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태어나기가 나의 원죄.
모친은 내 출산과 함께 요절해버렸다.
창부의 아들, 이는 곧 나의 탄생 자체에 애정이 없으며, 내 존재가 마을 남성들의 허물의 증거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나를 극진하게 보살펴주었다.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 깨끗한 의복.
부족한것이 있다면 문자를 비롯한 미래를 꿈꾸고 내달리는데 필요한 교육의 부재와
그리고 나를 바라보지만 초점이 나에게 맞춰져있지않은 시선.
그들의 시선은 항상 비어있는채 내 너머의 뭔가를 바라보고있었으며, 공허한 눈동자는 마치
면죄받은듯한 후련함도 엿보였다.
이걸로 죄책감은 없다는거겠지
나는 나이가 차면 제단에 바쳐져 어느정도의 금붙이와 맞바꿔질 예정이었다.
근방 용의 둥지로 팔려가 노리개가 되는것 그것만이 내가 그릴수 있는 유일한 미래다.
주마등 비슷한 것일까?
얼마간의 회상을 끝내고나니 돌이킬것도 아쉬울것도없다.
가로 세로로 열걸음정도는 족히 될만한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제단에 위에 건너편이 쉽게 비쳐보이는
새하얀 비단으로 감싸진채 반 나신인 상태로 봉해져있다.
조금이라도 값어치를 놓게 책정받으려는 수작인걸까.
인간을 싫어하는 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위해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따사로운 햇발이 내 말라붙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을때
소나기와 함께 그녀가 내려왔다.

한 눈에 보기에 이 사람이란걸 알았다. 물빛 안개같은 긴머리, 차분히 가라앉은 푸른눈, 무슨 소재인지 모르지만 물을 머금있는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늘빛 드레스 , 허공을 딛고 내려오는 걸음걸이 하나 하나에
기품이 있지만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존재라는 걸 알았다.
처음 보는 순간 굶주린 내 마음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야말로 말라붙은 내 마음에 소나기였다.
그 소나기가 명확하게 나를 향해주고 있다.
나는 첫 눈에 반했다.
"이름은?"
목소리조차 마음에 스미는 듯하다.
현실감이 나지않아.
"대답해. 이름은?"
"아.. 죄송합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주인되시는 분께서 직접짓기 용이하시게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 인간들도 기분나쁜 배려를 하네."
그 사람들도 어떤게 용의 심기를 해칠지 불안했을테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너 스스로 정해라. 난 이름까지 지어줘야하는 짝은 필요없어."
"이름... 이름..."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벌써 심기가 불편한지 바닥에 꼬리를 탁탁 부딪히기 시작했다.
서둘러야한다.
이름... 이 소나기같은 아가씨의 짝으로써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해야한다.
"레이크입니다."
"그래, 나는 브루엘라. 너를 반려로 삼을 용이다."
이때 급조한 이름이 부끄러워 속으로만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저는 레이크. 소나기같은 당신을 반려로써 담아둘 호수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던 내 마음에 단비가 스며들었다.

용의 둥지에서 살게된 이후 나는 나날이 내 마음과 감정을 새로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항상 나를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직접 알려주었고 항상 그녀보다 키가 작은 나를 위해 무릎까지 굽혀가며
눈높이를 맞춰 내눈을 바라봐 주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 감정들을 숨기거나 하지않았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바라봐 줄 때마다 마음이 살아나는 듯해요."
이렇게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할때면 그녀는 도도한 표정도 무너뜨리고 고개를 돌리고는 헛기침을 하면서 빨개진 귀를 보여주곤 한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나는 집안 일을 하거나, 기초지식을 익히는 등의 앞가림을 할 수 있게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처음 할 일은 정해져있었다.

'당신을 처음만나고 이름을 알려주었을때 부끄러워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저는 레이크, 소나기같은 당신을 반려로써 담아둘 호수입니다.'
그녀의 우아한 필체와 비교하면 딱딱하고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듯한 흔적이 보이는 서체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모나게 보이지는 않는 글씨체라고 생각한다.
조금 부끄럽지만.
알려주고싶어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내 진심을.
"브루엘라씨"
"어? 무슨일이야? 모르는게 있어?"
읽던책을 접어주고 나를 바라봐 주는 브루엘라씨
떨리는 마음보다 두배는 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넨다.
내 얼굴 지금 엄청 빨갛겠지..
"편지? 나한테 쓴거야?"
"네에... 읽어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조심히 두손으로 종이를 받아들고는 이내 말이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편지 내용이 이상한가?
내가 너무 바보같이 글씨를 쓴걸까?
이런 저런 불안들이 커져가던 그때 갑자기 그녀가 나를 꽉 껴안았다.
기분좋은 비냄새가 난다.
"브루엘라씨?"
나를 껴안은 브루엘라씨를 올려보려던 순간
"안돼! 쳐다보지마... 나 지금 분명 이상한 표정짓고 있을테니까.."
그렇게 안긴채로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는걸까 그녀의 품과 팔에 감싸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기... 어디로..?"
"조용히 해! 아무것도 묻지마!"
오늘따라 이상하다 평소에도 고압적이긴 했어도 이렇게 강압적인 태도인적은 없었다.
그리고 몸도 평소보다 많이 뜨거운것 같은데..
아픈데 내가 귀찮게 한걸까?
"미안해요. 브루엘..훕"
지금 푹신한 어딘가에 떨어졌다.
침대인거 같은데 침구에서 나는 이 냄새 브루엘라씨 방이다.
"너...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내가 네 앞에서 기품있고 멋있는 사람이려고.. 저한테 자랑스러운 반려이려고 얼마나 얼마나 노력하는데 이런걸 보여주면 참을수가 없잖아!"
"브루엘라씨..."
"브루엘라씨, 블루엘라씨. 듣기 싫어! 벨라라고 불러."
"벨라씨"
"벨라라고 부르라고."
"벨라.."
"흐읏.. 이렇게 된거 다 네 잘못이니까, 다 네 탓이니까, 책임지고 내 모든걸 담아줘, 레이크"
그 뒤는 기억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마치 격류에 휩쓸리는 듯한 감각으로 기억나는건 벨라는 잠자리가 굉장히 격한 사람이라는것.
그리고 정식으로 반려로써 그녀의 심장을 나눠받았다는것.
그리고 3일동안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
이후 일주간 자리에서 일어나는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많이 변했다.
벨라는 나를 곁에 떼어놓지 않으려 하며 3걸음 이상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절 허용되지않았다.
그리고 벨라의 심장을 나눠받아 서로의 감정이 반씩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벨라의 감정을 절반 나눠받으며 벨라가 겉으로는 도도하고 우아해도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외로움을 타는지 알 수 있었다.
기뻤다. 벨라가 전해오는 시선보다 더 진하고 직접적으로 감정을 알 수 있다는 게
벨라, 나의 사랑스러운 벨라, 내 마음의 단비... 이 내 마음도 벨라에게 전해진다는게 기쁘다.
시간이 지날 수록 벨라의 심장은 내 속에 더더욱 뿌리내려갔고 더더욱 깊은 감정까지 공유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벨라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가고 그에 답하듯 벨라의 애정도 커져만 갔다.
그럼에 따라 자연스럽에 침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즐겁고 기쁜 나날이었다.



글쓰는거 생각보다 어렵구나