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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들의 일은 고되고, 배달부들을 노리는 마물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그 중 가장 위험한 마물은 따로 있다.

어느 곳이든 있을 수 있고, 어디든 들어올 수 있으며 한번 잡히면 거의 도주가 불가능한 마물. 바로 슬라임과 그 아종들이다.

폐허가 된 상가, 썰렁한 아파트 단지, 맨홀과 하수구 구멍 등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며 칼도, 총도 통하지 않는 몸으로 배달부들을 위협하는 슬라임들은 언제나 문젯거리였다.

하지만 그 어떤 슬라임을 데려온다고 해도 내 눈 앞의 저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소용없습니다, 주인님. 부디 불필요한 저항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 몸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촉수가 살을 찢기 직전, 온 몸을 던져 그것들을 피한 나는 전력으로 엄폐물이 많아 보이는 건물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로 소름끼치는 바람소리를 내며 점액질의 채찍이 뒤따랐고 재빨리 손 안에 든 칼을 휘둘러 점액을 막아내며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자 쇼그의 긴 한숨 소리가 내가 숨은 드럼통 너머로 들려왔다.


"주인님.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이만 나와주세요. 주인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건 저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내가 고집이 좀 세거든. 상처 하나 없이 나를 붙잡는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쇼그는 자신을 쇼거스라고 소개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도보도 못한 종류의 마물이지만, 그녀의 몸을 이루는 점액질의 액체와 자유로운 변형을 보면 슬라임의 아종이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빙빙 돌리던 순간 갑작스레 공기를 가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앞을 향해 몸을 던졌고, 내가 구르자마자 망치같은 형상으로 변한 쇼그의 촉수가 내가 숨어있던 드럼통을 손쉽게 뭉개 버렸다.

잘못 걸리면 저 드럼통같은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고 끊임없이 다음 엄폐물을 찾으며 쇼그의 상태를 확인하자 쇼그는 이 추격전에 질려 버렸는지 몸에서 더 많은 양의 촉수를 꺼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창 형상을 한 촉수들이 날아들자 미처 피하지 못한 몸에는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를 악물며 부숴진 상점 안으로 들어간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반격을 준비했다.


"술래잡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주인님.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글쎄, 나는 아직도 조금 더 놀고 싶은데?"


품 속에서 수류탄을 꺼낸 나는 심호흡을 하며 핀을 뽑았다.

원래는 마물들에게 잡혔을 때 시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가지고 있던 물건이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사용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슬라임들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불이다. 형태를 이루는 수분이 일정 이상 증발해버리면 평소 체내에 숨기고 있던 핵이 드러나고, 그 핵을 박살내면 슬라임은 완전히 죽는다.

이 방법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며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호흡을 마친 나는 상가 안에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내가 벽으로 삼고 있는 쓰러진 진열대 너머로 수류탄을 던졌고,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최대한 안전한 구석으로 몸을 던지며 귀를 막았다.

귀가 찢어지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지나가자 슬쩍 눈을 뜬 나는 거의 박살이 난 진열대를 붙잡고 일어나며 주위를 살폈다.


"잠깐.. 어디 있지? 박살났다면 파편이라도 남아야 하는... 커흑,"

"상당히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계셨군요, 주인님. 그럼 이제 보여주실 건 더 없으십니까?"

"콜록, 크흑.. 보여줄 거...? 아주.. 많지..."


갑작스러운 기습에 팔다리는 모두 구속되었고 쇼그의 촉수가 목을 조르자 점점 눈 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헛된 버둥거림은 더 빨리 의식을 잃을 뿐이였다. 대신 나는 눈이 완전히 감기기 직전 머리 위의 전등을 향해 총을 겨눴다.

억지로 짜낸 힘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자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산산히 부숴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며 나와 쇼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고, 깜짝 놀란 듯한 쇼그는 나를 묶은 촉수 몇 개를 우산처럼 넓게 펼쳐 파편을 막아냈다.

구속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손에 든 칼로 나머지 촉수를 끊어낸 나는 비틀거리며 편의점 밖으로 달려나갔다.


"콜록, 콜록.. 수류탄도 소용없다고...? 대체 어떻게 해야.."


막혔던 숨을 몰아쉬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숨었던 편의점의 옆에 있는 주유소였다.

어쩌면, 방금 내가 세운 계획이 실패했던 것은 화력이 모자랐기 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자 나는 홀린 듯 주유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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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정도 무언가가 철퍽거리는 소리가 막아놓은 문 너머로 들려왔고 끈적한 점액성의 소리가 멈추자 귀를 울리는 쾅 소리와 함께 입구를 막아 놓은 잡동사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의 쇼그는 가볍게 문을 박살낸 채 주유소 건물 안으로 들어오며 날카로운 눈매로 사방을 살폈다.

그녀는 더 이상 지루한 숨바꼭질 따위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못난 주인에게 줄 체벌과, 기나긴 벌 끝에 속삭일 용서와 사랑의 말 뿐이였다.

눈을 감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쇼그는 다시 눈을 뜨며 주인의 냄새를 찾았다.

마치 길처럼 선명하고 분명하게 남은 그의 체취를 따라가자 딱 성인 남성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캐비넷 안에서 냄새가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한 쇼그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짜내 나지막히 캐비넷을 향해 말을 걸었다.


"주인님, 이게 마지막입니다. 지금 나오신다면 아프지 않게 해 드릴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어서 나와주세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쇼그는 혹시 모를 발악을 대비해 수십 개의 촉수를 꺼내놓은 채 기습적으로 캐비넷의 문을 열어 젖혔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캐비넷이 열리며 쇼그의 촉수들이 그 안으로 쇄도했지만 캐비넷 안에 들어있던 것은 배달부가 아닌 수 개의 가스통이였다.

가스통 위에 덮여진 코트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서야 쇼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고, 발자국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녀와 멀찍히 떨어진 입구에는 배달부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총 끝에서부터 불꽃이 피어오른 순간, 주유소 안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과 모든 것을 녹여버릴 기세로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 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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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머리야... 설마 천국인가...?"


욱신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키자 몸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질러왔고, 모아놓은 가스통을 터트리기 직전 눈을 감기는 했지만 아직도 눈 앞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지옥에 왔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귀를 막아놓은 붕대 조각을 빼자 불길에 휩싸인 주유소의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생각하면 예상보다 훨씬 큰 폭발 때문에 건물 밖으로 튕겨져 나온 것 같았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폭발이였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여기에 멀쩡히는 아니지만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째서 계획한 것보다 훨씬 큰, 주유소를 날려버릴 정도의 폭발에도 살아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주변에 떨어진 권총과 배낭을 줍고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깔린 보라색 점액이 보였고, 그 점액 웅덩이의 중앙에는 작은 보석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왜... 나를 구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체를 잃고 바닥에 쏟아진 물 같은 꼴이 되어버린 쇼그는 느릿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눈이 감기기 직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게로 쇄도하는 폭발과 뜨거운 열풍을 온 몸으로 막아내며 나를 감싸는 쇼그의 모습을. 그토록 그녀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녀는 나를 감쌌다.


"주인을 잃은 메이드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보다 못한 존재. 저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남겨진 이유를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그 주인이라는 게 너를 죽이려 한다고 해도?"

"주인님께서 제게 죽으라고 하신다면 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 모래로 만든 성처럼 덧없이 바스라질 존재니까... 조금이라도 더 주인님과 함께하고 싶어서 응석을 부렸을 뿐입니다."


착잡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총을 들어올린 나는 침착하게 쇼그의 핵으로 보이는 보석을 조준했다.

지금 당장 손가락만 까딱해도 쇼그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며 다음 배달을 기다리겠지.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쇼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시시각각 녹아내리는 꼴이긴 하지만 몸을 인간의 형태로 만들더니 내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제 작별인가요, 주인님?"

".... 그래, 이걸로 끝날 거야."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들어 보고 결정할게."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애처로운 부탁을 남기며 나를 향해 웃어보인 쇼그는 그대로 무너져내렸고 바닥에 남은 웅덩이를 내려다보던 나는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후환을 남기는 것은 위험하니 여기서 죽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데...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길고도 긴 한숨을 내쉰 나는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고, 반쯤 남은 수통의 물을 쇼그의 위로 뿌렸다.


"주인님...?"

"그래도 네가 날 몇 번이나 도와줬는데, 역시 죽이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니까 착각하지는 말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마. 솔직히 말하자면 주인이라면서 달라붙는 녀석은 하나면 족하다고."


슬라임들은 수분만 있다면 잃어버린 부분을 재생할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수분의 양에 따라서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물이면 당장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준 대로 갚는다. 받은 대로 돌려준 것 뿐이다. 절대 사심이나 그런건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인 내가 부디 쇼그가 내 뒤를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며 뒤를 돌아 걸어가려던 순간, 쇼그의 웃음소리가 내 등 뒤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섬뜩한 기운이 내 등골을 훑고 지나가자 소름이 끼친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몸의 재생을 마친 쇼그가 나를 향해 덮쳐오는 것에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온 몸이 그녀의 몸에 둘러싸여 버렸다.

쇼그를 살려준 과거의 나를 저주하며 총을 잡은 손을 놓아버리자 내 얼굴마저 완전히 쇼그의 몸 속에 갇혀 버렸고 빨리 편해지길 바라며 눈을 감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쇼그는 일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려면 빨리 끝내, 괜히 뜸 들이지 말고."

"네, 끝났습니다. 바닥에 부딪쳐서 생긴 가벼운 경상일 뿐이였군요.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영문 모를 말에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쇼그는 이미 내 몸에서 멀찍히 떨어진 채 웃고 있을 뿐이였다.

쇼그가 떨어지자 확실히 느껴졌다. 아스팔트에 박아서 얼얼했던 머리의 통증과 폭발의 여파로 날아온 파편들이 몸을 스치면서 생긴 작은 상처들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를 쇼그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쇼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저 주인님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한 것 뿐입니다."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가방을 고쳐멘 나는 계속 노골적인 의심을 담은 시선으로 쇼그를 응시했고 이내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며 배낭 안의 나침반을 꺼내는 동시에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내 등 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이 간 나침반 바늘에 의존하며 집을 향해 걸어간 나는 쇼그를 유인할 때 벗었던 코트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귀금속이 문득 생각났고, 그것들을 꺼내 놨어야 했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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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해가...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야겠네, 식사 준비부터 하고."


주위에서 간단한 불쏘시개들을 긁어모은 나는 가방에서 파이어스틸을 꺼내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칼을 금속 막대에 가져다 대고 비껴 긁듯이 내리치자 금세 불꽃이 튀었고, 불씨가 옮겨붙은 것을 확인한 나는 불이 죽지 않도록 조심스레 장작에 옮겨 붙이며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냈다.

나뭇가지로 통조림을 불 위에 걸쳐놓으며 불을 쬐자 피곤한 몸을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이쪽으로 와."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으셨나요?"

"주유소에서부터? 내가 감이 조금 좋아."


어둠 속으로 말을 걸자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있던 쇼그는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며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를 위해 자리를 조금 비켜주자 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곁에 앉았다.

방금 내 말대로 쇼그가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쇼그가 나를 쫓아옴으로써 얻는 이득이 너무 많았기에 굳이 말리거나 쫓아내진 않았지만.

쇼그는 말하자면 마물들 사이에서 최상위 포식자 같은 느낌을 풍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몇 번이나 마물들을 마주쳤고, 나를 습격하려는 녀석들도 만났지만 대부분 쇼그를 보더니 혀를 차며 되돌아갈 뿐이였다.

아마 마물들의 눈에 나는 쇼그가 점찍어 놓은 사냥감, 정도로 생각됐겠지. 그 덕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기도 했으니 내 옆에 앉는 것 정도는 허용해줘도 좋을 것이다.

통조림이 보글거리며 살짝 끓자 조심스레 나무를 내린 나는 포크로 참치 통조림을 쿡 찍어내렸다.


"음.. 다 됐나 보네. 너도 먹을래?"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열량을 섭취했으니, 당분간은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 그거 설마 사람은 아니지...?"

"... 꼭 말해야 합니까?"


통조림을 먹기 직전 쇼그의 몸에서 작은 뼛조각 하나가 뱉어진 것을 본 나는 호기심에 질문했지만, 쇼그는 대답을 피하더니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자 나는 슬쩍 쇼그에게서 거리를 두었고 그 모습을 본 쇼그는 쿡쿡거리며 웃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인간들은 이런 의미없고 오직 유희만을 위한 문장을 '농담' 이라고 칭하더군요. 저도 한번쯤은 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하.. 재미있네..."

"후후, 재미있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억지로 웃음소리를 내며 반응했지만 어째서인지 쇼그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나와 쇼그 사이에는 내가 통조림 바닥을 긁어먹는 소리와 모닥불 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고 국물까지 깨끗히 통조림을 긁어먹은 내가 바닥에 빈 캔을 내려놓자 쇼그는 갑작스레 침묵을 깨며 내게 말을 걸었다.


"어째서 이번에는 저에게서 도망가지 않으신 건가요, 주인님?"

"무슨 소리야?"

"저는 주인님께 과한 응석을 부렸고, 그 과정에서 감히 주인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주인님을 쫓는 내내 겁이 났습니다. 주인님께서 저를 보시면 당장 사라지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까, 이번에야말로 저를 완전히 죽이려고 하시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어이없는 질문이였다. 무슨 이런 질문을 이렇게 진지하게 물어보나 하는 생각으로 쇼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고, 여차하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빈 통조림 캔을 포크로 뒤적거리던 나는 잠시 흠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번에도 또 그렇게 할 거야? 또 나를 뭐.. 잡아가려고 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절대로 아닙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그거면 된 거야. 뭐가 더 필요한데? 나야 뭐, 당장 나를 죽이려고 한다던가 납치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니면 딱히 네가 따라오는 걸 막을 이유는 없고. 네가 가고 싶다면 말리지도 않겠지만 당장 사라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


빈 통조림을 던져버린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귀금속이 가득 찬 가방을 짜증 가득한 손길로 뒤적거리며 어디엔가 있을 초콜릿을 찾았다.

내가 초콜릿을 오물거리는 동안 쇼그는 알 수 없는 끈적하고 그윽한, 부담되는 눈길로 나를 응시했고 내 심기가 불편해질 때 쯤 갑자기 내 왼손을 잡아당기더니 작은 반지 하나를 내 손에 끼웠다.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은 반지가 내 손에 끼워진 것을 보자 기분이 미묘해졌고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쇼그를 바라보았지만 쇼그는 황홀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만 있을 뿐이였다.


"이 반지는 뭐야? 예쁘긴 하네."

"제가 영원히 주인님께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는 증표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종복이자 반려로써..."

"뒤에 쓸데없는 건 빼지? 반려는 또 뭐고? 이 반지, 그냥 빼서 버려도 되나?"

"만약 반려가 싫으시다면 그냥 메이드라고 생각해주세요..."


살짝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인 쇼그를 보자 차마 반지를 빼 버릴 수는 없었다.

울먹이려는 쇼그를 보자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를 쫓아올 때는 이 녀석만큼 무섭고 공포스러운 게 없었는데, 바로 옆에서 보니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은 나는 가방을 베고 누우며 하늘에 뜬 별을 지켜보다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