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레즈 소꿉친구를 짝사랑하는 순애 몬붕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진 않아.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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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수마에 푹 잠긴 나는 자명종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아직 침대에 쓰러져 있는 건 변하지 않았고, 일단 당장 저 시끄러운 자명종을 멈추기 위해 눈을 떠서 필사적으로 자명종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이쯤에서 난 무언가 치명적인 위화감을 느낀 것입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깜빡깜빡. 그리고 왼눈을 감고 방을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뭔가 평소보다 더 멀리 보이는 것 같지만, 일단은 잘 보입니다. 그러고는 오른쪽 눈을 감고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잘보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왼쪽 눈은 어릴적에 전쟁터에서 잃었을터입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 나는 절대 떠올려서는 안되는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이 남성을 사랑하거나, 아니라면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변화하는 마물. 알프. 하지만 나는 남자를 사랑한 적도 없고 여자가… 되고 싶다고 그리 격렬히, 그리고 강력하게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에 들길 원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마물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물은 인간 남자와 성교할 생각 밖에 없는 마물이니까요.
다행히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1mm도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기만해도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마치 별이 담긴 밤하늘과 같은 눈동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나는 살 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기에, 나는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체에 너무나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지 조금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어째저째 감은 잡았습니다. 키는 꽤나 작아진 것 같습니다. 뿔은 훌륭한 것이 머리 위에 쌍으로 났습니다. 꼬리는 까맣고 보드랍습니다. 조금 매끈매끈한 것 같기도. 내가 아는 서큐버스들의 꼬리들은 항상 활발하게 움직이던데, 나의 꼬리는 저공 비행중입니다. 꼬리가 서큐버스의 심상 상태를 표현해준다는 이론에 따르면, 지금의 내 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침착 그 자체. 음욕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질색입니다.
그렇게 나는 마물이라는 것도 될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 앞에 무엇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채. 곧 거울을 목격한 제 꼬리는 저공비행을 하는 것도 모자라 방바닥에 추락했습니다.
언젠가 그녀에게 넌지시 던져본 말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상형은 어떤지에 대해 말이죠. 그 당시 저는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녀가 사랑했던 건 은빛의 기사라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닌가? 고결한 그녀라면 성별의 차이 따윈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은빛의 기사가 인간이었을 때에 가지고 있던 긍지높은 검에 반한 것을테고, 그렇기에 은빛의 기사가 마에 떨어졌을 때 그 본질의 변화를 감지하여 칼을 켜눌 수 있던 것이겠죠.
게다가 그녀는 은빛의 기사가 자신의 이상형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좋습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아마 그녀는 나를 남동생 쯤으로 여기고 있겠지만, 나의 대장간일로 단련된 훌륭한 육체라면 그녀에게 뭔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음흉한 마음을 잠깐 품었습니다.
“내가 꼭 안아줄 수 있는 작은 사이즈가 좋아. 기사니까 역시 공주님 안기가 로망이야.”
내가 그녀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건 둘째치고, 이것만으로는 그녀가 여성을 좋아하는지 남성을 좋아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묻기로 했습니다. 역시 그녀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좋아하냐고 말이죠.
“그렇지 않을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남성한테 끌린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녀의 이상형에 대해서는 자세히 물어봤습니다.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나에게 꼬옥 안길 수 있는 아담한 사이즈.
왠만하면 나를 밑에서 올려다 봤으면 좋겠다.
가슴은 너무 큰 건 싫다. 한손으로 다 잡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
마물도 싫지는 않지만 너무 인간에서 벗어난 건 NG.
은빛 기사를 좋아하던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냉철한 인상은 취향이 아니다. 잘 웃고 잘 우는 사람이 좋다.
머리색이나 눈 색깔은 어떻든 좋지만, 내가 금발에 청안이니까 조금 대비되는 느낌이 좋을 것 같아. 마치 뱀파이어 같은 흑발에 홍안도 멋지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귀여워야 해. 너한텐 어울리지 않는다고? 또 뭔소리냐 너는.
…
그녀의 이상형 목록을 들춰가면 들춰갈수록 내 거짓말이 낱낱이 폭로되는 기분이 듭니다. 왜냐하면 거울 앞에 자리한 여성은 제가 생각한 그녀의 이상형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나는, 나는 정말로 여자가 되고 싶었던걸까요? 이젠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그녀를 마주하면 좋을까요. 만약 내 앞에 마왕님이 나타나서 “그녀의 이상형이 되고 싶지 않으냐? 고민할 생각은 3초 주지. 3, 2, 1.” 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어, 으, 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답했을 것 같습니다.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나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습은 너무 과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그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대로 발가벗겨진 것 같습니다. 난 널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어. 라니, 이 얼마나 적나라한 고백인가요? 아니, 애당초 그녀가 이런 상황을 좋아할까요? 20년 지기 소꿉친구가 갑자기 여자로 바뀌었는데? 게다가 "꽤 오랫동안 숨겨왔지만, 나는 사실 지금까지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니… 사랑이 무거워도 너무 무겁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나는 분명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난 정말로 겁쟁이기에 고백 따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그녀가 거절할거라고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연약한 내 마음을 보호해왔습니다. 그녀에게 직접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내멋대로 그녀에게 거절당할거라고 단정 짓는게 훨씬 편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때가 와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좋아해준다면 좋겠지만, 만약 잘 되지 않는다면... 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머릿속에 좋은 방법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바뀐게 다행입니다. 이 모습이라면 그녀는 내가 정체를 고백하기 전까진 나인 줄 모를 것입니다. 그저 우연히 만난 이상형의 마물이라고만 여기겠죠. 그녀를 속이는데에 약간의 죄악감은 느끼지만 영원히 그녀를 속이고 싶진 않습니다. 잠깐, 그래, 잠깐입니다. 내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만…
"라크씨, 안녕하세요! 실연이라도 했나요? 스타일 완전 바꿨네요!"
창가에 있던 나를 보며 이웃집의 하피씨는 그렇게 외치며 날아갔습니다. 그렇죠. 마물이라면 알아보겠죠. 입싼 그녀의 동료들이 내 꼬라지를 보고 아무 말 안할리 없을 것입니다.
좋아! 망했네! 나는 그냥 출근이나 하기로 했습니다. 될대로 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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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