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림표--






상인•모험가 조합의 비밀스럽게 감춰진 마드리에 조합장의 숨겨진 방 안쪽.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환시의 마법이 걸린 창문과, 빛을 가리는 암막커튼이 쳐져 빛을 가리는 방의 침대에서 누워 잠들어있는 페나르핀.


"...읏....!....윽...!"


시체같이 창백한 피부의 페나르핀이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르...트..."


꿈 속에서, 페나르핀은 게르트가 떠나갔던 그 날을 꿈꾸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만이 남은 나무가 무성한 눈 덮힌 타루갈 숲에서, 아들과의 대결을 멋대로 져버린 페나르핀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검 - 야츠후사가 땅에 떨어져 박혀있었고, 게르트는 주저앉은 스승을 눈길조차 주지 않고선 차갑게 돌아서서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한걸음씩 내딛을때마다 뿌득 뿌득 소리를 내는 눈들을 거침없이 밟아가며 게르트는 앞으로 걸어갔다.


미련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듯, 그저 묵묵히 앞을 보며, 아들은 떠나가고 있었다.


"게르트..! 아가! dartha(잠깐)...!"


페나르핀은 주저앉아 울부짖으며 멀어져만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마치 땅과 하나가 된 듯, 자신의 다리가 바위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여지지 않음을 깨달은 페나르핀은 목청껏 게르트를 불러세웠다.


"mecin...mecin pusta...!"

(제발...제발 멈춰...!)


하지만, 그러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게르트는 그저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페나르핀은 가슴이 찢어지는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울부짖었다.


"읏...!...게르트, 내 아가! 제발....제발! 가지 말아다오!"


게르트는 페나르핀의 간절한 외침에도 그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질 않으며, 무심하게 멀어져만 갔다.


"..흑...흐흑...제...제발..."


아무리 간절히 불러도 돌아보는것조차 하지 않는 아들을 바라보며, 페나르핀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윽....흑..흐흑..."


추운 바람이 그녀의 긴 귀에 스친다. 꿈 속임에도, 마치 현실인것마냥 귀가 아려온다.


주저앉은 하반신에서 죽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며 그녀의 차가운 몸을 더 차갑게,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윽...!"


페나르핀은 이대로 얼어붙어 죽어버릴것만 같은 추위를 느꼈다. 그 추위는 몸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닌, 그녀의 마음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추위 때문이었다.


게르트의 발소리조차 사라진 고요한 숲 속, 페나르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혼자 남아버린 수련장에서 홀로 몸을 감싸안았다.


"............."


그대로 살을 베어버릴듯 매서운 차가운 바람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굵은 눈이 그녀를 향해 불어왔다.


눈과 바람을 맞아가며, 그녀의 모습이 변해갔다.


살은 점점 시체처럼 창백해져갔으며, 오른팔은 푸른 불꽃에 휩싸이며 살점을 태웠다.


"......."


살점이 타들어가며 뼈를 드러내가고 있었지만, 페나르핀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게르트의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에, 깊은 창상(創傷)이 떠오른다.


"....게르트...."


그녀는 그 혹독한 눈보라를 맞아가며, 아들의 이름을 멍하니 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


눈 덮힌 숲 속에, 페나르핀은 홀로 남아 몸을 웅크렸다.


페나르핀의 오른팔은 살점을 전부 태우고 뼈만이 앙상하게 남았으며, 피부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음산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으며,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영혼이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조롱했다.


한쪽 눈에 상처가 남은 용병이 비열하게 웃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긍지높던 검사는 사라지고, 살인자만이 남았군. 정말 우스워."


"........"


페나르핀은 주위를 맴도는 검은 영혼들의 매도를 받아가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내 다리를 돌려줘...."


"감히 내 목을 자르다니, 용서할수 없어!"


"대체 뭘 위해 날 죽인거야! 뭘 위해서!"


그녀가 지나오며 베어왔던 모든 영혼들이 웅크린 그녀를 둘러싸고 매도를 계속했다.


"내겐 아내와 자식이 있었어. 나는 죽어선 안됐단 말이야!"


"내 딸을 만나게 해달란 말이야!"


가볍게 목을 베어냈던 근위병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페나르핀은 몸을 움츠렸다.


"........"


영혼들은 시끄럽게 주변을 맴돌며 페나르핀을 향해 욕설과 모욕을 내뱉으며 그녀를 괴롭혔다.


페나르핀은 점점 작아지며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인지, 지금껏 죽여온 사람들의 원한에 공포를 느낀 것인지, 그녀는 분간할수 없었다.


비난과 모욕을 받아내던 페나르핀이 고개를 들어 영혼들을 향해 외쳤다.


"닥쳐! 닥치란 말이다!"


애원하듯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자기혐오가 섞여있었다.


"네...네놈들이 먼저 내게 적의를 드러내지만 않았어도, 죽일 일은 없었단 말이다!"


페나르핀은 악에 받치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땅에 꽂힌 야츠후사를 들어 영혼들을 향해 휘둘렀다.


"나는! 네놈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페나르핀은 오로지 힘만으로 검을 휘두르며 영혼들을 내쫒았다.


하나 둘, 검을 휘두를때마다 영혼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나는..! 나는!...나는 잘못하지 않았단 말이다!"


자기 입으로 거짓을 말하며 소리치는 그녀는, 또다시 자기혐오에 빠졌다.


"나는....! 나는....!!"


모든 영혼을 내쫒은 페나르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렸다.


"흑...으흑....!"


그때, 그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을 뺏어가서 자기 새끼처럼 키우더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죽였구나. 이 더러운 살인자."


녹색과 청색이 섞인 눈동자의 여인이 페나르핀을 모욕했다.


"...윽!"


페나르핀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것처럼 휘청거리며 게르트와 같은 눈을 가진 여인을 향해 주저앉았다.


그러자, 여인의 옆에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나타나 페나르핀을 내려다보며 분노했다.


"내게서 앗아간 아이에게 발정하는 개만도 못한 년 같으니! 내 아이를 돌려내라!"


"....으...으아..."


오래 전, 게르트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 죽였던 게르트의 친부모가, 페나르핀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귀쟁이년. 너같은 추잡한게 내 아이를 훔쳐가다니."


"제대로 목숨조차 끊지 못한 쓰레기. 너는 살 가치가 없어."


"우리에게서 앗아간 아이와의 미래를 돌려내!"


"이 살인자!"


"아...아니야...나.....나는..."


"나는 살인자가...아니야....나는....."


페나르핀은 두사람을 향해 말을 더듬으며 덜덜 떨었다.


영혼들은 페나르핀을 향해 미친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아....아아아...."


페나르핀은 영혼들의 매도에 피눈물을 흘리며, 또다시 주저앉았다.


".....게르트...."













"...윽!..."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뜨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서늘한 겨울의 공기가 느껴졌다.


페나르핀은 상체를 일으키고 커튼을 조금 걷어내자, 성채도시의 거리가 보였다.


"........"


조합에 비밀스럽게 숨겨진 방,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마드리에의 방이었다.


"........."


페나르핀은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가다듬으며 식은땀이 맺힌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


페나르핀은 입을 앙다물며, 뼈만 남은 오른손을 만졌다. 살점따위는 남아있지 않음에도, 그녀의 오른손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촉각이 남아있었다.


이루지 못할 소망을 위해 되살아나, 많은 사람을 베어가며 나아갔던 지난날이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페나르핀은 떨리는 손을 잡았다.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까지 게르트를 가지려 했고,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의 친부모를 죽여 매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의 존경과 흠모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홀로 숲에 남아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목에 칼을 긋는것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야츠후사는 그녀를 되살려냈고, 그렇게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못다이룬 미련을 이루기 위해서, 페나르핀은 무작정 숲을 나서며 아들에게 속죄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지만, 되살아난 육신은 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의 손에 쓰러진 아트리아의 사람들, 레티에라의 병사들의 피가 아직도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대체...무슨 짓을..."


페나르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을 껴안으며 지금까지 저지른 행위에 몸서리쳤다.


대체 무엇을 위해 죽었으며, 무엇을 위해 죽여온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아트리아에서는 그저 신변의 보호를 위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적들을 최대한 얕게 베어가며 목숨까지는 거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야츠후사에 피가 맺혀갈수록, '더 베고싶다.'는 마음 속의 살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랬기에, 필요치 않은 살생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레티에라의 산적과 위병들의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는, 적의 숨통을 끊어버린것에 차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피에 취해갔다.


레티에라에 들어오고 '신속'의 소문을 듣고나서부터, 자신의 정신에 이변이 생겼던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분노와 질투만을 느낀 채로, 검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녀의 광기어린 집착이 시작됐다.


"...나는...대체 무슨 짓을...!"


페나르핀은 자신이 행한 모든 악행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침대 한켠에 몸을 웅크리고,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울었다.


"흑...흐흑..."


뼈만 남은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음을 그쳐보려 해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


마드리에는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조그만 울음소리에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야츠후사로부터 거리를 두자, 페나르핀은 점점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을 떠올릴때마다 매일같이 흐느끼며 울고 있는것을 마드리에와 니제리아는 알고있다.


"....아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양이군요."


마드리에의 뒤에서, 니제리아가 안쓰럽다는듯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바라봤다.


"......아트리아에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꽤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을테니 말이야."


마드리에는 페나르핀의 방문에서 물러나며 니제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흠. 나는 집무실로 돌아갈테니, 자네는 추스를 때까지 잠시 기다리도록 하게."


"네, 조합장님."


니제리아는 페나르핀의 옆 방의 문을 열고 식사가 든 수레를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니제리아는 클로슈가 덮혀진 페나르핀의 아침식사를 아쉬운 얼굴로 바라봤다.


"...오늘은 제때 식사를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마드리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니제리아를 보며 말했다.


"...내 억지때문에 자네가 고생이군. 정말 미안하네."


"뭐, 조합장님의 억지에 휘둘리는거야 일상이니, 저는 딱히 상관없습니다."


니제리아는 별일 아니라는듯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하하하...그렇군."


마드리에는 페나르핀의 방문을 잠시 보더니, 뒤를 돌아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지켜봐주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고생하게."


"네, 조합장님."


빛을 발하는 발광석의 은은한 빛을 이정표 삼으며, 마드리에는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가다 비밀문을 통과해 집무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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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도시" 레티에라


레티에라 왕국의 수도이자, 나라의 이름이기도 한 거대한 도시.


거대한 산맥을 등지듯이 만들어진 성벽에 도시가 들어찬 모양새라, 방어에 아주 강하다는 강점이 있다.


성벽에 둘러쌓인 모양새로 인해 『성채도시』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최근 레티에라 III세의 왕도개혁으로 인해 이종족들의 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도시들 중 하나이며, 이종족들이 내뿜는 마력으로 인해 점점 마계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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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수일땐 하루 여섯시간만 자도 충분했는데 왜 요즘은 여덟시간을 자도 모자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