게. 널 헌신짝처럼 내팽겨쳤다고."


 


"..."


 


"너, 정말 그 녀석에게 아무런 짓도 안 할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복수하라고. 널 버린 그놈에게 말야."


 


"...솔직히 화가 좀 나지만... 사실 많이 나지만... 그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난 그이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할 수 없어...


그이의 얼굴만 떠올리면 바로 나쁜 짓 할 생각이 사라지는 걸..."


 


"정말이냐? 그 놈은 이제 널 버리고 다른 여자랑 살 거란 말이야.


다른 년이랑 오순도순 살 거라고. 그것도 네가 닦아 준 기반 위에서 말이야. 진짜 화 안 나?"


 


"..."


 


 


순간 신령의 눈동자 속에서 작은 불꽃이 파박하고 튀었다.


 


호랑이 여인은 솔직히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부추겨도 되는건지 고민되기 시작했지만,


일단은 이 신령 녀석이 기운을 낼 수 있도록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말을 이었다.


지금 기운을 내서 계곡을 복구하지 않으면, 신령이 영영 사라져버릴수도 있으니.


 



"그 녀석에게 직접 해코지를 하라는 게 아니야.

네가 겪은 슬픔, 무력감을 그대로 겪게 해 줘.


네 슬픔을, 고통을 그 녀석도 느끼게 해 주란 말야!


너 혼자만 그렇게 울고 있을거야?

억울하지도 않아? 네가 지금까지 그 녀석에게 해준 게 얼만데?"


 



신령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신령은 두 손을 꽉 쥐며 뭔가 결심했다.


그녀의 뒤에, 원래 계곡이 있던 자리에, 메말라있던 계곡 바닥에서 물이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신령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래... 인간 주제에... 신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


 



신령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계곡의 물줄기가 더욱 힘차게 솟아올랐다.


 



"후회하게 해 주마...! 내 마음을 가지고 논 걸 후회하게 해 줄거라고 ...!


아하하하하하하...!!!"


 


 


계곡은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콸콸 쏟아져내리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신령이 서 있었다.


호랑이 여인은 친구가 다시 힘을 내며 일어선 모습에 약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걱정되었다.



이거... 내가 잘 한거 맞는 거겠지...??



혹시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마는 건 아닐까?


...뭐 어때.



적어도 내 친구가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건 막았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뭐...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