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흔드는 진동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말라붙은 피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한창을 비벼 피 딱지를 떼내고서야 겨우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의 장막이 드리웠지만 시야는 마치 대낮 같이 밝았다. 더 이상 불태울 곳 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대지의 불길은 세차게 피어올라 밤하늘을 노을빛 처럼 붉게 물들였다. 숲과 산의 나무는 목탄이 된지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었고 그 아래의 땅은 불에 타죽은 짐승들의 시체와 시커먼 검댕들, 그 위를 눈처럼 덮은 잿더미 말고는 없었다.


 이따금씩 멀리서 부터 전해져오는 진동에 잿더미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진동과 함께 커다란 소음이 열풍에 섞여 불타버린 숲 속에 전해진다. 등을 기대고 있는 전소된 트럭으로부터 그 진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허리춤에 찬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지만 물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냈다. 생각보다 훨씬 몸 상태가 안 좋았다.


 내가 숨을 고르는 사이 진동과 소음은 점점 더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소음 속에 섞인 기어의 맞물림 소리와 압축된 공기가 분출되는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한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몇번의 시도 끝에 겨우 일어섰을 때 나는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강철피부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지축을 뒤흔드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포효하는 듯이 굉음을 내는 터보샤프트로 주변의 산소를 흡입하는 거대한 거인의 모습은 존재만으로도 중압감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외장이 검게 칠해져있는, 인간처럼 팔과 다리를 가진 강철거인을 올려다보던 나는 뒤에서도 비슷한 굉음이 들려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앞의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한 강철 거인과는 달리 4개의 다리에 두팔을 가진 반인 반수의 모습을 한, 그러나 크기는 비슷한 또 다른 거대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한 두 괴물은 서로를 향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지진이 난 것 처럼 흔들리는 지면에 무엇이든 붙잡지 않고서는 서있을 수 가 없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두 괴물들에게서 포연과 로켓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그런 무기들로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했고 이윽고 팔이 닿는 위치까지 도달한 두 괴물들의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크기의 육박전, 그 것들이 공방을 이어갈 때 마다 주변 지형지물이 시시각각 변화되어갔다.


 나는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그 것들이 만들어내는 경외의 현장을 보며 산을 깎고 바다를 메꾸던 옛 신화시대의 일컫던 괴물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타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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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과 검, 그리고 마법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세계는 벌겋게 타오르는 흑색 석탄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증기를 뿜어내는 보일러의 시대를 지나 지면에서 솟아 오르는 석유와 폭발하며 왕복하는 디젤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향유하던 마법을 기술과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재창조해낸 인간은 수 많은 피를 흘려 새롭게 자신들을 위한 질서와 문명을 이루어냈다. 현시대의 인류는 몬무스에 맞먹을 정도로 융성해졌고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인류의 정신 속에 꿈틀대는 탐욕은 발전의 근간인 화석연료 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재만 남을 때 까지 불타오를 것이다.


"운명의 시간이 우리 공화국의 하늘을 때렸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때가 왔다. 우리의 선전포고문은 마물들의 대사에게 전달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인류의 역사는 두려움, 착취, 수치, 착정, 생존의 역사였다. 보아라! 자랑스런 우리 공화국의 국민들이여, 보아라! 영광스런 모든 인류여, 모멸의 과거로 부터 피어난 황금의 시대를 보아라!

 오늘 우리가 전쟁의 위험과 희생에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그 이유는 명예와 미래를 위해서이다. 우리와 우리와 아들, 딸, 후대로 이어지는 미래를 위해 전 인류는 연합해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공화국의 시민 들이여 무기를 들어…"


 커다란 산불이 작은 담뱃불 하나에서 시작하는 것 처럼 전 대륙을 휩쓸 전쟁의 불길도 작은 불화에서 시작됐다. 국경에 맞닿은 철광의 채굴권을 둔 작은 언쟁이 싸움으로 번졌고 각국의 공권력을 이용한 문제해결 중에 서로를 향한 불만에 더 큰 싸움이 일어났다. 내리막길에 굴린 눈덩이처럼 싸움은 점점 커져갔고 증오와 혐오로 비대화되어 통제불능이 되었다.


"국민 여러분들은 인간들과의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짐의 노력이 실패한 것이 얼마나 쓰디쓴 충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마물과 인족 사이에 평화적이고 명예로운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보였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짐은 왕국의 지도자로서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이 뛰어들 것이다. 짐은 오직 왕국과 마물들을 위한 일념으로 이 자리에 서있음을 진실되게 맹세한다. 그러니 짐이 마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것 처럼, 국민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각오를 다지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 마물이 없었다면 이 대륙의 모든 곳에는 엄청난 야만성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일찍이 우리가 그들의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줬던 것 처럼, 갈 길을 잃은 그들의 의식을 강제적으로라도 계몽시켜야한다.

 이를 위해 전 마물 왕국은 동맹을 맺어 정의를 수호할 것이다. 마물 전체를 위해 개개인의 삶은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 마물들이 맥동하고 살아있다는 것만이…"

 

 라디오를 통해 울려퍼진 두개의 연설은 마물 왕국 동맹과 인족 공화국 연합간의 피로 피를 씻는 끝없는 폭력과 죽음의 신호탄이었다.


 전쟁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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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원령이 발령되고 모병관이 마을 광장에서 참전을 독려하는 가두연설을 하고 있다. 그 옆에서 마을 이장과 공무원들이 같이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배급소로 향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모든 식량과 물자는 배급제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졌다.


"배급 받으러 왔어요. 시계가게요." 나는 가구별로 나눠지는 배급표를 내밀었다.


배급소의 공무원이 표와 내 얼굴을 보더니 빵과 고기를 꺼냈다. 빵은 오래되어 딱딱했고 고기는 대부분이 하얀 비계로 되어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공무원의 멱살을 잡았다.


"씨발, 한두번도 아니고 너무하잖아요. 다른 집들은 다 정상적인 식량 배급하고 우리집 같이 혼혈인 집들은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주고, 우리도 세금 낼거 다 내는 마을 사람인데!"


 아버지는 시계공이었다. 젊은 시절 다양한 시계를 구경하기 위해 여러나라를 여행하던 아버지는 여행 중에 만난 고블린과 결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물과 결혼한 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차별을 할 정도로 마물에 대한 혐오 심하지는 않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기고 아버지는 전쟁에 징집되어 돌아가셨고 나는 아버지의 시계방을 물려받았다. 전쟁은 심화되어 사람들의 마물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전사자가 나온 집임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돌을 맞을까봐 어머니와 고블린의 피가 짙은 여동생은 집에서 나오기가 힘들어졌고 남자는 마물의 모습을 이어 받지 않기 때문에 인족의 모습을 한 나도 혼혈이라는 딱지가 붙어 멸시를 당했다.


 내가 공무원과 실랑이 하고 있자 경비를 서던 군인들이 다가와서 문답무용으로 진압봉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가 번쩍하더니 손발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졌다. 그들은 군홧발로 나를 무참히 짓밟았다.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을 몇번이고 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폭력을 피해 배급 받은 쓰레기 같은 식재료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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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괜찮아?"


 내 나름대로 몸에 묻은 흙먼지와 상처들을 닦아냈다고 생각했지만 들킨 모양이었다. 여동생은 내 몰골을 보더니 내 손을 잡아끌어 부엌에 계신 어머니에게 데려갔다. 키가 작아 발판 위에 올라가 개수대에서 순무를 손질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여동생의 호들갑을 듣고는 나를 보시더니 깜짝 놀라 찬장에 있던 구급함을 들고 나에게 달려왔다.


"별거 아니에요. 오다가 돌부리에 걸린거에요." 나는 식재료를 식탁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는 내 거짓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 자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거겠지. 어머니는 내 옆에 앉아 구급함에서 연고를 꺼냈다.


"미안하구나… 엄마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어머니는 내가 다친 곳에 연고를 펴발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는 씩씩하게 지냈었지만 지금은 의기소침한 상태가 되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여동생도 사실상 가택연금인 상태나 다름없는데 나는 이렇게 어디서 맞고다니는 걸 보다보니 더욱 더 자기탓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저, 자원입대하려고 해요."


 말을 끝내자마자 어머니는 내 뺨을 후려갈겼다. 화가난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속에서 울먹이는 눈을 보니 마음이 아파 시선을 돌렸다. 여동생도 내 옆에 달라붙어 미쳤냐고 밖에서 맞고 오더니 정신이 나갔다며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모병관이 입대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있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모병관이 아버지가 전사했으니 전방으로 안가고 전선이 아닌 후방 공장에 정비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랑 여동생도 잘 보살펴주겠다고…"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는 걸 보고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나 방에 들어간 문을 잠궜다.


"야이 미친놈아, 진짜로 입대하는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 좀 해봐! 엄마랑, 나랑 이렇게 살아도 상관없어, 전쟁에 끌려간 아빠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보고도 가겠다는 말이 나와! 오빤 절대 못가, 절대 못 보내!"


 여동생은 걸어잠군 문을 미친듯이 두드리며 소리질렀다. 발로 두꺼운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문을 두드리더니 점점 두드리는 소리가 줄어들어 문 바깥에서는 여동생이 우는 소리를 참고 훌쩍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좀 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두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떠나기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깼다. 머뭇거리다가는 마음이 약해져 결심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필요한 물품 몇가지와 아버지가 살아계실적에 다 같이 찍은 가족사진을 챙겼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조심히 열어 집안을 살펴보니 조용한 것이 아직 가족들은 일어나지 않은 듯 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현관에 도착해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나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로 떠나려는 거구나…"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여동생은 밤새 울고 자고를 반복했는지 심한 얼굴이었다. 지금도 비몽사몽간에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어제 저녁도 안먹었잖니, 가면서 이거라도 챙겨 먹으렴." 어머니는 넓은 보자기에 빵과 치즈, 약간의 말린 고기를 주섬주섬 담아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목에 걸린 로켓을 빼 나에게 건넸다.


"네 아버지가 청혼할 때 엄마에게 줬던거란다. 위험에서 지켜주는 부적 같은 거니까 꼭 몸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차고 다니고."


 로켓은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퍽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겉에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로켓의 뚜껑 안에는 조그만 어린시절의 가족사진이 들어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로켓을 건네받아 목에 걸었다. 여동생은 여전히 훌쩍이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코 좀 그만 먹어, 배불러서 아침도 못먹겠다." 나는 장난스럽게 여동생에게 꿀밤을 먹였다.


"하지마아…" 여동생은 주먹으로 나를 툭툭 쳤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모병소에서는 모병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족은 잘 챙겨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별 시덥잖은 자신의 군대 영웅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어머니가 준 빵과 음식을 먹었다. 시간이 되자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려퍼졌다. 새파란 청년들이 가득찬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최전방 타이탄 부대에 정비병으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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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탄, 거인의 이름을 딴 전쟁기계는 전쟁의 핵심이었다. 그 육중하고 거대한 기체에서 뿜어져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몸 속 가득 채워진 수 많은 무기들은 기존의 전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연방과 동맹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 상대방의 죽음을 위해 더욱 더 강하고, 무자비한 전쟁기계를 만들어 나갔다.


“불사의 타이탄, 오시리스 부대에 온 걸 환영한다, 고블린.” 정비반장이 그리스가 잔뜩 묻은 억센 손으로 내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최전방의 배치된 나는 금새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고블린' 그것이 내 새로운 이름이었다. 정비반장이 내 기록부를 보더니 즉석에서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 이외에도 다들 그런 식으로 이름이 붙여진 모양인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최전방의 전선에서는 혼혈이 대한 차별을 보기가 힘들었다. 물론 가끔씩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면 질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혼혈이든, 인간이든 죽음은 죽음이었으니까.

 

 전입 첫날 기박 기술상급병(다들 보다보면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거라는 말만 했다.)이라는 선임병이 사수로 배정되었는데 내가 시계공이라는 말을 듣고는 나를 퍽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었는데 그러면서 그는 대규모 전선이동이 예정되어 있는데 딱 죽기 좋은 타이밍에 왔다며 농담을 던졌다. 킬킬 웃어대던 그였지만 그 말을 하던 때만큼은 눈이 전혀 웃지 않고 경직된 채였다.

 

 그와 함께 야전시절들을 둘러보던 나는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도무지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여동생 또래의 소녀들이 군복을 입고 텐트들 사이를 익숙한 듯이 돌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오토마톤들이야, 왠만하면 엮이지 않는게 좋아. 생긴건 저래도 살인기계들 이니깐.”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그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거대한 타이탄을 조작하는 중추회로, 오토마톤. 타이탄의 거대한 신경회로를 인간은 버텨내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적을 섬멸하도록 설계된 자동인형 오토마톤을 부품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인간이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이상적인 살인기계를 만드는 것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인간과 닮았지만 무기질 적이고 감정이 없는 표정에 이질감을 느끼는 많은 병사들은 오토마톤들을 꺼림찍하게 여겼다. 그러다보니 오토마톤에 엮이면 얼마 못가 죽는다는 미신까지 생겨났다. 전쟁의 주역이었지만 그 누구도 오토마톤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나를 높게 솟은 천막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네개의 다리를 가진 반인반수의 거대한 기계가 트레일러에 실려있었다. ‘오시리스’ 기계의 외장에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이게 우리 정비반이 맡은 타이탄, 전쟁 초기 부터 사용하던 구닥다리 타이탄이지만 대단한 놈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외장에 새겨진 그림을 가르켰다.

 

 그가 가르킨 곳에는 각기 다른 생김새의 그림이 6개 그려져있었다. 그는 오시리스가 파괴한 동맹군 타이탄들이라고 했다. 오시리스는 유일하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구형 타이탄이었다. 그러면서도 5기 이상의 타이탄을 파괴한 에이스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는 베테랑 타이탄이었으니 그가 자부심을 가질만 했다. 그는 이미 내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오시리스와 타이탄의 굉장함을 이야기했다. 나는 흥분해서 숨도 안쉬고 말을 쏟아내는 그의 고간이 불룩해진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심각한 기계박이 였다.

 

 나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그를 내버려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한 타이탄에 맞춰 거대해진 장비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몸에 수많은 크고 작은 전선을 연결한 소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토마톤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 친숙함을 주기 위해 미형의 소녀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빛이 없는 눈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은 보는 사람에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토마톤은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더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한참을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 마주보고 있자 기박 상급병이 나를 급히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에게 저 오토마톤은 뭐냐고 물어봤다.

 

“오시리스의 오토마톤.” 그는 짧게 이야기했다.

 

 오토마톤들에게는 이름은 없고 그저 제조번호만 붙어있다고 했다. 타이탄과 달리 오토마톤은 망가지면 새로운 오토마톤을 넣으면 되는 소모품이니깐 이름 같은 것은 사치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는 기계는 좋아하지만 오토마톤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기계는 기계다워야지, 그치?’ 라며 동의하지 않냐는 듯이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하여튼 기계박이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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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이동하는 작전지로 향하는 선발대에 우리 정비반에서도 설영대에 합류해서 먼저 갈 인원이 필요하다.” 오시리스 정비반의 모두가 모인 앞에서 정비반장이 말했다.

 

 최근 며칠간 전장 이동 준비하고 있던 오시리스 부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나 같은 신참들 부터 벌써 몇년을 전장에서 보내고 있는 고참병까지 모두 긴장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정비반장이 지원 인원이 있는 지 물어봤지만 모두 서로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선발대에 붙어 이동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반장은 애초부터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차출될 인원들을 호명했다.

 

“... 이상 호명된 인원들은 오늘 저녁 선발대에 붙어서 출발할 예정이니 바로 준비하도록.”

 

 정비반장에게 불려진 인원들은 차례로 군장을 챙기러 나갔다. 나머지 병사들은 그들에게 작은 농담과 위로의 말을 전하며 자신이 차출되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나 역시 오자마자 그런 위험한 일에 끌려가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병, 너도 따라간다.” 정비반장의 입에서 청천벽력같은 말이 나왔다.

 

 그 날 저녁 출발전 식사에 선발대에 차출된 인원들에게는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정비반장이 보급반에 직접가서 뜯어온 특식이었다. 몇년간 구경도 못한 귀한 아이스크림이었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해치운 나는 병사용 야전 식당을 빠져나왔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너머에서는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과 함께 하늘이 깜빡 깜빡 빛났다.

 

 해가 완전히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았을 무렵 병력들이 탄 트럭 행렬이 위병소를 통과한다. 타이탄용 연료를 가득채운 초대형 유조차와 병력들을 태운 트럭, 이들을 호위하는 장갑차량에 트레일러에 실린 중장비 까지 선발대 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비와 인원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같은 트럭에 탑승한 보병들 중 한명이 입을 열었는데 우리 이전에 다른 보병 연대가 해당 전선에 배치되었는데 마물들의 장거리포와 중포탄에 병력의 반만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병사들은 개소리 하지 말라며 그의 철모를 두드렸지만 목적지에 가까워 질 수록 점점 늘어나는 거대한 포탄 구덩이와 완파되어 버려진 차량들을 보자 트럭에 탑승한 병사들의 말소리는 줄어만 갔다.

 

 길을 따라 차량이 앞으로 나아갈 수록 풍경에서 초록색과 푸른 색은 사라져갔고 회색과 검은색만이 보였다. 지평선 너머 까지 삭막한 회색으로 가득 찰 때 쯤이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맨 뒤에 있던 장갑차량의 포탑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트럭에서 내리려고한 순간 초대형 유조차의 탱크가 포탄에 맞아 찌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엄청난 빛과 폭음 속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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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들거리는 검은 광택의 타이탄과 그에 맞서 출격한 오시리스가 공격을 주고 받는다. 타이탄이 거대한 주먹이 공기를 가르고 서로에게 직격할 때 마다 그 진동이 지면에 전해졌다. 검은 타이탄의 오른팔꿈치에서 푸른 제트가 분사되었고 그 가속력으로 오시리스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오시리스는 두 손을 이용해 겨우 잡아냈지만 검은 타이탄의 가속력과 밀어붙이기에 점점 더 뒤로 밀려나며 힘겨루기를 하는 듯한 구도가 되었다. 검은 타이탄이 더 큰 출력을 가지고 있는지 오시리스는 계속해서 밀려났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팔의 실린더에서 기름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타이탄에게 완전히 스펙에서 압도당하고 있던 오시리스는 기체에 설치된 발연통에서 연막을 터트리고 배기구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검은 타이탄의 시야를 차단한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타이탄은 더욱 더 제트를 분사하며 오시리스를 압박했다. 그 순간 오시리스의 왼팔이 퍼지(purge)되면서 기체에서 떨어져나갔다.

 

 오시리스의 왼팔이 기체에서 떨어져나가면서 검은 타이탄의 오른팔은 오시리스의 남아있던 오른손의 일부를 파괴하면서 지나갔고 오시리스 기체 상부 장갑판을 뜯어냈지만 그러고도 오른팔의 에너지가 상쇄되지 않아 자세가 무너졌고 그대로 완전히 넘어지게 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오시리스는 날카로운 다리를 이용해 넘어진 타이탄의 등을 찔렀다. 4개의 다리에서 나오는 안정성과 강력한 다리힘에서 나오는 오시리스의 공격이 타이탄의 장갑판을 뚫고 핵심 구동부를 타격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검은 타이탄은 가까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유의미한 수준의 전투를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시리스의 공격에 관통된 부분에서는 폭발하는 스파크와 주황색 액체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기체 전체에서 뒤틀린 기어에서 나는 소음이 멈추지 않았다. 오시리스는 그런 타이탄를 계속해서 공격해나갔다. 부서져가는 타이탄에서 부품들이 떨어져나간다. 무차별적인 공격에 마침내 오토마톤이 들어간 조작계통마저 떨어져나갔는지 검은 타이탄은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오시리스가 무릎을 꿇은 타이탄을 완전히 처리하기 위해 두다리를 들어 내려찍으려고 준비하던 순간 오시리스의 기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타이탄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한 동맹군의 타이탄이 발사한 대 타이탄 중포였다. 오시리스는 지금의 기체상태로는 이 이상의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검은 타이탄을 내버려두고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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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타이탄이 격돌하는 순간 나는 최소한의 군장만 챙겨 타이탄들이 싸우는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성치않은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그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이동했다. 잿더미의 땅을 지나 아직 불타지 않은 멀쩡한 숲 속을 헤쳐나갈 때 쯤에는 지축을 뒤흔들던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갔고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 숲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전투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상처가 심하게 아파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나기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기지로 귀환보다 상처를 치료하고 비를 피할 장소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아니면 그전에 탈진해 죽을 것이 뻔했다. 나는 소총을 지팡이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는지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을 법한 동굴이었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야생동물을 대비해 소총을 겨누며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발견한 동굴은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어서 금새 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스파크가 터지며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씨발, 뭐야!” 나는 깜짝놀라 소리질렀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전등을 비추는 그 곳에는 오토마톤이 앉아있었다. 딱 달라붙는 검은 점프슈트를 입고 있는 그 오토마톤은 멀쩡해보였지만 등 뒤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데다 희미하게 스파크 음이 들리는 걸 보니 동력계에 이상이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듯 했다.  옷에는 동맹군들이 쓰는 문자가 적혀있는 것을 보니 적군의 오토마톤인 듯 했다. 내가 손전등으로 비추자 그 오토마톤은 그제서야 나를 쳐다봤다.

 

“인간…” 오토마톤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오토마톤에게 소총을 겨눴다. 내 행동에도 오토마톤은 그저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떨려왔다.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나를 직시하는 오토마톤의 눈과 마주쳤다. 어디를 봐도 여동생 또래의 소녀였다. 총구가 흔들린다.

 

 결국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나는 소총을 한손에 쥐고 오토마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군장을 뒤졌다. 다행히 군장 안에는 야전구급낭이 들어있었다. 공병의 군장이었는지 그와 같이 간단한 공구들도 같이 있었다. 나는 치료를 위해 상처부위를 확인했다. 처치를 위해 옷을 찢자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철 파편들이 상처부위 깊숙히 박혀있었다. 어설프게 뽑아내려고 하다간 쇼크로 기절하고 과다출혈로 사망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두기엔 출혈량이 만만찮았다. 기지까지의 거리가 가깝지 않아 걸어가는 사이에 실혈사할 것이다. 동굴 속에서 고철 오토마톤과 영락없이 죽게 생겼다.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나는 군장 속의 공구들을 보고 살아나가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어이, 깡통.” 나는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오토마톤을 불렀다. 하지만 오토마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절전 모드인가?

 

“야, 깡통.” 나는 주변의 조그만 돌멩이를 오토마톤에게 던졌다. 

 

 던진 돌멩이는 날아가 오토마톤의 몸에 맞았다. 그러자 오토마톤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깡통이라는 말이 왕국동맹군 타이탄, 반고의 조작 오토마톤인 제조번호 R3CM90AVDOL을 지칭하는 말인가, 연합군 인간?” 오토마톤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 여기 너말고 누가있다고…” 나의 말에 오토마톤은 다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오토마톤에게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널 움직일 수는 있게 고쳐줄 테니까 그 다음 네가 날 좀 치료해줘.” 이것이 내가 생각해낸 살아나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나는 움직일 수 없다. 마음대로 해라 인간, 하지만 내가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때 너를 치료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오토마톤이 말했다.

 

“걱정마, 난 총을 들고 있으니까.” 완전 천재적인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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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이이익.

 

 그녀가 입고있는 점프슈트에 달린 지퍼를 내렸다. 지퍼를 내리자마자 속에 가둬져있던 연기가 얼굴을 덮쳤다. 예상한 대로 동력계가 망가져 연기 뿜어져 나오고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나는 절연장갑을 끼고 오토마톤의 몸에 손을 집어넣었다.

 

“읏…” 오토마톤이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미안, 넣기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아프면 이야기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토마톤의 내부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내부가 완전히 뒤틀린 상태였다. 하지만 못 고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전에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을 잃지는 않을지 그 것이 문제였다. 동굴 안에서는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이따금씩 들려오는 그녀의 신음소리만이 들려왔다.

 

“깡통, 아무 말이나 좀 해봐. 안그러면 내가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나의 말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2, 3, 5, 읏, 7, 11, 아... 13, 17, 19, 큽, 23, 29, 31, 37, 으읏... 41, 응, 43, 47, 53, 앗... 59, 61, 71, 73, 79…” 그녀의 난데없는 숫자 나열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그런거 말고. 장난하냐… 평소에 연합군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나 그런거 없어?” 나는 그녀에게 역정을 냈다.

 

 나의 말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절전모드에 들어간 것 같았다. 방금 전의 이상한 숫자나열 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조용히 동굴의 물방울과 이녀석의 신음소리를 듣는게 훨씬 나았다.

 

“왜 나를 고쳐주는 거지 인간?” 오토마톤이 말했다.

 

“아니, 내가 말했잖아 고쳐주면 네가 날 치료하는 거라고.”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였지만 쉽사리 납득하지 못한 듯 했다.

 

“나는 방금 전 연합군의 선발대 행렬을 공격한 타이탄, 반고의 조작 오토마톤이다. 나를 죽이고 싶지않나? 내가 밉지 않은건가? 왜 나를 죽이지 않은거지?” 그녀가 말을 쏟아냈다. 진지하게 물어 온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을 골랐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대로…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인데, 이게 대답이 됐으면 좋겠네, 깡통.”

 

 나의 말에 그녀는 다시 고뇌하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동굴 안은 간간히 들리는 스파크 소리와 그녀의 꾹 다문 입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수리에 집중했다.

 

 다행히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다. 나는 등의 동력계 덮개를 닫고 그녀에게 신체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시험해보라고 했다. 그녀는 손가락과 발을 움직이며 수리된 몸을 조정해 나갔다. 그녀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소총을 그녀 방향으로 두고 구급낭을 그녀에게 던졌다.

 

“이제, 내 차례야. 허튼 생각하지말라고 난 총이 있으…”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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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어버린 듯 했다. 나는 급하게 주변을 더듬었다. 바로 옆에서 손에 길다란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것을 확인했다. 내 소총이었다. 소총을 잡고서야 겨우 나는 정성스럽게 몸에 감긴 붕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몸에 박혀있던 쇳조각들은 모두 제거 되어있었고 압박붕대로 잘 지혈이 되었는지 피도 더 이상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빛이 들어와 동굴 안을 밝혔지만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떨어진 전선 몇가닥이 어제의 오토마톤이 진짜였음을 증명했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고 치료를 해준 그녀에게 감사를 느끼며 한편으로는 말도 없이 떠난 그녀에게 아쉬운 감정을 가졌다. 서로 작별인사라도 했음 좋았을 것을…

 

 나는 짐을 챙긴 후 소총을 등에 메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이미 비가 그쳐 따스한 햇살이 숲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숲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어이, 깡통. 말도 없이 그냥 간 줄 알았잖아.”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젠 깡통이란 말에도 잘 돌아보네.”

 

“깡통을 제조번호 R3CM90AVDOL을 지칭하는 새로운 명사로 업데이트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무미건조한 그녀의 말에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너무 크게 웃은 탓인지 다친 가슴께가 아파왔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상의의 단추하나를 떼서 건내줬다. 

 

“원래는 서로 교환하는 건데 너는 단추가 없으니 그냥 내거 받기만 해.” 인간들 사이의 전통 같은거라고 말한 나의 말에 그녀는 내 단추를 받았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이름이 뭐지, 인간?”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헨리 윌리엄슨.” 내가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숲 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방향으로 가면 왕국동맹군의 반고 회수반과 마주칠 확률이 높다. 이쪽으로 쭉 가면 공화국연합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가려던 곳과 정반대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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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오토마톤은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오토마톤은 그에게서 받은 연합군 군복 단추를 꼭 쥐었다.

 

“헨리, 윌리엄슨…”

 

 오토마톤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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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느낌의 거대 로봇에 탑승한 오토마톤과 정비병의 로미오와 줄리엣 풍, 격렬한 순애 이야기 써줘. 진짜 기대할게...



참고한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 윌리엄 셰익스피어

폭풍우 치는 밤에 - 기무라 유이치 저/아베 히로시 그림 <- 이거 완전 명작이니 안 읽어본 사람을 꼭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