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전화하면 안돼?"


전화를 못 한다는 게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헛웃음을 짓는 나와 다르게 승연이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진다. 몇십분간 내 말만 듣다 끊을 거면 차라리 녹음해두고 다시 듣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승연이는 엄지 손톱까지 물어뜯어가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손을 감싸쥐어 탁자 위로 살포시 내려놓는다.


"시간 비면 어떻게든 나와서 전화할테니 좀 늦어도 이해해줘. 알았지?"


"최대한 빨리."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 왼손으로 내 손을 다시 덮어서는 꺼슬꺼슬한 배면에 재차 문댄다. 한결 부드러워지고 우유 향이 나게 된 손에 닿고 있을 때면 점차 아이가 되는 것 같아서, 이 닳아빠진 원룸 구석 스프링이 망가진 매트릭스 위에 자신의 성을 만들고 벽을 치는 것만 같아 측은지심이 솟는다.


"어제 사온 사과도 넣었어. 나도 사과 넣은 카레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주제를 일상으로 돌린다. 내로라한다는 마물 의사들도 두손 두발 다 든 승연이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에 저 아이를 세상에 잡아줄 수 있는 게 나뿐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괜히 센치한 생각을 하며 승연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곤 식사에 전념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반신반의 했는데, 사과 카레는 제법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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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진이 오늘은 일찍 왔네?"


당신 얼굴 마주치기 싫어서 일찍 나온건데. 대체 이 인간은 커피를 얼마나 마셔대면 아침마다 복도에 있는 거야? 화장실 가려고 나갈 때면 괜히 따라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들어가고, 잠깐 스트레칭 좀 하러 나갈 때도 슬며시 따라나와서는 담배나 뻑뻑 피다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귀찮은 생물이었다.


지옥견의 특성인지 애사심이 강해 여러모로 임원들의 예쁨을 받는 상사였는데, 부하 직원인 내 입장에선 이게 또 죽을 맛이다. 마물들 투성이인 회사에 유일한 젊은 남성인 나를 챙겨주려는 건 아닐까 착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CCTV보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또 간섭하려 드는 것이 의도야 어쨌건 사내 괴롭힘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참고로 술도 말술이라, 뭣모르는 신입 시절 비싼 안주 사줄테니 원없이 마시자는 말에 좋다고 따라갔다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 


수많은 단점 중에 굳이 사회적인 장점을 찾아보자면 탈권위적이라 하면 탈권위라 할 수 있는 저 느물함과 마물 특유의 미색이 있겠는데, 직장 생활동안 그런 장점들이 단점에 모두 덮여 내 머릿 속에선 동네 아저씨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아무튼 그런 사람.. 아니, 마물이다.


"우리 종진이는 커피 안하나?"


커피, 하고 혀를 굴리며 재차 강조하는 것이 저 얼굴을 대체 왜 저렇게 쓰나 싶다. 저래서야 다방녀보다 시원찮잖아. 내심 혀를 끌끌 찬 나는 고개를 젓고선 부장 옆을 지나가려 했는데, 돌연 어깨를 슥 틀어 내 앞을 가로막은 부장이 오른손을 붙잡고는 킁킁거렸다.


"복숭아 모양 핸드크림 맞지? 요즘 어린 여자애들이 많이 갖고 다니더라."


"... 냄새 맡지 마세요. 진짜 성희롱으로 신고할 겁니다."


"펴바른 건 아니고, 아침부터 누가 이리 쪼물딱거렸을까, 우리 종진이 손을."


너요. 너. 도톰하고 털 덮인 손으로 내 손을 희롱하던 부장은, 아예 노골적으로 육구를 꾹꾹 눌러대며 욕탕에 들어간 아저씨가 낼 법한 소리를 냈다. 


"방향제 때문에 안 그래도 짜증나죽겠는데, 이젠 별에 별 게 다.."


중얼중얼거리면서도 손을 만지작거리는 저 대형견을 고소하고 퇴직금을 곱절로 받는 상상을 하던 나는, 손등을 꾹 누르는 발톱의 예기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네가 담당이니까, 전화한답시고 빠져나가면 안된다? 알았지?"


특유의 맹함과 장난기는 온데간데 없이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눈동자에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