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 주운 곳: https://twitter.com/cnmbwjx/status/1123612000737566720


쓴 글들: https://arca.live/b/monmusu/9779273


잔잔한 노래도 들으면서 보라구




"얼굴 좀 펴. 왜 그리 죽상이야?"

"...됐어."

"어휴..."


부정형 몸으로 여러 개의 손을 만들어 내 쉐이커를 흔들던 슬라임 바텐더는 바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항상 어디서 먼저 술을 좀 마시고 헤실헤실한 얼굴로 와서는 늘 마시던 걸 주문해 들이키던 몬붕이 오늘은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자 바텐더는 '얘가 왜 이래?' 라고 의문을 품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말해 봐. 괜시리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한 번에 5개의 쉐이커를 흔들 던 슬라임 바텐더ㅡ벨은 몬붕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짧은 몇 마디 뿐이었다.


"그냥... 힘들어.. 전부..."

"..."


장난으로 말하는 게 아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게가 실려있음을 느낀 벨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쉐이커를 흔들 뿐이었다.


"...늘 마시던 거?"

"오늘은 조금 더 세게."

"오케이."


흔들던 쉐이커들의 내용물을 잔에 따라 손님들에게 나눠준 벨은 몬붕이가 주문한 술을 섞기 시작했다.


"얼음은?"

"많이."


따르라라락ㅡ 벨이 디스펜서를 가동하자 쉐이커로 얼음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것저것 양주를 섞은 뒤 덮은 쉐이커를 흔들기 시작하는 벨. 쉐이커 안에서 술과 얼음이 뒤섞이며 나는 즐거운 소리가 바 안에 울려퍼졌다.


눈을 감고도 능수능란하게 눈을 감고 여유러운 표정을 지으며 쉐이커를 흔드는 그녀는 감았던 눈을 슬쩍 떠 몬붕이를 흘겨보았다.


반쯤 감겨 있는 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데도 우물거리는 입, 땅이 꺼져라 내쉬어지는 한숨.


아마 그의 곁에 있으면 없던 옴도 재수에 들러 붙을 것만 같았다.


그런 모습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벨은 고개를 돌려 보스한테 옥상 가서 좀 쉬고 온다고 말하곤 몬붕이를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뭐 하는 거냐고 묻는 몬붕이의 질문에 벨은 잠깐 쉬는 거라고 답했다.


옥상에 도착하자 조금은 따듯해졌다지만 그래도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바람이 일행을 맞이했다.


직원들의 휴게실로 꾸며놓은 옥상은 작은 탁자와 소파 정도만 있는 정도였지만 어둑어둑한 바와는 분위기가 확연 달랐다.


철컥, 하고 옥상문을 잠그고 벨은 가져온 쉐이커를 살살 흔들며 소파쪽으로 움직였고 몬붕이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다 그녀에게 손목을 붙들려 끌려왔다.


"여기 직원들 휴게실 아냐?"

"괜찮아. 내가 끌고 온 건데 뭐. 편한 대로 앉아."

"그래."


몬붕이도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무거운 마음은 한 곳으로 제쳐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놓았다.


소파에 완전히 등을 대고 뻗은 몬붕이. 등받이에 머리를 얹어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주위로 들어선 고층 빌딩이 하늘을 대부분 가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바가 있는 건물 위로 증축된 것은 없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을 계속 올려다 보고 있자 자신의 처지 때문에 눈물이 흐를 것 같던 몬붕이는 소파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푸흡ㅡ"

"응? 뭐."

"아, 아니... 그게 무슨 꼴인가 싶어서."

"아 이거?"



늘씬한 바텐더 복장을 하고 요염한 몸매로 술을 섞던 벨은 머리만 덩그러니 남아 점액으로 만든 촉수로 쉐이커를 흔들고 있었다.


"그야 여태껏 보여주던 모습은 의태한 거라고. 부정형인 신체를 사람 몸처럼 유지하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아니 그래도.... ㅋㅋㅋ 뭔가 이미지가 너무 다르네."

"길가던 슬라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다들 힘들다 하지 븅신아."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덤덤히 술을 섞는 벨. 지금 의태를 푼 모습과 말하는 게 은근 매치가 안 맞아 몬붕이는 계속 웃음이 나왔다.


약간 툴툴대는 식으로 몬붕이에게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무겁던 몬붕이의 표정이 웃음으로 만개하자 그녀도 살짝 기뻐 미소를 지었다.


"하... 정말 고마워. 나를 생각해주는 건 너 밖에 없는 거 같다."

"어이구, 아까까지는 곧 나가뒤질 놈처럼 굴더만."

"정말 고마워서 그래. 진짜. 정말로.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나보다 야."

"어, 어?"


순간 벨은 당황해 쉐이커를 떨어뜨릴 뻔 했으나 촉수 점액을 더 뻗어 캐치했다.


"앗."


5초 뒤 몬붕이도 자기가 내뱉은 말을 자각하고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어...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으, 응..."


막 화사해지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듯 식기 시작했다. 몬붕이는 턱을 괴고 왜 두 번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뱉었을까. 하고 자신을 탓했고.


달칵달칵달칵ㅡ


벨은 어색한 분위기를 묻어보려 쉐이커를 열심히 흔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오고가는 말 없이 쉐이커 소리만 나는 옥상 휴게실. 술이 다 섞여갈때 쯤 벨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한 얼굴을 하더니 다시 바텐더 형태로 의태했다.


대충 소파에 뿌려놓은 복장에 슬라임 점액이 꾸물꾸물 들어가더니 스르륵 솟아나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자, 완성했어."

"고마워."

"근데..."


술이 완성 됐다는 얘기를 듣고 몬붕이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벨은 더 할말이 남은 것 같았다.


"컵을.. 안 가져왔어."

"아..하. 그럼 얼른 내려가자."

"아, 그거... 굳이 안 내려가도 돼."


소파에서 일어나 옥상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몬붕이는 고개를 돌려 벨을 바라봤다.


푸른색 점성형 슬라임임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조금씩 꼼지락하며 고민을 하는듯 하다 이내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피크타임도 끝났고 보스가 맡아둘 테니까... 여기서 시간 더 보내도 돼."

"그으...래?"

"그리고... 후우ㅡ 너한테만 해줄 테니까 서비스 해줄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벨의 말을 거절했다가는 나만 개새끼가 되겠지 라고 생각한 몬붕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러더니 글쎄, 벨이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걸어와서는 소파에 앉아 있는 몬붕이에게 겹쳐 앉는 것이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녀 때문에 놀란 몬붕이는 입을 열었으나 벨의 촉촉한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쉬잇ㅡ 하며 막았다.


"쉿.. 너한테만, 해주는... 거라고.."

"...."


역시 그녀도 부끄러움을 타는지 의태한 슬라임 점액이 조금 부들부들 떨리는 듯 보였다.


벨은 심호흡을 한 뒤, 쉐이커의 캡을 열어 내용물을 자신의 입 안에 쪼르륵 부어 넣었다.



그 다음에 몬붕이가 목격한 것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벨의 입으로 흘러들어간 술은 슬라임 특유의 반투명한 신체 때문에 물에 물감을 타놓은듯한 모양새로 그녀의 몸에 퍼져 나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부러 상의를 제끼고 수영복 같은 걸 입어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하고 있던 그녀의 가슴에 뭉글뭉글 모인 술을 섞기 시작한 것이었다.


탱글탱글한 그녀의 두 과실로 직접 흔들며 술을 섞는 벨을 보고 있자니 몬붕이는 아까 하던 걱정은 온데간데 없고 눈 앞의 상황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몬붕이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까 말했듯, 벨은 이미 술을 섞는 과정은 끝났다고 했다.


정말로 서비스 차원에서 이러한 행위예술을 보여주던 그녀는 술을 입쪽으로 모으며 몬붕이를 내려다 보았다.


"몬붕아..."

"으, 응... 벨..."

"아까, 좋아한다는 말. 진심이야?"


벨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몬붕이는 말문이 턱 막혔었지만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대답했다.


"물론. 정말 좋아해. 네 덕분에 사는 거 같아."


몬붕이가 속삭인 말은 벨의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몬붕이에게 조용히 다가가 키스했다.


첫 키스의 달콤함과 섞인 술의 맛이 뒤엉켜 여지껏 맛보지 못한 새로운 조합을 찾아낸 듯한, 크고 작은 기쁨이 함께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